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   2025/01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Archives
Today
Total
관리 메뉴

건빵이랑 놀자

종횡무진 한국사, 9부 사대부 국가의 시대 - 4장 비중화세계의 도전(북풍), 남풍 뒤의 북풍② 본문

카테고리 없음

종횡무진 한국사, 9부 사대부 국가의 시대 - 4장 비중화세계의 도전(북풍), 남풍 뒤의 북풍②

건방진방랑자 2021. 6. 20. 15:25
728x90
반응형

남풍 뒤의 북풍

 

 

광해군(光海君)은 왕당파를 움직여 권력을 얻었고 대동법(大同法)을 만들어 민심을 얻었다. 이렇게 해서 혼란스러웠던 국내 상황은 어느 정도 다잡을 수 있었다. 하지만 광해군이 정작으로 신경을 집중한 분야는 국내 정치가 아니라 나라 바깥의 동태다. 세자 시절에 전란으로 고생했던 경험은 그를 그 전의 어느 왕보다도 국제적 감각에 밝은 군주로 만들어주었다. 조선의 사대부(士大夫)와 백성들이 거의 모두 일본에 대한 원한에 사무쳐 있는 분위기 속에서도 즉위 이듬해인 1609년에 쓰시마 도주와 수교를 복원한 것은 아마도 국제적 감각을 갖춘 그였기에 가능했을 터이다(이 해가 기유년이기에 이를 기유약조己酉約條라 부른다). 게다가 그는 동북아의 풍향이 바뀌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때는 바야흐로 수천 년 동안 동북아 질서의 중심축이었던 중화세계가 약화되고 비중화세계가 도약하고 있는 시대였다(그런 시대적 조류에도 불구하고 중화세계의 이데올로기인 성리학이 여전히 지배 이념으로 군림한다는 데 조선의 비극이 있었다). 일본에서 불어닥친 게 남풍이라면 장차 불어올 바람은 북풍일 것이다.

 

일본이 온몸으로 증명해주었듯이 비중화세계는 이미 중화세계의 끝자락인 조선이 과거처럼 마음대로 교린' 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었다. 중화세계가 현실에 안주하며 제자리걸음만 하고 있는 동안 비중화세계는 결정적인 단점이었던 분열을 극복하고 지역적 통일을 향해 내닫고 있었다. 동북아의 비중화세계라면 단연 일본과 만주다. 먼저 통일을 이룬 일본이 중화세계에 도전장을 내밀었으니 그 다음에는 만주가 뒤를 잇는 게 순서다. 과연 일본과 중화세계의 전쟁이 한창이던 16세기 말부터 만주 지역에도 통일의 바람이 거세게 몰아친다. 통일의 움직임이 있다면 구심점도 있을 게다.

 

1593년 중국과 조선에게서 건주라 불리던 힘의 공백 지역을 통일한 여진의 추장 누르하치(1559 ~ 1626)가 바로 그 구심점이다(원래 여진

이라는 이름은 중국인들이 만주 지역의 여러 민족들을 통칭하던 명칭이었으나 이 시기부터의 여진은 보통 만주족이라는 이름으로 부른다. 오늘날 중국 한족이 흔히 만족滿族이라 줄여 말하는 게 그들이다).

 

처음에는 명나라에 사대하며 관작까지 받은 그였으나 애초부터 중화세계에 끝까지 충성할 생각은 털끝만큼도 없었다. 게다가 명나라 조정은 사대부(士大夫)들이 황제를 허수아비로 만들고 자기들끼리 동림당과 비동림당으로 나뉘어 당쟁을 일삼느라 변방의 사정이 어떻게 달라지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안중에도 없었다조선에 조광조(趙光祖)가 있었다면 명나라에는 장거정(張居正, 1525 ~ 82)이라는 개혁가가 있었다. 1572년 신종이 열 살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자 어린 황제를 대신해서 전권을 위임받은 그는 부패하고 무능한 관료들을 축출하여 관료제의 기강을 확립하고, 전국적인 토지 조사를 실시하여 세수에서 누락된 대지주들의 토지를 적발하는 한편 전국 토지의 실제 면적을 정확히 조사했다. 그러나 개혁 정치 10년 만에 그가 사망하자 그의 개혁에 반대하던 사대부(士大夫)들은 동림당을 이루었고 그 반대파는 비동림당을 이루어 당쟁을 시작했다. 조광조(趙光祖)의 개혁이 실패한 이후 당쟁이 가열화된 것과 비슷한 양상이다. 그 와중에서 임진왜란(壬辰倭亂)을 맞았으니 명나라의 지원이 부실했던 것도 당연했다.

 

이를 틈타 누르하치는 여진의 모든 부족들을 차례로 통합해 나갔으며, 드디어 1616년에는 북방 유목민족의 전통적 황제인 칸()에 오르고 후금(後金)이라는 국호와 천명(天命)이라는 연호를 정한다. 후금이라면 400년 전 송나라(북송)를 멸망시킨 금나라의 후예라는 뜻이며, 천명이라면 하늘의 명령이라는 뜻이 아닌가? 더욱이 독자적인 연호를 제정했다는 것은 이제 더 이상 중국 한족 왕조에 사대하지 않겠다는 정치적 표현이기도 하다.

 

그러나 누르하치의 정치적 야망은 단순히 중국에 사대하지 않는 독자적인 제국을 꾸리겠다는 데 있지 않다. 옛 남북조 시대와 몽골제국의 시대에서 보았듯이, 역사는 중원 북방 민족이 장기적으로 존속하려면 중국 대륙을 정복해야만 한다는 것을 가르쳐주고 있다. 여진문자를 만들고 전통적인 사냥 방식을 응용해서 독특한 팔기군(八旗軍)을 육성한 것은 장차 중화세계의 심장부를 침략하겠다는 의도를 담고 있는 것이다. 광해군(光海君)이 바깥의 정세에 주목한 이유는 바로 이런 북방의 변화를 읽고 있었기 때문이다.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 당시에는 대동법이 더 큰 사건이었겠지만, 광해군(光海君) 시절의 치적(?) 가운데 오늘날까지 중요한 영향을 남긴 것으로 1618년에 일본을 통해 전래된 담배가 있다. 그림은 18세기 후반 신윤복의 「청금상련(聽琴賞蓮)」이란 작품인데, 담뱃대에 잔뜩 멋을 부리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러고 보면 담배에 관한 예절도 마치 오랜 전통을 가진 듯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은 셈이다.

 

 

인용

목차

연표

 
728x90
반응형
그리드형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