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 고난에 찬 데뷔전
중국화 드라이브
송나라 초기에 고려가 잠시 중국과 교류를 단절한 이유는 새로 생긴 송나라가 과연 대륙의 진정한 주인이 될 수 있을까 하는 우려 때문이었다. 하기야 907년에 당나라가 망한 뒤 50년도 채 못되는 기간에 벌써 다섯 왕조가 교체되었으니 충분히 할 수 있는 우려다. 게다가 당시 광종(光宗)은 5대의 마지막 왕조인 후주와 우호를 맺은 지 얼마 안 되었던 터라, 후주의 무관으로 있다가 제위를 빼앗고 송나라를 건국한 조광윤을 바라보는 시선이 고울 수는 없었다(그랬기에 광종은 연호를 별도로 정하고 황제를 자칭하며 한껏 호기를 부린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조광윤이 대륙의 새 임자라는 사실은 점차 분명해진다. 그래서 972년에 광종은 송에 사신을 보내 수교를 청하는데, 그 사절단에는 장차 20년 뒤 외교관의 자질을 유감없이 발휘하게 되는 서희(徐熙, 942~998)라는 사람이 끼어 있었다.
신생 제국 송과의 서먹한 감정이 해소되자 고려는 기다렸다는 듯이 중국회를 서두른다. 이미 과거제(科擧制)와 전시과(田柴科)로 기본적인 토대를 갖추어 놓았으니 수교가 이루어진 마당에 더 이상 중국화를 망설일 이유가 없다. 성종(成宗, 재위 981~997) 때 꿰어진 본격적인 중국화 작업의 첫 단추는 우선 유학을 활성화시키는 것이었다. 과거제를 도입함으로써 유학 이념이 현실 정치에 적용될 수 있는 통로가 열렸으므로 이제 고려를 유학에 입각한 사회로 만들려는 것이다. 그래서 즉위하자마자 성종은 옛 신라 6두품 세력의 유학자들을 대거 기용하는데, 그 대표적인 사람이 최승로(崔承老, 927~989)다.
982년에 왕명에 따라 성종에게 올린 「시무 28조」에서 최승로는 불교에 대해 집중적으로 성토하면서 고려 사회 전반을 유교적으로 재편할 것을 제안하고 있다. 물론 훈요 10조의 첫 항이 불교를 숭상하라는 것이었으므로 정면으로 불교를 공격할 수는 없는 일, 그래서 그는 불교와 유교의 교묘한 ‘분업’을 유도한다. 불교를 실천하는 것은 수신(修身)의 근본이며, 유교를 실천하는 것은 치국(治國)의 근본입니다. 얼핏 들으면 둘 다 중요하다고 말하는 듯하지만, 알고 보면 불교는 개인적 신앙이나 도덕의 영역으로만 제한하고 국가와 사회의 골간은 유교를 바탕으로 해야 한다는 이야기다. 최승로의 메시지를 잘 이해한 성종은 즉각 중앙관제의 개편에 나선다. 당나라의 제도를 본받아 정(正)과 종(從)의 구분으로 관직의 품계(品階)를 정하고, 최고 의결기관에 해당하는 내사문하성(內史門下省)과 내각격인 어사도성(御史都省)을 갖추어 3성 6부 체제를 완비한 게 그 성과다【품계도 그렇지만 3성(三省)제도도 당나라의 중앙관제를 본뜬 것이다. 원래 3성은 중서성(조칙에 관한 업무), 문하성(중신의 건의 통로), 상서성(이ㆍ호ㆍ예ㆍ병ㆍ형ㆍ공 등의 6부 관할)을 가리킨다. 고려 초기 왕건은 태봉의 중앙관제를 본받아 광평성, 내봉성, 내의성의 3성을 갖추었는데, 이것들은 각각 상서성, 문하성, 중서성에 해당한다. 업무의 성격상 귀족들의 이해관계를 대변할 수밖에 없는 광평성이 가장 중심이었다는 사실에서 고려 초기의 사정을 짐작할 수 있다. 왕권 강화를 꾀한 성종은 광평성을 어사도성(곧 상서도성으로 개칭된다)으로 바꾸어 약화시키고 왕실 직속기관인 내사문하성(중서성+문하성)의 기능을 강화했으므로 사실상 중국식 3성 체제를 갖춘 것은 그 무렵으로 봐야 한다. 이 점에서도 고려와 당나라의 유사성을 볼 수 있다. 일찍이 당나라 조정에서도 외척 귀족과 환관 세력이 문하성과 상서성을 지배하면서 황실을 좌지우지한 폐단을 익히 알고 있던 조광윤은 문하성과 상서성을 중서성에 통합해 버렸지만, 그와 같은 강력한 리더가 없었던 고려는 옛 당나라의 중앙관제를 본받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밖에 군사와 왕명 하달을 맡은 중추원(中樞院, 숙종 때 추밀원樞密院으로 이름이 바뀐다), 사법부에 해당하는 어사대(御史臺)가 모두 성종 대에 신설되었으니, 오늘날로 치면 행정, 입법, 사법의 3부가 갖춰진 셈이다.
