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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부 국제화시대의 고려 - 2장 고난에 찬 데뷔전, 중국화 드라이브(시무28조, 성종, 12목, 상평창) 본문

역사&절기/한국사

5부 국제화시대의 고려 - 2장 고난에 찬 데뷔전, 중국화 드라이브(시무28조, 성종, 12목, 상평창)

건방진방랑자 2021. 6. 14. 1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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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장 고난에 찬 데뷔전

 

 

중국화 드라이브

 

 

송나라 초기에 고려가 잠시 중국과 교류를 단절한 이유는 새로 생긴 송나라가 과연 대륙의 진정한 주인이 될 수 있을까 하는 우려 때문이었다. 하기야 907년에 당나라가 망한 뒤 50년도 채 못되는 기간에 벌써 다섯 왕조가 교체되었으니 충분히 할 수 있는 우려다. 게다가 당시 광종(光宗)5대의 마지막 왕조인 후주와 우호를 맺은 지 얼마 안 되었던 터라, 후주의 무관으로 있다가 제위를 빼앗고 송나라를 건국한 조광윤을 바라보는 시선이 고울 수는 없었다(그랬기에 광종은 연호를 별도로 정하고 황제를 자칭하며 한껏 호기를 부린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조광윤이 대륙의 새 임자라는 사실은 점차 분명해진다. 그래서 972년에 광종은 송에 사신을 보내 수교를 청하는데, 그 사절단에는 장차 20년 뒤 외교관의 자질을 유감없이 발휘하게 되는 서희(徐熙, 942~998)라는 사람이 끼어 있었다.

 

신생 제국 송과의 서먹한 감정이 해소되자 고려는 기다렸다는 듯이 중국회를 서두른다. 이미 과거제(科擧制)전시과(田柴科)로 기본적인 토대를 갖추어 놓았으니 수교가 이루어진 마당에 더 이상 중국화를 망설일 이유가 없다. 성종(成宗, 재위 981~997) 때 꿰어진 본격적인 중국화 작업의 첫 단추는 우선 유학을 활성화시키는 것이었다. 과거제를 도입함으로써 유학 이념이 현실 정치에 적용될 수 있는 통로가 열렸으므로 이제 고려를 유학에 입각한 사회로 만들려는 것이다. 그래서 즉위하자마자 성종은 옛 신라 6두품 세력의 유학자들을 대거 기용하는데, 그 대표적인 사람이 최승로(崔承老, 927~989).

 

982년에 왕명에 따라 성종에게 올린 시무 28에서 최승로는 불교에 대해 집중적으로 성토하면서 고려 사회 전반을 유교적으로 재편할 것을 제안하고 있다. 물론 훈요 10조의 첫 항이 불교를 숭상하라는 것이었으므로 정면으로 불교를 공격할 수는 없는 일, 그래서 그는 불교와 유교의 교묘한 분업을 유도한다. 불교를 실천하는 것은 수신(修身)의 근본이며, 유교를 실천하는 것은 치국(治國)의 근본입니다. 얼핏 들으면 둘 다 중요하다고 말하는 듯하지만, 알고 보면 불교는 개인적 신앙이나 도덕의 영역으로만 제한하고 국가와 사회의 골간은 유교를 바탕으로 해야 한다는 이야기다. 최승로의 메시지를 잘 이해한 성종은 즉각 중앙관제의 개편에 나선다. 당나라의 제도를 본받아 정()과 종()의 구분으로 관직의 품계(品階)를 정하고, 최고 의결기관에 해당하는 내사문하성(內史門下省)과 내각격인 어사도성(御史都省)을 갖추어 36부 체제를 완비한 게 그 성과다품계도 그렇지만 3(三省)제도도 당나라의 중앙관제를 본뜬 것이다. 원래 3성은 중서성(조칙에 관한 업무), 문하성(중신의 건의 통로), 상서성(이ㆍ호ㆍ예ㆍ병ㆍ형ㆍ공 등의 6부 관할)을 가리킨다. 고려 초기 왕건은 태봉의 중앙관제를 본받아 광평성, 내봉성, 내의성의 3성을 갖추었는데, 이것들은 각각 상서성, 문하성, 중서성에 해당한다. 업무의 성격상 귀족들의 이해관계를 대변할 수밖에 없는 광평성이 가장 중심이었다는 사실에서 고려 초기의 사정을 짐작할 수 있다. 왕권 강화를 꾀한 성종은 광평성을 어사도성(곧 상서도성으로 개칭된다)으로 바꾸어 약화시키고 왕실 직속기관인 내사문하성(중서성+문하성)의 기능을 강화했으므로 사실상 중국식 3성 체제를 갖춘 것은 그 무렵으로 봐야 한다. 이 점에서도 고려와 당나라의 유사성을 볼 수 있다. 일찍이 당나라 조정에서도 외척 귀족과 환관 세력이 문하성과 상서성을 지배하면서 황실을 좌지우지한 폐단을 익히 알고 있던 조광윤은 문하성과 상서성을 중서성에 통합해 버렸지만, 그와 같은 강력한 리더가 없었던 고려는 옛 당나라의 중앙관제를 본받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밖에 군사와 왕명 하달을 맡은 중추원(中樞院, 숙종 때 추밀원樞密院으로 이름이 바뀐다), 사법부에 해당하는 어사대(御史臺)가 모두 성종 대에 신설되었으니, 오늘날로 치면 행정, 입법, 사법의 3부가 갖춰진 셈이다.

