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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종횡무진 한국사, 9부 사대부 국가의 시대 - 1장 개혁과 수구의 공방전, 꿈과 현실 사이②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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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횡무진 한국사, 9부 사대부 국가의 시대 - 1장 개혁과 수구의 공방전, 꿈과 현실 사이②

건방진방랑자 2021. 6. 18. 0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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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과 현실 사이

 

 

이 골치 아픈 문제를 해결한 사람이 바로 조광조(趙光祖). 그는 논쟁의 초점인 단경왕후의 복위 문제에서 벗어나 그보다 훨씬 중요한 쟁점을 제기한다. 그것은 바로 대사간의 기능에 관한 지적이다. 무릇 대사간이라면 조정에서 논쟁이 벌어졌을 때 교통정리를 담당해야 하는데, 이행(李荇)이 마음대로 상소자들을 유배보낸 것은 언로를 막은 큰 잘못이라는 게 그의 주장이다. 현대의 언론관에도 전혀 뒤지지 않는 탁월하고 논리적인 그의 지적에는 이행 자신을 포함한 누구도 반박할 수 없었다. 그런 그의 입장이 공신들의 반발을 부른 것은 당연한 일, 그러나 당장 그보다 중요한 것은 중종(中宗)의 신임을 얻었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곧 조광조(趙光祖)가 자신의 뜻을 마음껏 펼칠 마당을 얻었다는 뜻이다이 장면에서 유교왕국의 독특한 현상인 왕과 사대부(士大夫)의 이중적 관계를 엿볼 수 있다. 앞서 보았듯이 중종(中宗)은 단경왕후 신씨에 대해 애틋한 마음이 있었으므로 조광조의 주장을 더욱이 반기는 심정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중종은 조강지처를 궁에서 내쫓을 때도, 그리고 새 왕비를 간택할 때도 별로 결정권을 행사하지 못할 정도로 사대부(士大夫) 세력에 휘둘렸다. 여염집 아낙네의 지위를 놓고 설전을 벌인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남편이 자신의 아내를 스스로 선택하지 못한다는 것은 인륜에 어긋나는 일이다(그래서 박상朴祥김정金淨주역을 인용해가면서 부부의 도리가 으뜸임을 역설한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꼭두각시라 해도 엄연히 국왕이 존재하는 한 사대부(士大夫)도 국정에 대한 전권을 가지지는 못한다. 앞서 여러 정변의 경우에서도 보듯이 사대부들 간의 세력 다툼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언제나 왕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는 것이었다. 조광조가 뜻을 펼치기 위해서 중종(中宗)의 신임을 얻는 게 중요했던 이유는 그 때문이다.

 

조광조가 당당하게 자신의 주장을 전개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보다 학문적 바탕에 자신감이 있었기 때문이다. 왕의 신뢰와 자신의 학문을 토대로 그는 본격적으로 개혁의 바람을 일으킨다. 그 목표는 조선을 완전한 유교왕국으로 만드는 데 있다. 그런데 조선은 원래 유교왕국이 아니었던가?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유학을 강조하는 건 대체 무슨 의도일까?

 

물론 조선은 개국 초부터 성리학을 지배 이데올로기로 삼았으나, 그동안에는 유학 이념이 사회와 생활의 구석구석까지 침투하지는 못했다. 삼촌-조카 사이인 예종과 성종이 자매를 비로 얻은 것, 그리고 형제간인 연산군(燕山君)과 중종이 각각 신수근의 누이와 딸을 비로 얻은 것에서 보듯이 왕실에서조차 유교적 예법이 지켜지지 않은 게 그 점을 말해준다. 지배층에서도 유학이라고 하면 사()와 장(), 즉 시와 문장만을 숭상했을 뿐(과거의 과목도 그렇다) 철학으로서의 유학은 제대로 이해하지도, 실천하지도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유학을 처음부터 통치 철학이자 사회 철학으로 받아들인 조광조(趙光祖)국가의 운영에서는 물론 국왕과 사대부(士大夫), 백성들의 생활 전반에까지 유학 이념을 관철시켜야 한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사대부가 실권을 쥐자마자 곧이어 사회 전체를 유학으로 도배하겠다는 계획이 나왔으니 절묘한 타이밍이 아닐 수 없다.

 

조광조는 1518년에 부제학(副提學, 홍문관의 책임자)을 거쳐 대사헌(大司憲, 사헌부의 책임자)이 되지만 이미 그 이전부터 각종 개혁 조치의 시동을 걸어놓았다. 직책보다도 훨씬 중요한 것은 그가 조선 사회를 유교적으로 전면 개조하는 총지휘자라는 사실이다. 따라서 소격서(昭格署)가 먼저 혁파 대상으로 떠오른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는 아마 소격서에서 도교 제사를 지내고 있다는 점도 마뜩치 않았을 뿐 아니라 국가 재정의 일부가 소격서에 주어지는 것도 영 못마땅했을 것이다. 그가 보기에 성리학을 제외한 모든 종교와 학문은 쓸데없는 낭비에 불과하니까 (실제로 그는 도교를 미신으로 보았다). 그래도 도교의 잔재가 남아 있는 전통적인 영향력 때문에 조정 대신들의 다수는 소격서를 폐지하는 데 반대했으나 조광조(趙光祖)를 비롯한 개혁 세력은 끝내 뜻을 관철시켰다(소격서는 이후 명맥만 유지하다가 임진왜란을 계기로 완전히 사라지게 된다).

 

 

학문 = 정치의 등식 물을 소가 마시면 젖이 되고 뱀이 마시면 독이 된다고 했던가? 학문과 정치가 일치하는 현상은 양면의 칼이다. 건강한 학문이라면 그 학문이 정치를 통해 현실에 접목될 수 있으므로 사회 발전을 가져오지만, 그 반대일 경우에는 오히려 치명적인 독소가 된다. 불행히도 조선의 학문은 사대부(士大夫)를 제외한 모든 계층에게 유해한 유학이었으므로 학문= 정치의 등식은 독이 되고 말았다. 사진은 학문을 연구하는 동시에 정치 이데올로기를 생산하고 조광조(趙光祖)라는 현실 정치가를 추천하기도 했던 성균관의 명륜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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