중앙관제가 자리잡았으면 그 다음 차례는 지방이다. 물론 지방은 아직 호족들의 세상이었으므로 함부로 중앙집권식 제도를 추진할 수는 없으나 그렇다고 마냥 방치해 둔다면 나라꼴이 나지 않는다. 뭔가 절충책이 필요한 상황에서 최승로가 제안했던 방책은 전국 각지에 지방관을 상주시키는 것이었다. 지방관이 직접 지방의 행정을 담당할 수는 없다 해도 최소한 중앙과 지방을 연결하는 연락관의 역할은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성종은 전국의 주요 도시에 12목(牧)을 두고 목사(牧使)들을 파견한다(쉽게 말해서 전주나 상주처럼 주州라는 이름을 가진 도시, 즉 주현이 목으로 편성되었다고 보면 된다. 이때 생겨난 목은 조선시대에도 지방행정구역으로 사용되며, 오늘날 도道라는 행정구역의 시초이기도 하다). 목사가 지방행정에서 당장 큰 역할을 한 것은 아니었으나 그래도 연락관을 상주시킨 효과는 있었다. 일부 힘센 호족들은 그 통로를 이용해서 중앙의 정치무대에 진출하기도 했으며, 약한 호족들은 점차 독자적인 세력을 잃고 지방 향리로 격하되어 갔기 때문이다.
아직 완전하지는 않지만 이제 고려는 신생국이라는 딱지를 떼고 안정과 번영의 길로 접어들었다. 개국한 지 70년, 반도의 통일을 이룬 지 50년을 끌어오면서 태생적인 모순 때문에 여러 가지 진통도 많았으나 이제는 얼추 극복한 듯싶다. 사실 대내적으로만 보면 지극히 평안해 보인다. 비록 지방 호족들이 여전히 강성하긴 하지만 어차피 대세는 중앙집권의 방향으로 흐르고 있으므로 궁극적으로는 그들도 고려 왕실에 완전히 복속될 것이다. 그리고 아직 과거제(科擧制)가 완전히 뿌리 내리지는 못했지만 이 역시 장기적으로 고려는 유학 이념에 입각한 관료제 사회로 발달해갈 게 틀림 없으므로 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 그리고 이렇게 호족들이 중앙에 복속되고 과거제가 뿌리내리게 되면 당시까지의 한반도 역사상 가장 평화로운 시기였던 8세기 초반의 ‘팍스 아시아나’ 시대로 되돌아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중앙과 지방행정제도의 개편을 완료한 993년에 성종은 그간의 치적에 대한 마무리 삼아 양경(개경과 서경)과 12목에 상평창(常平倉)을 설치하면서 마냥 뿌듯한 심정이었을 것이다. 상평창은 이름 그대로 ‘항상[常] 변함없이 유지하는[平] 곳간[倉]’, 즉 풍년시에 국가가 곡물을 비싸게 사두었다가 흉년이 들 경우 싸게 내다파는 물가조절기관이었으니, 그의 개혁 가운데 유일하게 순수히 행정적인 조치에 해당한다. 이렇듯 민생을 위한 비정치적인 분야에까지 신경을 쓸 수 있었다는 것은 곧 성종이 체제 안정에 상당한 자신감을 품었음을 말해준다.
그러나 그것은 착각이었다. 그 전까지의 한반도 왕조들이 모두 그랬듯이 고려도 궁극적인 안정을 이루기 위해서는 대외적인 평화와 안정이 더 중요했다. 신라 역사 1천 년 동안 유일한 번영의 시기였던 8세기 초반도 역시 중국의 당나라가 동아시아 질서의 강력한 구심점으로 역할했기에 가능하지 않았던가? 더욱이 송나라가 들어설 당시 동아시아 지역은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도 북방 민족들의 힘이 강성한 시기다【역사서를 보면 송나라는 조광윤이 모토로 삼은 문치주의 때문에 물리력이 약해졌다고 하지만, 실상은 북방 민족들의 힘이 강해졌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약화된 것으로 봐야 한다. 사실 송나라는 역사적으로 중국식 제국 체제의 완성형에 해당한다. 유학을 기준으로 보면 그때까지의 중국사를 이렇게 정리할 수 있다.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에 유학의 이념이 생겨났고, 한나라 때 유학이 국가 이데올로기로 공인되었으며, 남북조시대에는 장차 유교 제국을 이루기 위한 기본 조건들(균전제와 과거제)이 숙성되었다. 그 결과물이 당나라였으나 당나라는 과거제를 도입하기만 했을 뿐 귀족 지배 체제를 완전히 극복하지 못했으므로, 천자를 정점으로 하고 사대부들이 보좌한다는 완벽한 유교 관료제 사회는 다음 송나라의 숙제로 남겨야 했다. 조광윤이 강력한 전제 체제를 구축한 것은 곧 송나라에 이르러 중국식 제국이 완성되었음을 말해준다】.
중국에 한족 통일제국이 들어설 때마다 중원 북변을 집요하게 공략해 왔던 이민족들은 이제 간헐적인 침략과 약탈의 수준에서 벗어나 별도의 왕조 체제를 갖추고 본격적인 중원 입성을 위한 준비를 착실히 해나가고 있다. 그 대표자가 바로 거란의 요나라다. 일찍부터 고려가 친송(親宋) 정책을 추구하는 것에 불편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던 그들은 결국 고려에게 잘못된 중국화의 대가가 어떤 것인지 보여준다.
외교로 넘긴 위기
성종이 상평창(常平倉)을 설치하고 뿌듯해 하던 그 해에 압록강 부근의 여진족은 머잖아 요나라 황제 성종이 침공해 오리라는 불길한 소식을 고려 측에 전한다(고려의 왕은 成宗이고 요의 황제는 聖宗이지만 공교롭게도 한글 발음으로는 같다). 당시 여진은 랴오둥의 요나라와 대동강 이남의 고려 사이에 해당하는 중립지대에서 살고 있었으나 아직 부족 통일을 이루어 국가 체제를 형성할 만한 단계는 아니었다(이렇듯 랴오둥은커녕 옛 고구려의 심장부에 해당하는 압록강 주변 지역조차 관장하지 못했으니, 영토적으로 봐도 고려가 고구려를 계승했다는 주장은 어불성설이다). 말이 중립이지 실상 여진은 이 지역을 제패하려는 거란에게서 시달림을 받고 있었으므로 상대적으로 고려에 친화적이었다. 고려에 거란의 준동을 경고해준 것은 그런 심정의 발로였다.
