쇄국을 통한 안정③
1639년부터 바쿠후는 쇄국을 공식 정책으로 채택하고 모든 서양인의 출입을 금지했다. 심지어 해외에 오랫동안 거주한 일본인마저 그리스도교 신도일지 모른다는 이유로 귀국이 금지되었다. 한 가지 예외는 네덜란드였다. 네덜란드만은 제한적으로나마 무역을 계속할 수 있었다. 그 이유는 이에야스 시절부터 생긴 네덜란드와의 각별한 친교 때문인데, 지금까지도 그 흔적이 남아 일본에는 특별히 네덜란드와 관련된 근대의 유적들이 많이 있다【18세기 초반부터 네덜란드를 통해 서양의 과학과 군사학, 세계의 지리와 역사를 연구하려는 학문이 크게 성행했는데, 이것을 란가쿠(蘭學: 네덜란드는 한자로 和蘭이라고 표기했다)라고 불렀다. 바쿠후는 네덜란드에 대해서만큼은 특별한 호의를 베풀었으며, 네덜란드 역시 그 호의에 충실히 부응했다. 1844년에 네덜란드 국왕은 일본의 쇼군에게 친서를 보내 세계정세의 변화를 설명하고 개국을 충고한 일이 있었다. 또 미국의 페리 제독이 일본을 강제 개항시킨 1853년 무렵에 네덜란드는 몇 년 전부터 미국이 곧 일본에 함대를 보내 통상을 요구할 것이라는 정보를 여러 차례 전해주었다】.
센고쿠 시대를 끝으로 일본은 다시 전란으로 얼룩지는 사태 없이 300년에 가까운 번영과 평화의 시대를 누리게 된다. 그러나 이 기간에 일본은 쇄국으로 일관했다. 묘한 것은 그 쇄국의 앞과 뒤가 대외 침략이라는 점이다. 에도 시대처럼 공식적인 쇄국은 아니지만 일본은 중국과의 교류를 끊은 8세기 이후 전국을 통일한 16세기까지도 대외적으로는 쇄국기였다. 첫 번째 쇄국이 끝난 뒤 일본은 조선을 침략했고, 두 번째 쇄국이 끝난 뒤에도 다시 조선을 노렸다. 그렇다면 일본 역사에서 쇄국은 곧 대외 침략을 위한 웅크림이었던 것일까?
▲ 일본 최초의 서양인 일본에 처음으로 발을 내디딘 서양인은 1543년의 포르투갈인이었다. 일본에 온 서양인들은 단지 호기심 때문이 아니라 처음부터 그리스도교를 전파할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정작 그들에게 호기심을 보인 것은 오히려 일본인들이었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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