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로의 회귀②
이 사건으로 최초의 외국인 신부 주문모는 서울 용산 부근 한강변에 있는 새남터라는 모래사장에서 참수되었고, 몇 차례나 배교 선언을 하면서 용케 살아남았던 이승훈도 이번만은 살아남지 못했으며, 정씨 삼형제도 하나(정약종)가 처형되고 둘은 유배형을 받았다. 그밖에 전국적으로 300여 명의 그리스도교도가 처형당함으로써 이 사건은 한국 그리스도교사에 최초의 대대적인 박해로 기록되었다【그러나 살아남은 교도들이 산간 지방으로 숨어들면서 오히려 이후 그리스도교는 전국 각지로 확산되고 기층 민중 속으로 깊이 파고들어갔다. 그리스도교의 초기 역사에서 보듯이 무릇 종교란 정치적 탄압이 심할수록 더욱 널리 퍼지는 법이다. 이렇게 탄압 속에서 교도가 꾸준히 늘어간 탓에 그 뒤에도 19세기 내내 거의 정기적으로 대규모 종교 박해가 일어나게 된다. 아마 오늘날 한국의 그리스도교가 주로 천박한 기복(祈福) 신앙의 형태로 자리잡게 된 이유는, 초기에는 사대부(士大夫) 층에 퍼졌으나 그러한 각종 탄압으로 인해 결국 기층 민중 속에서만 뿌리를 내린 탓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노론 벽파에게 그런 사교 무리의 대량 살육은 부수적인 성과일 뿐이다. 그들에게는 조정의 반대파를 제거함으로써 마침내 안정적인 권력을 구축하려는 게 무엇보다 중요한 목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목적은 이루어졌다. 단일한 계파가 정권을 장악함으로써 조선의 집권 사대부들은 사상 처음으로 당쟁으로부터 벗어나 단일한 색깔을 가지게 되었다. 낱알들을 체로 거르고 나면 최후에 남는 것은 가장 큰 알갱이들이다. 그토록 오랫동안 자기들끼리의 권력다툼을 거치고, 영조(英祖)와 정조(正祖) 두 대에 걸쳐 왕권과의 경쟁도 헤치고 나온 결과 최후에 남은 사대부 세력이 결국 가장 성리학적 이념의 농도가 짙은 노론 일색이라는 것은 자연법칙이라 해야 할까? 아니면 역사적 필연이라 해야 할까?
어쨌든 이제 역사의 시계추는 완전히 과거로 회귀했다. 왕이 권력을 독점하던 야만의 시대도 끝났고, 오랑캐에게서 배우려던 ‘무지’의 시대도 끝났으며, 사대부(士大夫)들이 편을 갈라 당쟁을 일삼던 ‘혼란’의 시대도 끝났다. 최후로 살아남은 노론은 마침내 노론이라는 이름마저 버릴 수 있게 되었다. 이제 그들이 할 일은 사대부 체제를 어느 때보다도 완벽하게 구축하는 것이다. 이상적인 사대부 체제란 뭘까? 그것은 바로 국왕이 상징이자 허수아비로 존재하고 사대부들이 실권의 담당자로 역할하면서 국정을 전담하는 체제다. 중종반정(中宗反正) 이후 300년 동안 사대부 체제가 지속되면서 내내 그 결론은 변함없었다. 다만 그 체제가 계속 삐걱거렸던 이유는 그동안 사대부들 간에 이념과 견해가 일치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랜 당쟁을 거치면서 결국 그 쟁점마저 정리됨으로써 이제서야 비로소 완벽한 사대부 체제를 실현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춘 것이다.
그런 점에서 순조(純祖)는 그 체제에 어울리는 완벽한(?) 왕이다. 우선 정비가 아니라 후궁을 어머니로 두었다는 결격 사유가 있다(정비인 효의 왕후는 아이를 낳지 못했다). 게다가 나이도 어리고 성격도 유약하다. 이만하면 훌륭한 허수아비가 될 자질을 갖춘 셈이다. 다만 왕실 세력인 정순왕후가 아직 실세로 버티고 있다는 게 좀 걸리는데, 이 문제는 1804년에 수렴청정이 폐지되고 그 이듬해에 그녀가 죽으면서 저절로 해결된다. 그렇다면 남은 문제는 뭘까? 그것은 바로 사대부(士大夫)들의 보스를 정하는 문제다. 당쟁이 사라졌으니까 이제는 사대부들에게도 보스가 필요하다. 물론 공식적인 지위는 아니지만, 왕이 상징적인 권력자라면 사대부의 보스는 현실적인 권력자이므로 대단히 중요한 자리다. 이런 배경에서 초대 보스로 떠오른 자는 김조순(金祖淳, 1765 ~ 1832)이었다.
여러모로 그는 그 영광스러운 자리에 걸맞는 최적임자였다. 영조(英祖) 초기에 이른바 노론 4대신의 하나였던 김창집의 후손이니 노론의 성골인 셈이고, 1802년 그의 딸이 순조(純祖)의 아내가 되었으니 당당한 왕실 외척의 신분이다. 게다가 그는 정조(正祖)의 신임을 받았고 장차 순조를 도와 국정을 살펴달라는 정조의 유언까지 받았으므로 권좌에 오르는 것도 자연스럽다. 그가 사실상의 집권자로 공인되면서 조선의 새로운 체제는 완전히 마무리되었다. 오랜 사대부 체제의 전통이 낳은 최종적인 결론, 성리학적 세계관이 빚어낸 최후의 산물, 역사상 가장 완벽한 사대부 체제, 그것은 바로 세도정치(勢道政治)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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