과연 그들의 경고대로 해를 넘기지 않고 993년 말에 요나라의 성종은 소손녕(蕭遜寧)을 사령관으로 삼아 무려 80만의 대군으로 느닷없이 고려의 북변을 침공하게 했다. 일단 앉아서 당할 수는 없으므로 고려의 성종은 서둘러 군대를 북쪽으로 파견하지만, 가뜩이나 국력이 안정되지 못한 데다가 개국 초부터 무관을 차별대우해왔던 고려의 군사력이 거란군을 당해낼 수는 없다. 더구나 그의 마음을 답답하게 만든 것은 도대체 왜 그들이 침공해 왔는지를 모른다는 점이다. 몇 차례 패전을 거듭한 뒤 성종은 거란 측에 사신을 보내 의도를 타진하는데, 소손녕은 무조건 항복만을 요구할 뿐이다.
사실 그들이 침략해 온 이유는 알기 어렵지 않다. 우선 추리를 위한 단서들을 모아보자. 요나라의 궁극적 목표는 중국 대륙이지 고려가 아니다. 더구나 불과 몇 년 전에 요나라는 연운 16주를 수복하려는 송나라와 싸운 바 있다. 그런데 지금 그들은 고려를 침략하면서 항복만을 요구한다. 이 고리들을 꿰어 맞추면 하나의 사슬밖에 나오지 않는다. 즉 요나라는 송나라를 공격하기 전에 후방의 정지작업을 도모한 것이다. 대적과 싸우기 전에 먼저 뒤를 든든히 다지는 건 상식이니까.
그러나 다급해진 고려 조정의 눈에는 이런 상식이 보이지 않는다. 그릇된 정세분석에서는 그릇된 대책밖에 나올 게 없다. 소손녕의 태도를 나름대로 분석한 고려 조정은 엉뚱하게도 요나라에 대동강 이북의 땅을 내주자는 결론에 도달한다(소손녕은 땅을 요구한 게 아니었을뿐 아니라 대동강 이북은 원래 고려의 영토도 아니었으니 터무니없는 결론이 아닐 수 없다). 이 다수의 결론에 반발하고 나선 사람이 서희(徐熙)다. 계속 싸우자는 서희의 강경론에 성종이 거들고 나서자 사태는 묘하게 돌아간다. 이길 수 없는 싸움을 계속하자는 전략이 대체 어디 있을까? 사실 서희가 그런 무리한 주장을 편 데는 아마도 옛 신라계 세력이 고려 조정을 휘어잡고 있는 것에 대한 반감도 작용했을 것이다. 그는 원래 경기도 이천의 토착 호족이었다가 아버지 대부터 중앙 정치 무대에 데뷔한 신흥 세력이었기 때문이다.
다행히도 운은 아직 고려의 편이다. 항복하겠다는 대답을 듣지 못한 소손녕은 급한 마음에 군대를 움직였다가 청천강 부근의 안융진(安戎鎭)에서 가로막혀 주춤하게 된다. 어차피 고려의 항복만 받아가면 될 뿐 정복하려는 의지는 없었으므로 그는 다시 고려 측에 대화를 요구한다. 결자해지(結者解之)라 했던가? 고려 측 협상 파트너는 당연히 주전론을 주장한 서희(徐熙)가 될 수밖에 없다.
거란군 진영에 마련된 협상 테이블에 앉은 두 사람은 우선 기 싸움으로 시작한다. 소손녕이 신하의 예를 갖추라고 하자 서희는 그러지 말고 대등한 관계에서 협상하자고 맞섰다. 자랑거리는 못 되지만 한반도 역대 왕조들은 모두 중국의 한족 왕조 이외에 어느 누구에게도 머리를 굽힌 적이 없지 않은가? 그러나 서희의 당당한 기세가 실은 허세임을 아는 소손녕의 첫 마디는 예리하기 그지없다. “고려는 신라 땅에서 일어났으면서도 왜 요나라 땅인 압록강 부근으로 진출하려 하는가?” 날카롭기는 하지만 대답하기 까다롭진 않은 질문이다. 고려는 실제로 신라를 계승했지만 명분상으로는 고구려를 계승한다는 이중적 태도를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고려는 국호에서도 알 수 있듯 고구려의 후예다. 따라서 영토로 따지면 오히려 요나라 심장부인 랴오양도 우리 땅이 돼야 하는데, 무슨 소린가?” 여기까지는 서희도 명분에서 밀리지 않았으나 정작 본론은 그 다음이다. “그건 그렇다 치자. 그럼 고려는 왜 이웃인 요나라를 멀리하고 바다 건너에 있는 송나라를 받드는가?”
