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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종횡무진 한국사, 2부 화려한 분열 - 3장 뒤얽히는 삼국, 믿을 건 외교뿐③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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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횡무진 한국사, 2부 화려한 분열 - 3장 뒤얽히는 삼국, 믿을 건 외교뿐③

건방진방랑자 2021. 6. 13. 06: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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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을 건 외교뿐

 

 

그 다음 후보로 떠오른 것은 일본이다. 근초고왕(近肖古王) 때 서로 안면을 익혔다가 한동안 잊고 지냈던 일본, 그러나 현 위기를 타개하는 데 유일하게 도움을 얻을 수 있는 세력은 일본뿐이다. 해답을 찾았다 싶은 아신왕(阿莘王)은 황급히 397년에 일본과 정식 수교를 맺기로 한다. 태자까지 일본에 볼모로 보낼 정도였으니 그의 다급한 심정을 충분히 읽을 수 있다. 이후 백제와 일본은 여러 차례 사신을 주고받으면서 돈독한 우애를 다진다. 비록 두 나라의 거리는 상당히 멀지만 가야라는 징검다리가 있어 국제관계를 유지하는 데는 별 무리가 없었다. 당시 가야는 마치 오늘날의 자유무역항과 같은 일본 전용 무역기지를 두고 일본과 활발한 무역을 벌이고 있었는데, 특히 백제와 일본을 이어주는 중계무역이 전문이었다이 때문에 식민지 시대 일본의 역사학자들은 일본이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다는 논리를 폈다. 이른바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이 그것인데 (임나란 금관가야를 가리킨다), 가야가 일본이 한반도를 지배하기 위한 전진기지였다는 주장이다. 물론 그것은 가야에 일본과 거래하던 무역기지가 있었다는 사실을 일본 측 입장에서 확대ㆍ왜곡한 논리였기에 곧 설득력을 잃었다. 문제는 그런 억지 논리를 오늘날 국내 일부 역사학자들도 전개한다는 점이다. 이를테면 백제가 산둥을 비롯한 중국 일부 지방에 무역기지를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확대ㆍ왜곡해서 백제가 마치 중국 동해안을 관장하고 황해 무역을 독점한 것처럼 주장하는 게 그 예다. 백제는 일본의 물리적인 도움이 필요하고, 일본은 백제의 문화적인 도움이 필요하다. 예나 지금이나 바람직한 사이란 이렇게 서로 부족한 점을 메워 주는 관계일 것이다.

 

하지만 그 바람직스러운 관계로도 고구려의 기세를 막지는 못했다. 399아신왕(阿莘王)은 일본과 가야까지 총동원해서 연합군을 이루어 고구려 측으로 달라붙은 배신자 신라를 먼저 응징하려 했다. 그러나 내물왕의 SOS를 받은 광개토왕(廣開土王)5만의 대군을 보내는 바람에 아신왕은 다시 자기 머리털을 쥐어뜯어야만 했다. 게다가 백제와의 연고 때문에 할 수 없이 출병한 가야는 내친 김에 본토까지 밀고 내려온 고구려 군에 의해 된서리를 맞고 말았다(이것을 계기로 가야는 국력이 약화되기 시작해서 나중에는 신라에 병합된다). 아신왕(阿莘王)은 그에 굴하지 않고 404년에는 왜군과 함께 대방의 수복을 꾀하지만, 결국 또 다시 실패하고 그 이듬해 짧지만 파란만장했던 재위 기간을 마감한다. 아마 그는 하필이면 제갈량의 시대에 태어난 주유와 같은 심정이었을 것이다. 아니면 불과 한 세대 전 증조할아버지(근초고왕)에게 자신과 똑같이 당한 고구려 고국원왕(故國原王)에게 동병상련을 느꼈을까?

 

 

 가야의 운명 삼국시대 초기, 그러니까 사진의 고분들에 가야의 왕들이 묻힐 때만 해도 가야는 백제, 신라와 어깨를 견줄 만한 국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던 가야가 몰락한 이유는 일찍부터 해상 진출에 주력하느라 상대적으로 육로로의 영역 확장을 게을리 한 탓이다. 철광산이 많고 바다에 면해 있다는 이점이 오히려 더 이상의 발전을 가로막는 질곡이 된 셈이다. 어쨌거나 그런 지리적 여건 때문에 가야는 일찌감치 한반도 바깥의 문명을 접했으며(불교도 삼국보다 먼저, 그것도 인도로부터 직수입했다는 설이 있다), 자연히 일본과도 교역하게 되었다. 따라서 가야는 한반도와 일본을 잇는 가교의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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