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부부의 희비극③
그러나 백성들보다 일본에 대한 감정이 더 사무친 사람이 있다. 바로 일본에 의해 아내를 빼앗긴 고종(高宗)이다. 백성들은 일본을 혐오하지만 고종은 혐오를 넘어 일본이 두렵기까지 하다. 그에게 민비(閔妃)는 사랑하는 아내라기보다 20년 동안이나 자신을 이끌어주던 정신적 스승이었다. 아내가 있었기에 그는 그 긴 세월 동안 국왕의 책무를 면제받고 아무 생각 없이 편하게 지낼 수 있었으며, 아내의 넓은 치마폭에 숨어 있는 한 아무도 그를 건드릴 수 없었다. 그랬으니 이제 이 세상에 홀로(?) 남게 된 그의 심정이 얼마나 참담했을지는 충분히 짐작이 간다. 그에게는 상처받은 자신을 만져주고 보듬어줄 새 보호자가 필요하다.
물론 아버지 대원군은 싫다. 평소에도 엄하고 무서웠지만 이제는 권력에 미친 노인네인 데다가 아내를 죽인 일본의 앞잡이가 되어 있지 않은가? 의지할 데 없는 마흔네 살짜리 아이의 공허한 마음을 파고든 것은 친러파인 이범진(李範晉, 1852 ~ 1910)과 이완용(李完用, 1858 ~ 1926)이다. 베베르 공사와 머리를 맞대고 짠 각본에 따라 그들은 1896년 2월 고종(高宗)에게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할 것을 권유한다. 대원군과 친일파가 득시글거리는 궁중, 아니 그보다 아내의 치마폭이 사라진 썰렁한 궁중보다는 몸을 의지할 수 있는 러시아 공사관이 훨씬 낫다는 논리다. 일국의 왕이 거처를 옮기기에는 너무나 어처구니 없는 논리였으나 고종은 그것을 수락할 만큼 어처구니없는 왕이었다. 더 어처구니없는 일은 그렇게 해서 시작한 남의 나라 공사관에서의 피난 살림이 무려 1년 동안이나 지속되었다는 점이다. 이것을 아관파천(俄館播遷)이라 부르지만, 이렇게 터무니없는 사건에까지 이름을 붙일 가치가 있는지 의아스러울 정도다.
어쨌든 조선은 왕국인지라 왕이 피난한 효과는 있었다. 김홍집(金弘集) 친일내각은 즉각 김병시(金炳始, 1832 ~ 98)를 수반으로 하는 친러내각으로 바뀌었고, 대원군은 또 다시 정계에서 은퇴했다(칠전팔기의 뚝심을 지닌 그도 이번에는 마지막 은퇴였다). 김윤식은체포되고 어윤중은 피살되었으며, 『서유견문(西遊見聞)』을 쓴 갑오개혁(甲午改革)의 젊은 주역 유길준(兪吉濬, 1856 ~ 1914)은 일본으로 망명해서 ‘일본견문’을 준비해야 했다. 이것만도 볼 만한 코미디지만 진짜 코미디는 그 다음이다. 정권을 친러파가 완전히 장악했어도 고종(高宗)은 경복궁으로 돌아오려 하지 않는 것이다. 이때부터 1년 동안 정부는 남의 나라 공사관에 가 있는 제 나라 국왕을 환궁시키기 위해 백방으로 궁리하고 상소하지만 국왕은 악착같이 가지 않으려 버티는 희한한 쇼가 여러 차례 벌어진다. 아무리 일본의 위협이 남아 있다지만 일국의 왕으로서 그렇게 겁이 났을까?
그토록 무겁던 고종의 궁둥이가 바닥에서 떨어진 것은 1897년 2월이다. 러시아의 영향력이 일본을 충분히 견제할 만큼 튼튼해졌다고 판단한 그는 1년이나 남의 집 신세를 지고서야 제 집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아직 그가 주연을 맡은 코미디는 한편이 더 남아 있다. 그것은 바로 그가 그동안 보인 추태에 어울리지 않게 황제를 자칭하게 되는 사건이다.
▲ 발코니의 국왕 정신적 지주였던 아내가 죽자 고종의 정신은 금세 산란해졌다. 그래설까? 그는 제 집을 놔두고 1년 동안이나 남의 나라 공사관에서 셋방살이를 했다. 사진은 러시아 공사관에서 바깥을 내다보고 있는 고종(高宗)의 모습이다. 그 바깥에는 고종의 환궁을 요구하는 시위대가 있었는데, 어처구니없게도 그 시위대는 조선인들이 아니라 일본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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