고려의 건국 이념에 내포된 모순을 단도직입적으로 지적한 뼈아픈 질문이다.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 정답을 말한다면 “역사가 시작된 이래 우리는 늘 중국의 한족 왕조에게 사대해왔다”고 해야 하리라. 그러나 아무리 목숨을 걸고 적진에 들어간 서희(徐熙)라 해도 그렇게까지 대답할 배짱은 없다. 그렇다면 거란과 고려는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너게 되니까. 그래서 서희는 여진을 팔기로 마음먹는다. “요나라를 받들고 싶지만 간사한 여진의 도적들이 조공 길을 막고 있어 불가능하다.” 영리하지만 야비한 술책이 아닐 수 없다. 여진은 오히려 고려를 도우려는 세력이 아닌가? 어쨌든 효과는 만점이다. 무리해가면서 고려를 정복할 생각은 없는 소손녕과 어떻게든 지금의 난국을 타개하려는 서희의 계산은 바로 그 지점에서 맞아떨어졌다. 양측은 여진을 공동의 적이자 희생양으로 삼는 데 동의한다. 고려는 조공로를 튼다는 구실로 여진의 거주지인 압록강 동쪽을 정복할 수 있고, 요나라는 고려의 복속을 받아낸 것은 물론 고려의 손을 빌려 은근한 골칫거리인 여진마저 제압할 수 있다. 이것으로 각본은 다 짜였다【서희는 미리부터 요나라의 의도가 영토 확장에 있지 않다는 것을 간파하고 있었다. 그래서 땅을 떼어주자는 할지론(割地論)에 반대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그는 고려와 송을 떼어놓으려는 요나라의 진의를 알고 있었을까? 아마 그랬을 것이다. 협상에 나서면서 그는 처음부터 송과의 국교를 끊고 요의 연호를 사용할 것을 각오하고 있었을 것이다. 어쩌면 고려 조정에서도 그걸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다만 송을 배척하고 오랑캐인 요에게 사대하느니 차라리 땅을 떼어주는 게 훨씬 낫다는 판단에서 그걸 인정하지 않았던 것인지도 모른다. 영토와 주권이 어느 것보다 중요한 오늘날의 국제관계에서라면 서희(徐熙)의 입장이 단연 옳겠지만 명분이 중요했던 시대에는 반드시 그렇지도 않으므로 서희의 입장을 일면적으로 평가할 순 없겠다】.
약소국을 놓고 강대국들이 맺는 조약은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 없는 걸까? 당시 서희는 그로부터 밀레니엄이 지난 뒤인 1905년에 미국과 일본이라는 강대국이 필리핀과 조선의 지배를 서로 묵인하기로 하는 가쓰라-태프트 조약을 맺으면서 후손들이 나라를 잃게 되리라는 사실은 알지 못했을 것이다. 가쓰라와 태프트가 한반도와 필리핀의 운명을 전혀 배려하지 않았듯, 소손녕과 서희(徐熙)는 여진의 처지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조약은 이듬해부터 발효된다. 994년 고려는 요나라에 대한 복종의 증거로 통화(統和)라는 요나라 연호를 쓰기 시작하면서 송나라와의 국교를 끊었고, 거란어를 배우기 위해 요나라에 유학생을 보냈으며, 압록강 하류 일대를 여진에게서 빼앗아 강동 6주를 설치했다. 고려의 국경이 압록강에 이른 것은 이번이 처음이지만, 강대국 요에 사대하고 약한 여진을 괴롭힌 결과였으니 뒷맛이 개운친 않다. 더구나 거란의 관점에서 보면 그것은 중국 역대 한족 왕조의 전매특허인 이이제이(以夷制夷, 오랑캐로써 오랑캐를 제압함) 수법을 멋지게 써먹은 결과일 뿐 아니라 고려의 복속을 받아냈으므로 고려가 개척한 영토 역시 형식적으로는 자기들의 땅이라고 여겼을 테니 당연히 불만은 없다.
▲ 분쟁 지역 11세기 초반 극동 3국의 쟁탈지는 중국 방면의 연운 16주와 한반도의 강동 6주였다. 서희(徐熙)가 강동 6주를 설치한 것은 외교적 성과일 수도 있지만, 실은 거란의 수에 놀아난 측면도 있다. 거란은 고려가 설사 압록강 유역까지 차지한다 해도 거란을 공격하지 않으리라고 확신했으므로 오히려 고려가 말썽많은 여진을 정복해준 게 고마웠을 것이다.
전란에의 초대
도덕성의 문제는 있지만 어쨌든 고려의 입장에서 국가적 위기를 외교로 넘긴 서희(徐熙)의 성과는 오늘날 흔히 말하는 ‘실리외교’의 전형이라 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명분이 실리보다 중요하던 시대에 실리외교란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없는 법이다. 과연 고려 조정의 대신들은 대부분이 서희의 외교를 폄하하거나 반대한다. 신라계 귀족들의 그런 태도는 사실 예견된 것이었다. 한족 왕조인 송나라를 저버리고 오랑캐인 거란에 굴복하다니, 그런 건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 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런 여론을 충분히 예상했음에도 서희가 ‘굴욕적인’ 외교를 강행한 데는 아마도 그가 지방 토호 출신이라는 배경이 한 몫 하지 않았을까? 모르긴 몰라도 서희에게는 신라계가 장악한 중앙정부를 다른 색깔로 바꿔 보려는 야심이 있었을 것이다.
