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민지적 발전Ⅱ④
남의 나라 지배를 받고 있는 식민지 시대에 우리 역사의 유구함과 자주성을 특히 강조하려는 입장이 생겨나는 것은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그 유구함은 어디까지나 사실에 바탕을 두어야 하며, 자주성 역시 참된 것이어야 한다. 일연(一然)과 이승휴의 노력(?) 덕분에 우리 역사는 2천 년이나 크게 늘어 이른바 ‘반만 년 역사’가 되었지만, 그것이 실제 사실과 무관한 가공의 역사라면, 혹은 민족 자주의식에서 나온 게 아니라 뿌리깊은 사대주의에서 비롯된 결과라면 결코 달갑지 않은 ‘역사 왜곡’에 불과하다【이런 사례는 우리 역사상 또 다른 이민족 지배기였던 20세기 일제 식민지 시대에서도 볼 수 있다. 일제 시대에는 영원한 사대의 대상이었던 중국이 서양 세력에게 무릎을 꿇은 뒤이므로 사대주의 의식에서는 거의 벗어나지만, 그 대신 일본 제국주의가 당면의 적이므로 항일의 과제가 왜곡된 민족주의적 역사의식을 낳는다. 그 덕분에 우리 역사는 반만 년에서 무려 1만 년까지 늘어난다. 이를테면 1911년에 계연수가 엮었다는 『환단고기(桓檀古記)』라는 책은 단군 이전에 환국(桓國) 시대가 5천 년 가량 지속되었다는 황당한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게다가 우리 민족은 과거에 중국의 여러 나라들이 조공을 바치던 위대한 역사를 지닌 민족이라고 한다. 일단 그 말을 듣고 기분 나빠할 사람은 없겠지만, 그렇게 말하는 근거가 수상쩍다면 오히려 듣지 않느니만 못할 것이다. 민족 정신을 고취하려는 시도는 물론 나무랄 수 없으나 그 목적을 위해 역사 왜곡까지 동원된다면 민족 자주의식은커녕 식민지 콤플렉스를 조장하는 결과가 될 것이다】.
그것을 용인한다면 지금까지 냉소적으로 써온 ‘식민지적 발전’이라는 표현도 정식 용어로 성립해야 마땅할 것이다. 그러나 정작으로 그보다 더 큰 문제는 따로 있다. 그것은 바로 몽골 지배기 식민지적 발전의 수혜자들인 신흥 사대부 세력과 주자학 사상이 불행하게도 새로운 왕조를 건국하는 주체와 이념이 된다는 사실이다.
▲ 첨단 학문을 배우자 비중화세계인 몽골을 통해서 중화 이데올로기가 수입된 것은 아이러니다. 일종의 ‘식민지적 발전’인 셈인데, 그러나 당시 중국마저도 몽골 지배하에 있었으므로 그럴 수밖에 없었다. 신흥 유학인 주자학이 도입되자 충렬왕은 전통적인 국립대학이던 국자감을 성균관이라는 이름으로 바꾸었다. 사진은 오늘날 개성에 남아 있는 성균관의 모습인데, 공민왕(恭愍王) 때 지어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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