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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종횡무진 한국사, 11부 불모의 세기 - 3장 위기와 해법, 잘못 꿴 첫 단추③: 강화도조약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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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횡무진 한국사, 11부 불모의 세기 - 3장 위기와 해법, 잘못 꿴 첫 단추③: 강화도조약

건방진방랑자 2021. 6. 22. 0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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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못 꿴 첫 단추

 

 

일본의 의도대로 이듬해인 18761월 강화도에서 양측의 협상이 시작되었다. 표면상으로는 지난해에 있었던 불미스런 사건의 뒷처리를 하자는 것이었지만, 조선이나 일본이나 협상의 진정한 목적이 통상 여부의 결정이라는 것은 잘 알고 있었다. 물론 협상 반대의 목소리도 컸다. 아직 정부에 남아있는 대원군 세력과 성균관 유림은 모처럼 만에 다시 한 목소리를 냈고, 유배형을 마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최익현도 오랑캐와의 협상 자체가 잘못된 것이라고 다시 상소를 올렸다. 하지만 대세는 이미 정해져 있었다. 재야의 대원군이 영향력을 발휘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고 최익현은 또 다시 유배를 떠나야 했다. 그 반면 베이징에 가서 양무운동(洋務運動)의 효과를 목격한 적이 있는 박규수(朴珪壽)와 오경석(吳慶錫, 1831 ~ 79) 등은 협상만이 아니라 개항까지 찬성하는 입장이었다. 그들의 의견보다 중요했던 것은 청나라가 개항을 권유했을 뿐 아니라 민씨 정권이 대원군 정권과의 차별을 보이려면 어차피 개항의 노선을 취할 수밖에 없었다는 사정이었다.

 

결국 얼마 간의 협상을 거친 뒤 187622일 한반도 역사상 최초의 국제 조약인 강화도조약이 체결되었다(정식 명칭은 조일수호조규朝日修好條規인데, 병자수호조약이라고도 부른다). 얼핏 보면 조약의 내용은 그다지 불평등하지 않은 듯하다. 이를테면 영국이 패전국 중국에게 강요한 난징조약에서처럼 전쟁 배상금 같은 것은 없으며, 조선의 항구를 할양하거나 조차한다는 조항도 없다. 우선 조선에 일본 영사를 두겠다는 조항은 모든 수교의 기본이니까 연하다. 또 부산을 포함해서 세 개의 항구를 개방다는 조항은 전통적으로 3포를 통해 일본과 교역왔으니 전혀 어렵지 않다. 게다가 조약의 제1반갑기 그지없는 조항이다. 조선은 자주 국가일본과 동등한 권리를 보유한다는 내용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강화도조약을 통해 일본은 조선에게 선의를 베푼 걸까?

 

그러나 예나 지금이나 문안보다 맥락이, 보다 콘텍스트가 더 중요한 게 바로 외교 분야다. 조선이 자주 국가라는 것을 명시한 이유는 바로 전까지 조선이 자주 국가가 아니었다는 것을 뜻한다. 말할 것도 없이 조선은 전통적으로 중국의 속국이었다는 이야기다. 그렇다면 이제부터 조선은 중국의 속국이 아니며, 따라서 중국은 조선에 대해 종주권이나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게 된다. 물론 문안 상으로는 좋은 말이다. 그러나 그 문안의 맥락을 해석하면 앞으로 일본이 조선을 어떻게 한다 해도 중국을 포함해서 어느 나라도 전혀 간섭할 수 없다는 뜻이 된다. 일본은 교묘하게 정한론(征韓論)의 근거를 만들어낸 것이다.

 

그런 일본의 의도를 더 잘 보여주는 게 바로 조약의 제7, 즉 조선의 연해와 섬들을 자유로이 측량할 수 있다는 조항이다. 사실 엄밀하게 말하면 강화도조약의 불평등성을 명시적으로 드러내주는 것은 이 조항 하나뿐이다. 동등한 관계라면서 남의 나라를 일방적으로 측량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실제로 조약이 발효되면서 일본은 곧바로 한반도에 대한 면밀한 조사 작업에 들어간다고구려 광개토왕릉비(廣開土王陵碑)가 발견된 이 측량작업의 과정에서다. 조약에서는 한반도의 연해와 섬들만 측량하도록 되어 있었으나, 조약이 체결되면서 일본인들은 이제 자유롭게 조선을 드나들 수 있게 되었으므로 일본 정부는 군인들을 민간인으로 위장시켜 조선 전역의 지리와 문물을 조사하게 했다. 1882년 그런 밀정으로 활약하던 사카와 가게노부 중위는 만주를 돌아다니다가 압록강 중류 부근에서 높이 6미터의 거대한 비석을 발견하게 되는데, 그게 바로 광개토왕릉비(廣開土王陵碑). 물론 앞에서 보았듯이 무려 1500년 동안이나 그 비석은 그곳에 있었으나 그 전까지는 그게 광개토왕릉비인 줄을 아무도 알지 못했다. 그러나 그처럼 중요한 발견을 한 사카와는 그 비석에 중요한 조작을 한다. 일본이 바다를 건너와서 백제와 신라를 속국으로 삼았다는 그의 조작은 훗날 일본의 한반도 역사 조작 가능케 하는 근거가 된다.

 

그리고 나중에 보겠지만 일본이 한반도 전체를 강점한 뒤 이 측량 작업은 토지조사사업으로 이어져서 한반도를 장차 중국 침략을 위한 전진기지로 재편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강화도조약에서 일본은 조선 대표가 한성이라 부르던 한양을 굳이 경성京城이라는 용어로 불렀는데, 나중에 한반도가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면서 이 용어가 뿌리를 내리게 된다).

 

 

 시아버지의 고집과 며느리의 야심 왼쪽은 대원군, 오른쪽은 민비(閔妃). 시아버지와 며느리의 관계인 이 두 야심가로 인해 중요한 시기 조선의 대외 정책은 오락가락과 갈팡질팡을 거듭했다. 물론 그들 사이에 끼인 고종은 완벽한 바지저고리였다. 아마 고종은 나라의 걱정보다 아버지와 아내의 대립에서 더 마음의 고통을 느꼈을 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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