어쨌거나 고려 조정은 시끄러웠지만 그 조약에서 요나라는 바라던 목적을 달성했다. 고려는 요나라를 섬기기로 했으니 장차 거란이 송 나라를 공략할 때 돕지는 못할망정 적어도 중립은 유지할 것이다. 비록 고려에게 영토를 획득하기는커녕 오히려 빼앗긴 꼴이긴 하지만 그 대신 고려는 요나라의 속국이 되었으므로 그다지 억울해 할 일은 아니다(적어도 고려가 독자 노선을 걸을 경우 그것을 응징할 구실이 생긴 것이다). 따라서 기록에는 없지만 아마 소손녕은 요나라 조정에서 서희만큼 심한 비판을 받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렇게 후방 다지기에 성공한 요나라 성종은 이윽고 1004년에 송 나라를 침공해서 수도인 카이펑(開封)까지 점령하고 송의 황제 진종과 전연(澶淵)의 맹약을 맺게 된다. 흥미로운 것은 이 조약이 소손녕-서희(徐熙) 조약의 확대판이라는 점이다. 고려와의 조약에서 요나라는 명분을 얻 고 실리를 내주었지만, 전연의 맹약에서는 거꾸로 명분을 송나라에 내주고 실리를 얻는다. 조약의 결과로 송나라는 요나라의 상국이라는 명분을 얻었으나 그 대가로 요나라에게 매년 10만 냥의 은과 20만 필의 비단을 바치기로 했다. 게다가 송나라는 잃어버린 연운 16주를 영구히 포기하고 두 나라의 국경 부근에 군사 시설을 설치하는 권리를 잃었다. 송으로서는 굴욕적이기도 했지만, 그 후 요나라가 금나라에 망할 때까지 100년 이상이나 공물을 바쳤으니 그로 인한 재정적 피해도 막심하다.
▲ 완벽의 허점 송나라는 중국 역사상 가장 완벽한 유교제국이었으나 동시에 가장 허약한 통일제국이기도 했다. 이 두 가지 점이 합쳐지면, 물리력이 강한 비중화세계가 침략할 경우에는 속수무책이라는 이야기가 된다. 과연 1004년 요나라 성종은 송나라를 침략해서 전연의 맹약을 맺고 송 나라를 사실상 복속시켰다. 그림은 조약을 맺는 광경이다.
이것으로 안개 정국은 끝났고, 동아시아 3국의 서열이 정해졌다. 고려에겐 요나라가 형님이고 요나라에겐 송나라가 형님이니까 공식 랭킹은 송-요-고려의 순서다. 그러나 국력으로 평가한 실제 랭킹 1위가 거란이라는 것은 누구의 눈에도 분명하다. 랴오둥을 근거지로 삼고 중원과 한반도를 휘하에 거느리게 된 거란, 영토와 위세로 본다면 옛 전성기 고구려의 후예는 고려가 아니라 바로 그들이다(다만 거란은 오늘날의 한국처럼 역사를 관리해줄 후손이 없었기에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했을 뿐이다).
그러나 한족이 아닌 민족으로서 동아시아 역사상 가장 위대한 제국을 건설했다는 자부심에 가득한 요 성종의 심기를 건드리는 게 있다. 그것은 막내 격인 고려가 작은 형님에 대해서는 진심으로 형님 대우를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도 그럴 것이, 서희(徐熙) 같은 실리파라면 몰라도 고려 조정에 득시글거리는 명분파 대신들은 오랑캐인 요나라의 연호를 쓴다는 사실이 오로지 창피할 따름이다. 그래서 고려는 비공식적으로 계속 송과의 우호관계를 유지했으며, 1003년에 송나라에게 군사를 요청하기까지 했다. 삼형제에서 맏형과 막내가 손잡으면 대개 둘째는 왕따가 된다. 하지만 고려에게 불행한 일은 그 둘째가 실세라는 사실이다. 버릇없는 아우를 응징할 구실을 찾던 요 성종의 눈에 마침내 트집잡을 만한 사건이 벌어진다. 그것은 고려 왕실에서 일어난 정변이었다.
굴욕적인 조약 이외에 대내적으로는 거의 모든 것을 뜻대로 이룬 고려의 성종은 딸만 두었을 뿐 후사가 없었다. 마침 사촌형인 경종이 남긴 아들이 있었으므로 성종은 그를 후계자로 삼았는데, 997년에 19세가 된 그 조카가 목종(穆宗, 재위 997~1009)으로 즉위하는 과정은 일단 무난했다. 문제는 그의 어머니인 헌애다. 경종의 두 왕비인 헌애와 헌정은 친자매간이자 성종의 누이동생들이었다(고려 왕실에서 근친혼이 장려되었다는 사실은 앞서 말한 바 있다). 경종이 죽자 아직 십대의 나이에 과부가 된 두 왕비는 묘하게도 둘 다 친척 남자와 정을 통해 아들을 낳는다. 헌애는 자신의 외척인 김치양(金致陽, ?~1009)과, 그리고 헌정은 왕건의 아들이자 경종의 숙부이자 그녀 자신에겐 삼촌이 되는 왕욱(王郁)과 놀아난 것이다. 아무리 근친혼의 관습이 허용된다 해도 성종의 눈에 그 자매가 노는 꼴이 보기 좋을 리 없다. 하지만 그에게 그 자매는 형수이자 친누이들이므로 내칠 수도 없고 놔둘 수도 없는 애매한 입장이다. 그래서 성종은 김치양을 멀리 귀양보내는 것으로 사태를 일단락지었으나 그가 죽고 목종이 즉위하면서 사정은 달라진다.