 

 

 

 

중앙관제가 자리잡았으면 그 다음 차례는 지방이다. 물론 지방은 아직 호족들의 세상이었으므로 함부로 중앙집권식 제도를 추진할 수는 없으나 그렇다고 마냥 방치해 둔다면 나라꼴이 나지 않는다. 뭔가 절충책이 필요한 상황에서 최승로가 제안했던 방책은 전국 각지에 지방관을 상주시키는 것이었다. 지방관이 직접 지방의 행정을 담당할 수는 없다 해도 최소한 중앙과 지방을 연결하는 연락관의 역할은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성종은 전국의 주요 도시에 12()을 두고 목사(牧使)들을 파견한다(쉽게 말해서 전주나 상주처럼 주라는 이름을 가진 도시, 즉 주현이 목으로 편성되었다고 보면 된다. 이때 생겨난 목은 조선시대에도 지방행정구역으로 사용되며, 오늘날 도라는 행정구역의 시초이기도 하다). 목사가 지방행정에서 당장 큰 역할을 한 것은 아니었으나 그래도 연락관을 상주시킨 효과는 있었다. 일부 힘센 호족들은 그 통로를 이용해서 중앙의 정치무대에 진출하기도 했으며, 약한 호족들은 점차 독자적인 세력을 잃고 지방 향리로 격하되어 갔기 때문이다.

 

아직 완전하지는 않지만 이제 고려는 신생국이라는 딱지를 떼고 안정과 번영의 길로 접어들었다. 개국한 지 70, 반도의 통일을 이룬 지 50년을 끌어오면서 태생적인 모순 때문에 여러 가지 진통도 많았으나 이제는 얼추 극복한 듯싶다. 사실 대내적으로만 보면 지극히 평안해 보인다. 비록 지방 호족들이 여전히 강성하긴 하지만 어차피 대세는 중앙집권의 방향으로 흐르고 있으므로 궁극적으로는 그들도 고려 왕실에 완전히 복속될 것이다. 그리고 아직 과거제(科擧制)가 완전히 뿌리 내리지는 못했지만 이 역시 장기적으로 고려는 유학 이념에 입각한 관료제 사회로 발달해갈 게 틀림 없으므로 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 그리고 이렇게 호족들이 중앙에 복속되고 과거제가 뿌리내리게 되면 당시까지의 한반도 역사상 가장 평화로운 시기였던 8세기 초반의 팍스 아시아나시대로 되돌아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중앙과 지방행정제도의 개편을 완료한 993년에 성종은 그간의 치적에 대한 마무리 삼아 양경(개경과 서경)12목에 상평창(常平倉)을 설치하면서 마냥 뿌듯한 심정이었을 것이다. 상평창은 이름 그대로 항상[] 변함없이 유지하는[] 곳간[]’, 즉 풍년시에 국가가 곡물을 비싸게 사두었다가 흉년이 들 경우 싸게 내다파는 물가조절기관이었으니, 그의 개혁 가운데 유일하게 순수히 행정적인 조치에 해당한다. 이렇듯 민생을 위한 비정치적인 분야에까지 신경을 쓸 수 있었다는 것은 곧 성종이 체제 안정에 상당한 자신감을 품었음을 말해준다.

 

그러나 그것은 착각이었다. 그 전까지의 한반도 왕조들이 모두 그랬듯이 고려도 궁극적인 안정을 이루기 위해서는 대외적인 평화와 안정이 더 중요했다. 신라 역사 1천 년 동안 유일한 번영의 시기였던 8세기 초반도 역시 중국의 당나라가 동아시아 질서의 강력한 구심점으로 역할했기에 가능하지 않았던가? 더욱이 송나라가 들어설 당시 동아시아 지역은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도 북방 민족들의 힘이 강성한 시기다역사서를 보면 송나라는 조광윤이 모토로 삼은 문치주의 때문에 물리력이 약해졌다고 하지만, 실상은 북방 민족들의 힘이 강해졌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약화된 것으로 봐야 한다. 사실 송나라는 역사적으로 중국식 제국 체제의 완성형에 해당한다. 유학을 기준으로 보면 그때까지의 중국사를 이렇게 정리할 수 있다.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에 유학의 이념이 생겨났고, 한나라 때 유학이 국가 이데올로기로 공인되었으며, 남북조시대에는 장차 유교 제국을 이루기 위한 기본 조건들(균전제과거제)이 숙성되었다. 그 결과물이 당나라였으나 당나라는 과거제를 도입하기만 했을 뿐 귀족 지배 체제를 완전히 극복하지 못했으므로, 천자를 정점으로 하고 사대부들이 보좌한다는 완벽한 유교 관료제 사회는 다음 송나라의 숙제로 남겨야 했다. 조광윤이 강력한 전제 체제를 구축한 것은 곧 송나라에 이르러 중국식 제국이 완성되었음을 말해준다.

 

중국에 한족 통일제국이 들어설 때마다 중원 북변을 집요하게 공략해 왔던 이민족들은 이제 간헐적인 침략과 약탈의 수준에서 벗어나 별도의 왕조 체제를 갖추고 본격적인 중원 입성을 위한 준비를 착실히 해나가고 있다. 그 대표자가 바로 거란의 요나라다. 일찍부터 고려가 친송(親宋) 정책을 추구하는 것에 불편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던 그들은 결국 고려에게 잘못된 중국화의 대가가 어떤 것인지 보여준다.

 

 

 

 

인용

목차

동양사 / 서양사

중국화 드라이브

외교로 넘긴 위기

전란에의 초대

동북아 국제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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