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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종횡무진 한국사, 11부 불모의 세기 - 4장 되놈과 왜놈과 로스케 사이에서, 사흘간의 백일몽③: 삼일천하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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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횡무진 한국사, 11부 불모의 세기 - 4장 되놈과 왜놈과 로스케 사이에서, 사흘간의 백일몽③: 삼일천하

건방진방랑자 2021. 6. 22. 0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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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흘간의 백일몽

 

 

1883년부터 김옥균(金玉均)은 소장파 개화론자들과 함께 비밀리에 거사를 위한 준비에 착수한다. 쿠데타의 지도부는 이미 구성되었으니 가장 필요한 것은 물리력인데, 이것은 박영효가 양성한 신식 군대와 김옥균이 사관학교의 설립을 위해 일본에 유학을 보낸 생도들이 담당한다(이 생도들 중에는 나중에 독립신문獨立新聞을 창간하는 서재필이 포함되어 있었다). 게다가 김옥균은 개화당에 호의를 보이는 일본 측의 동의를 얻어 유사시에는 일본 공사관 수비대를 동원할 수 있도록 조처한다. 이것으로 약소하나마 쿠데타의 3대 조건(이념, 지도부, 물리력)이 갖추어졌다. 이제 필요한 것은 일정뿐이다. 원래 쿠데타란 작은 것으로 큰 것을 치는 행위이므로 큰 것에서 뭔가 균열이 생겨야만 일정을 잡을 수 있다.

 

그 거사 일정을 정해준 것은 청나라다. 1884년 봄 청나라는 인도차이나에서 프랑스와 마찰이 일어나자 조선 주둔군의 절반을 빼서 그곳에 투입한다. 일단 조선의 청군은 1500명으로 줄었다. 게다가 곧이어 여름에 벌어진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청나라는 참패하고 만다인도차이나에서 중국이 전통적인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었던 지역은 베트남이다. 일찍이 한나라 시절부터 안남(安南)으로 불리던 이곳은 한 무제9군을 설치하면서 중국의 속령으로 편입되었다(한반도에 한군이 설치된 시기다). 이후 약 1천 년 동안 그런 상태였다가 중국에 비중화세계의 이민족 왕조들(--)이 들어서면서 베트남에도 독립 왕국이 성립되었다. 곧이어 명나라의 지배를 받게 되지만 베트남은 한반도의 조선과 달리 사대 대신 투쟁을 택해서 15세기에 립을 이룬다. 그러나 영국에게 인도를 빼앗긴 프랑스가 19세기부터 인도차이나에 손을 뻗치면서 베트남은 중국과 프랑스가 영향력을 다투는 각축장으로 전락했다. 여기서 프랑스가 승리한 것은 장차 베트남 전쟁의 불씨를 남기는 동시에, 인도차이나만이 아니라 극동 세계에도 큰 후유증을 남겼다. 조선의 개화 세력에게 기회를 주었으나 결과적으로는 조선이 일본에게 넘어가게 되는 계기를 제공한 것이다. 이렇듯 19세기에는 국지적인 사건이 일파만파를 부를 만큼 전세계가 이미 하나의 문명권으로 통합되어 있었다.

 

개화당으로서는 절호의 찬스가 아닐 수 없다. 드디어 D-데이가 잡혔다. 그 해 124(양력) 개화당은 홍영식이 주관하는 우정국(郵政局, 우체국) 낙성식을 계기로 사대당의 대신들을 살해하고 정권을 잡는다는 계획을 세웠다.

 

쿠데타 자체는 실패였다. 연회식장에 투입된 쿠데타군은 현장에서 민영익에게 중상을 입혔을 뿐 정부 요인들을 처단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꿩 대신 닭(?)이랄까? 반군은 고종(高宗)민비(閔妃)를 창덕궁 옆의 경우궁(景祐宮, 순조純祖의 어머니를 모신 사당)으로 납치하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그들은 즉각 왕의 이름으로 사대당의 보스들을 불러들였다. 민영익의 아버지인 민태호, 최초의 신문인 한성순보(漢城旬報)를 발행한 민영목(閔泳穆, 1826 ~ 84), 묄렌도르프를 고문으로 초청한 조영하(趙寧夏, 1845 ~ 84) 등이 당시에 영문도 모르고 경우궁에 갔다가 살해당한 자들이다(민태호 부자와 민영목은 민응식과 더불어 4四閔이라 불리며 위세를 떨치고 있었는데, 그 중 둘이 죽고 하나가 중상을 입었으니 사대당은 치명타를 당한 셈이다). 이것으로 일단 갑신정변(甲申政變)은 성공했다.

 

정권을 장악한 김옥균(金玉均) 일파는 곧바로 다음 단계, 즉 새 내각을 구성하는 작업에 들어간다. 총지휘자답게 김옥균은 배후로 물러나고 홍영식, 박영효, 서광범은 입각했는데,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개화당만이 아니라 대원군의 조카인 이재원(李載元, 1831 ~ 91)과 아들 이재면 등 왕실 종친들을 참여시켰다는 점이다. 물론 구색을 맞추기 위한 인사지만 쿠데타 정권이라는 색채를 제거하는 데는 대단히 효과적인 조치다. 이튿날인 125일 새 내각이 발표되면서 드디어 새 정권은 쿠데타라는 딱지를 떼는 듯 보였다. 나아가 126일 아침 문벌과 신분을 폐지하고 토지제도와 조세제도를 개혁하는 것을 기본 내용으로 하는 혁신정강까지 발표함으로써 드디어 역대 어느 정권도 하지 못한 개혁+개화라는 역사적 사명은 완수되는 듯 보였다. 김옥균(金玉均)의 꿈은 실현된 듯 보였다.

 

그것을 한낱 사흘간의 백일몽으로 만든 것은 민비와 일본이다. 우선 125일 민비는 개화당으로 위장한 위안스카이의 첩자를 만난 뒤 김옥균에게 거처를 창덕궁으로 옮기겠다고 말했다. 아직 소수 병력으로 정권을 유지하고 있는 김옥균은 넓은 창덕궁을 수비할 자신이 없으므로 극구 만류했으나 한사코 고집을 부리는 국왕 부부를 막을 수는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고종(高宗)이 혁신정강을 공식적으로 추인하는 절차가 약정되어 있던 126일 오후 세 시를 기해 1500명의 청군이 창덕궁으로 몰아닥쳤다. 겨우 50명의 병력과 사관생도로 이루어진 쿠데타군이 중과부적을 느끼고 후퇴할 때, 애초에 돕기로 했던 일본군은 재빨리 창덕궁에서 철병해 버렸다. 김옥균(金玉均)3일 천하, 아니 그보다도 조선 최후의 개혁 시도는 이것으로 싱겁게 끝나 버렸다.

 

 

잘린 개화의 목 김옥균(위쪽)의 쿠데타가 실패한 이유는 필요한 무력 기반을 갖추지 못한 탓도 있지만, 교활한 민비(閔妃)와 그녀에게 휘둘린 고종(高宗)의 책임도 크다. 민비는 아무런 이론도 없이 무작정 개화를 추진하다가 정작 개화가 필요할 때는 수구로 돌아서 버렸다. 아래 사진은 나중에 암살되어 귀국한 김옥균의 시신에서 머리를 잘라낸 장면이다. ‘대역부도옥균이라고 쓴 휘장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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