오빠 왕이 죽고 아들을 왕위에 올린 헌애는 이제 거리낄 게 없으므로 즉각 김치양을 궁으로 불러들여 사실상의 남편으로 삼고 함께 국정을 주무른다. 목종이 아들을 낳지 못한 것은 그 내연의 부부에게 좋은 찬스다. 그들 사이에서 낳은 아들로 후사를 잇는다면 부부의 권세는 대를 이어 지속될 테니까. 하지만 목종의 생각은 다르다. 어머니 행각에 넌더리가 날 뿐 아니라 자칫하면 고려 왕실의 성씨가 김씨로 바뀔지도 모르는 상황이었으니 그로서는 긴장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그는 별도의 후보를 내세우는데, 공교롭게도 그 후보는 왕욱과 헌정의 아들인 대량원군이다【굳이 촌수를 따져보자면 목종은 씨다른(?) 동생에 대항해서 자신의 당숙이자 사촌동생을 후사로 삼으려 한 셈이 된다. 우선 김치양과 어머니 헌애의 아들은 목종에게 씨다른 동생이다. 또 대량원군의 어머니는 목종의 이모인 헌정이지만 아버지는 태조 왕건의 아들인 왕욱이므로, 대량원군은 목종에게 이종사촌 동생인 동시에 당숙이 된다(목종의 아버지 경종은 왕건의 손자다). 물론 당시에는 촌수라는 개념이 없었으니까 이렇듯 어지럽게 촌수를 계산하지 않았겠으나, 어쨌든 고려 왕실의 근친혼이 어느 정도였는지 말해주는 사실이다. 게다가 전직 왕비들이 그렇듯 마음대로 애정 행각을 벌일 수 있었다는 것, 헌애가 김씨 아들로 왕위를 잇는다는 발상까지 함부로 했다는 것은 당시 고려 왕실이 얼마나 ‘콩가루 집안’이었는지 짐작하게 해준다】.
▲ 실리외교의 대가 서희(徐熙)의 외교는 비록 문제점은 있었으나 그런 대로 위기의 고려를 구하는 역할을 했다. 아마도 그는 이천 출신의 중부 귀족이었으므로 옛 신라계 귀족들이 판치는 고려 정부에 참신한 기운을 불어넣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죽고 나서 그나마 고려 정부의 외교적 역량은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사진은 경기도 이천에 있는 서희의 묘이다. 그의 고향인 이곳에는 그의 동상도 서 있다.
강력한 라이벌인 대량원군을 눈엣가시로 여기는 김치양과 헌애 부부는 그를 절에 보내 승려로 만들어 놓고도 안심이 안 돼 여러 차례 암살을 시도한다. 위험을 감지한 목종은 서북 지역의 방어를 담당하고 있던 장수 강조(康兆, ?~1010)를 불러들였는데, 그것은 대량원군에게는 행운을 가져다주었으나 목종 자신에게는 오히려 목숨을 앞당기는 결과를 빚고 말았다. 그렇잖아도 개경의 혼탁한 정세에 불안을 느끼고 있던 강조는 군사 5천을 거느리고 개경으로 와서 김치양 일당을 잡아 죽였다. 목종에게는 불행하게도 그는 거기서 멈추려 하지 않았다. 내친 김에 강조는 대량원군을 왕으로 옹립하고는 이내 목종마저 살해해 버린 것이다.
개국 초기의 내전 이후 오랜만에 재발한 킹메이커의 쿠데타다. 더구나 그 킹메이커는 예전처럼 여러 명이 아니라 강조 한 명이었으니, 우여곡절 끝에 1010년 팔자에 없던 왕위를 물려받은 대량원군 현종(顯宗, 재위 1010~31)에게 실권이 있을 리 없다. 왕권과 중앙집권을 강화하는 데 일생을 바친 광종(光宗)과 성종(成宗)의 피땀 어린 노력에도 불구하고 고려의 왕권은 또 다시 지방 세력의 손아귀에 들어갔다. 그러나 그보다 더 시급한 문제는 요의 성종이 그 사건을 응징의 빌미로 삼았다는 사실이다.
과연 그 해 11월 성종은 강조의 쿠데타를 문죄한다며 직접 40만 대군을 거느리고 고려를 침략해 온다. 요나라가 고려의 상국이라는 게 명분이었으니, 일찍이 연개소문의 쿠데타를 구실 삼아 고구려를 쳐들어온 당 태종이 생각나는 장면이다. 실제로 강조가 호기만 부리지 않았더라면 전쟁의 진행마저도 거의 그 복사판이 될 뻔했다.
개전 초기에 요의 성종은 10여 년 전 고려에게 강동 6주를 허용했던 것을 뼈저리게 후회해야 했다(거란이 고려를 침락한 근본 원인이 그것 때문이라는 추측도 있다). 당 태종도 랴오허를 건넌 다음 랴오둥의 고구려 성곽들을 정복하는 데 애를 먹었듯이, 요 성종도 압록강을 넘는 데까지는 아무런 무리가 없었으나 곧바로 강동 6주의 수비망에 걸려버린 것이다. 가만히만 있었어도 강조는 연개소문처럼 승리를 낚을 수 있었으리라. 그러나 그는 연개소문보다는 고혜진(高惠眞)이나 고연수(高延壽)를 본받고 싶었던 모양이다. 쿠데타의 책임자답게 강조는 30만 군대를 이끌고 북으로 달려가 자신의 행위에 대한 검증을 받고자 했으나 그건 지나친 만용이었다. 병력의 차이는 크지 않았으나 원래 공성(攻城)에는 약해도 전면전에는 강한 게 대륙의 군대다. 어쨌든 강조는 책임을 질 줄은 아는 인물이었다. 통주에서 패해 사로잡힌 그에게 성종은 자기의 신하가 될 것을 권했으나 강조는 그 권유를 거부하고 죽음을 택했다.
