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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횡무진 한국사, 4부 한반도의 단독정권 - 2장 소용돌이의 동아시아, 흔들리는 중심③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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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횡무진 한국사, 4부 한반도의 단독정권 - 2장 소용돌이의 동아시아, 흔들리는 중심③

건방진방랑자 2021. 6. 14. 0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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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들리는 중심

 

 

그러나 세계제국 당은 현종의 시대에 산꼭대기에서 갑자기 절벽으로 추락하게 된다. 사실 갑자기' 라고 말할 수는 없다. 초기부터 제국의 골간이었던 균전제(均田制)가 서서히 무너져온 게 화근이었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한다면 제국의 몸집은 커가는데 제도의 옷은 전혀 늘리지 않은 탓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균전제란 쉽게 말해서 토지[]를 농민들에게 고르게[] 나누어주고 일정량의 생산물을 조세로 거두어들인다는 제도다(일본의 반전제도 내용은 같다), 지금 생각해보면 너무나 평범해서 굳이 제도라 부를 필요도 없어 보이지만 당시로서는 아주 깜찍하고 참신한 제도였다. 그러나 모든 제도가 그렇듯이 균전제도 시대에 따라 변하지 않으면 안 된다. 원래 새 나라가 출범할 무렵에는 토지가 흘러넘치게 마련이다. 이전 왕조의 토지 소유를 무효화하고 모든 토지를 국유화해서 새로이 분급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기쯤 되면 토지가 부족해진다. 인구는 늘어나고 봉급을 줘야 할 관리도 늘어난다(관리의 봉급은 물론 토지다), 결국 그 부담은 농민들에게 지워지고 견디다 못한 농민들은 토지를 버리고 떠난다.

 

제국의 경제적 토대인 균전제가 흔들리자 모든 게 흔들린다. 우선 조세제도인 조용조(租庸調)가 무너진다. 조용조 역시 균전제(均田制)와 마찬가지로 북위에서 처음 만든 제도인데, 삼국시대에 한반도에도 전해졌고 통일신라는 물론 이후 고려와 조선에서도 기본적인 조세제도로 기능하게 되니까 여기서 간단히 짚고 넘어가자. 앞의 조()는 토지를 대상으로 하는 세금(즉 곡물이다)이고, 뒤의 조(調)는 가구를 대상으로 하는 세금(원래는 특산물인데 일반적으로는 베를 짜서 국가에 바치는 것이었다)이며, ()은 국가에서 정기적으로 농민들을 불러 일을 시키는 것이다. 비록 조세의 명칭은 세 가지지만 모두 농민들을 쥐어짜는 것인데, 농민들이 토지를 이탈하는 판에 이런 제도가 멀쩡할 리 없다균전제(均田制)조용조(租庸調)는 전형적인 농경문명의 성격을 잘 보여준다. 비록 농민에 비해 숫자가 훨씬 적기는 하지만 지주도 있고 상인이나 수공업자도 있는데 조세 담당 주체는 오로지 농민으로만 한정되어 있는 것이다. 이 문제를 개선하기 위해 당은 양세법(兩稅法)이라는 것을 만들어 시행하지만, 초기에만 잠깐 효과를 볼 뿐 곧 이것도 제대로 기능하지 못한다. 이에 비해 서양의 경우는 중국처럼 정치적 통일이 견고하지 못했기에 통일적인 조세제도가 없었다. 중국에서 균전제(均田制)가 무너진 시기, 9세기 초반의 유럽에서는 세금이라는 게 없었고, 국가 재정은 귀족과 지주들의 기부금으로만 충당했다. 이후 중세 유럽의 봉건 영주들은 장원의 방앗간, 대장간, 부두 시설 등의 이용료를 받고 토지 생산물의 경우에도 농노들에게서 지대(地代)개념으로 세금을 거두었으므로, 정치권력의 힘으로 유지되는 동양식 왕조의 조세제도와는 성격이 달랐다.

 

말이 전성기일 뿐 실상 현종 대에는 그동안 서서히 누적되어 온 제국 체제의 모순이 한계에 도달한 것이다. 결국 그 모순이 고름으로 터져나오는 순간이 닥친다. 755년 번진의 절도사였던 안녹산(安祿山)과 그 부하인 사사명(史思明)이 일으킨 안사의 난이 그것이다. 난리 초기에 현종은 멀리 쓰촨까지 도망쳤다가 이듬해 아들에게 제위를 이양하고 장안에 돌아왔으나 유폐 생활을 하다가 죽었다(신라의 경덕왕은 쓰촨으로 도망친 현종에게까지 사신을 보냈는데, 특별한 오랑캐의 지극정성에 감격한 현종은 직접 시 한 수를 지어 보내 치하했다). 안사의 난은 10년 가까이 지속되다가 결국 진압되었지만 이 사건을 계기로 당은 사실상 멸망한 것이나 다름 없을 정도로 완전히 몰락한다. 오죽하면 후대의 역사가들이 이후의 시대를 당말오대(唐末五代, 907년 당이 멸망하고 나서 다섯 왕조가 교대로 들어서는데 이것을 오대라 부른다)라고 부를까?

 

그렇다면 신라가 혜공왕 때부터 그렇듯 갑작스럽게 쇠락의 길을 걷기 시작한 이유는 분명해진다. 혜공왕 대에 귀족들의 반란이 갑자기 잦아진 이유는 모국이라 할 중국이 흔들리고 있기 때문이다(더욱이 신라의 토지제도는 당의 균전제(均田制)를 모방한 것이었기에 신라 사회 역시 당과 똑같은 몸살을 앓고 있었다). 이제 중심은 없다. 일본은 아예 당에게서 등을 돌렸고 신라는 더 이상 사대하고 모방할 대상이 사라졌다. 질서의 축이 무너진 동아시아는 서서히 혼돈의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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