그것을 계기로 고려의 수비망은 구멍이 뚫려 버렸다. 고려의 주력군을 격파했으니 이제 거란군은 굳이 강동 6주를 함락시키려 애쓸 필요 없이 그냥 우회해 버리면 된다. 심지어 그들은 서경마저도 그냥 지나쳐 곧장 개경을 향해 남진한다. 이 소식에 놀란 현종은 황급히 개경을 빠져나와 이듬해 1월에 멀리 나주까지 대피하는데, 왕이 백성을 버리고 가는 것이니 사실 대피라기보다는 도피다【나중에도 보겠지만 우리 역사에서는 이렇게 최고 지도자가 자기 한 목숨만 살겠다고 도망치는 경우가 많았다. 대표적인 사례를 들자면, 몽골의 침략 때 강화도로 도망친 고려의 고종,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식솔들만 거느리고 의주까지 야반도주한 조선의 선조(宣祖), 정묘호란(丁卯胡亂) 때 역시 강화도로 내뺀 조선의 인조(仁祖), 1895년 마누라가 일본 낭인들에게 죽자 러시아 공사관으로 도망쳐서 1년간이나 살았던 조선의 고종, 1950년 수도 서울을 사수하겠다는 대국민 약속을 팽개치고 한강 다리를 건넌 다음 다리마저 끊어 버린 이승만 등등을 꼽을 수 있겠다】.
요 성종은 개경의 왕궁을 유린하는 것으로 분을 풀었으나 나주까지 추격할 힘과 의지는 없다. 그래서 그는 명분만 얻으면 철수하겠다고 결심하는데, 마침 현종이 그 명분을 준다. 군대를 돌린다면 곧 현종이 직접 요의 황궁으로 가서 입조하겠다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거창하게 시작된 전쟁 드라마는 두 달여 만에 싱겁게 막을 내렸다.
동북아 국제사회
비록 드라마는 조기 종영되었어도 아직 미니시리즈가 다 끝난 건 아니다. 스토리가 2부작으로 마무리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연출자인 요 성종은 피곤하지만 어떻게든 이 인기 없는 시리즈를 끝내야만 한다. 그러므로 그로서는 고려의 현종이 입조의 약속을 지켜준다면 그것으로 종결을 지으려는 마음도 있다. 하지만 현종은 사신을 보내 병 때문에 출연 약속을 지킬 수 없다는 소식을 전한다. 예상하지 못한 바는 아니지만 그래도 한갓 배우가 감독의 요구를 거부했다는 생각에 성종은 열받지 않을 수 없다.
그것만 해도 충분히 3부를 제작할 구실은 된다. 그러나 이미 2부작에서 성공을 거두지 못한 성종은 가급적이면 여기서 시리즈를 끝내고 싶다. 그래서 그는 출연 거부에 따른 피해 보상을 요구한다. 즉 사전에 출연료로 지급된 강동 6주를 반환하라는 것이다. 물론 현종은 그럴 마음이 없다. 계약 위반이라고 생각한 성종은 3부작을 강행하기로 결심한다. 더구나 고려가 다른 연출자인 송나라 측으로 붙은 것은 그의 결심을 더욱 굳게 만든다.
사실 요나라의 침략에 시달린 바 있는 송나라는 계속 고려에 추파를 던져왔다. 송나라 조정에서는 이른바 연려제요(聯麗制遼), 즉 고려와 연대해서 요를 제압한다는 전략으로 자신의 취약한 물리력을 보완하려 노력하고 있었다. 물론 그것은 전통적인 이이제이 전략의 일환이다. 그러나 중국의 한족 왕조를 위해서는 기꺼이 이적(夷狄)이라도 되겠다는 게 한반도 왕조들의 전통적인 봉사 정신(?)이니까 고려는 송이 보내는 손짓이 반갑기만 하다. 그러면서도 그런 태도가 요나라에 대한 선전포고나 다름없다는 사실은 깨닫지 못한다.
압록강에 부교를 설치하면서까지 강동 6주를 무력으로 탈취하려는 시도를 했으나 몇 차례나 실패하자 드디어 1018년 말에 성종(成宗)은 2차전에서 개경을 점령하는 전공을 세웠던 소배압(蕭排押)을 사령관으로 삼아 10만 대군을 내려보냈다. 1차전의 80만, 2차전의 40만에 비하면 훨씬 적은 병력이다. 왜 그랬을까? 혹시 성종은 두 차례의 시리즈를 통해서 고려를 정복하기 위해서는 병력의 수보다 병력의 운용이 더 중요하다고 판단한 걸까?
만약 그랬다면 성종은 송나라를 무릎 꿇린 걸출한 군주답지 않게 커다란 판단미스를 범한 셈이다. 소배압은 처음부터 강동 6주를 비롯해서 고려 북부의 성곽들을 그냥 지나칠 생각이었다. 1ㆍ2차전에서 한반도 왕조는 과연 전통적으로 수성과 농성에 강하다는 점을 이미 절감한 바 있는 그는 대병력으로도 고려의 성들을 깨뜨리기 어렵다는 생각에서 개경으로 곧장 진격하는 전략을 택한 것이다. 일리가 있는 구상이긴 하지만 그는 한 가지를 간과하고 있었다. 2차전에서 개경을 점령하는 개가를 올린 것은 그나마 대병력이었기에 가능했다는 사실이 바로 그것이다. 소배압이 이끄는 10만 거란군은 몇 차례 접전에서 패전을 거듭하면서도 개경을 향해 남진했으나 결국은 한계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어렵사리 개경 인근의 신은현까지 온 그들은 개경을 점령하긴커녕 철군하기도 어려운 상황에 처하고 말았다.
적진에 너무 깊숙이 들어와 버린 데다 북쪽에서는 강감찬(姜邯贊, 948~1031)과 강민첨(姜民瞻, ?~1021)이 이끄는 고려군이 추격해 오고 있으니 거란군은 이미 공격군의 면모를 잃고 생존을 도모하는 데 급급한 처지가 되어 버렸다. 할 수 없이 소배압은 남은 군대를 모아 퇴로를 뚫었다. 청천강까지는 그럭저럭 퇴각에 성공했다. 그러나 압록강을 얼마 앞둔 구주(귀주)에서 강감찬에게 덜미를 잡혀 처참하게 도륙당한다. 결국 겨우 수천 명만이 살아남아 압록강을 건너 돌아갔는데, 이것이 이른바 구주대첩이라 알려진 사건이다(을지문덕의 살수대첩 전적지도 이 부근이었으니까 아마 지금이라도 이 지역을 발굴하면 1천 년이 넘은 무수한 병장기들이 나올지 모른다)【거란군이 압록강을 넘어왔을 때 강감찬은 흥화진에서 쇠가죽 주머니들을 만들어 강물을 막아두었다가 일시에 흘려 보내 적군을 무찔렀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사실로 믿기는 어렵지만 그가 책략이 풍부한 뛰어난 인물이었다는 점을 말해주는 이야기일 터이다. 더구나 당시 그는 칠십 줄에 들어선 노인이었으니 대단한 노익장이 아닐 수 없다. 그 전공으로 강감찬은 현종의 존경을 받는 것과 아울러(2차전에서 현종을 나주로 피신시킨 것도 그였다) 일약 고려의 인기스타로 떠올랐다. 그 덕분에 이후 전국 각지에서 강감찬에 관한 설화들이 생겨나 널리 퍼졌는데, 대표적인 설화는 그의 얼굴이 곰보인 추남이 된 것에 대한 이야기다. 원래 그는 미남이었으나 얼굴이 너무 잘 나면 장차 큰일을 할 수 없다는 생각에서 스스로 마마신을 불러 곰보가 되었다고 한다. 요즘과는 정반대의 성형수술을 받은 셈이다】.
▲ 별이 떨어진 곳 현재 서울의 관악구에 있는 강감찬 사당이다. 그가 태어날 때 별이 떨어졌다는 전설에서 유래한 낙성대(落星臺)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실제로 이 부근에서 강감찬이 태어났고 그의 출생지에는 ‘강감찬 낙성대’라는 글이 새겨진 고려시대의 3층 석탑도 있었지만, 이 사당 건물은 1970년대에 지어졌다.
얼굴을 들지 못하고 귀국한 소배압은 성종(成宗)에게서 호된 꾸지람을 듣고 보직 해임되었으나, 실은 그 전략적 미스가 어찌 그의 탓일까? 성종은 강동 6주를 공략하지 않고 지나친 게 패인이라고 탓했지만 10만의 병력을 투입한 것으로 미루어보면 그건 소배압의 단독 판단이 아닐 것이다. 어쨌든 그것으로 3부작 미니시리즈는 마무리되었다. 전란의 피해는 전장이 된 고려가 물론 더 컸지만 병력 손실이 큰 요나라도 그에 못지 않은 피해를 입었다. 그래서 성종은 현종의 입조와 강동 6주의 반환 문제는 없던 것으로 하고 1차전이 끝날 당시의 상황으로 되돌리기로 결심한다. 즉 고려가 송나라와의 국교를 끊고 다시 요의 연호를 사용하는 정도로 마무리하려는 것이다. 그에 따라 성종은 1019년 두 차례에 걸쳐 화해의 제스처를 냈고, 고려는 그의 요구를 수락하는 것으로 화답한다.
이제 견적서는 나왔다. 승부 자체는 무승부지만 크게 보면 요나라는 원하는 것을 얻었다. 송과 고려의 사이에 위치한 거란은 동아시아 형식상의 서열에서 둘째라는 지위와 실제상의 서열에서 첫째라는 지위를 그대로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 비록 고려를 길들이는 데는 실패했지만 적어도 삼국이 정립하고 있는 동아시아의 정세에서 주도권을 확보하게 된 것이다. 고려 역시 크게 잃은 것은 없다. 어차피 완전히 독자적인 노선을 취할 수는 없는 입장이므로 송을 받들든, 요를 섬기든 큰 차이는 없다(사실 이후에도 고려는 송과의 비공식 관계를 계속 유지했다). 오히려 전란을 계기로 고려는 두 가지 소득을 얻었다. 한족 왕조에 대한 사대주의를 표방한 신라계 귀족들의 입김이 다소 약해지면서 진취적인 기상이 되살아난 게 그 하나라면, 다른 하나는 거란으로부터 선진 문물을 도입하고 무역의 폭이 확대되었다는 점이다. 거란의 대장경을 본받아 고려 대장경을 조판하기 시작한 것이나, 포로가 된 거란인들을 통해 요나라와의 무역이 활성화된 게 이후 고려 사회의 변모된 모습이다. 고려가 국제사회의 무대에 데뷔하는 것도 한족 왕조와 비교적 거리를 두기 시작한 이 무렵부터다【알다시피 오늘날 대한민국의 영어 명칭으로 사용되는 코리아(Korea)는 바로 고려에서 비롯된 이름이다. 당시 요나라는 유목민족의 제국답게 극동 세계만이 아니라 멀리 서역, 즉 중앙아시아 지역과도 활발하게 교류했다. 그 덕분에 오늘날 거란이라는 이름은 캐세이(Cathay)라는 항공사의 이름으로 남아 있는데, 이는 중앙아시아 민족들이 거란을 키타이(Kitai)라 부른 데 기원을 두고 있다(일본어에서 기타란 ‘北’을 뜻하므로 키타이는 혹시 ‘북쪽’이란 말에서 나왔을지도 모르겠다). 고려가 송나라와의 국교만 고집했다면 아마 코리아의 기원이 되지는 못했을 것이다. 고려는 요나라의 세계 무역로의 한 끝을 담당했으며, 거기서 자극받아 해상으로도 동남아시아까지 진출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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