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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횡무진 한국사, 11부 불모의 세기 - 4장 되놈과 왜놈과 로스케 사이에서, 도발된 전쟁과 강요된 개혁③: 갑오개혁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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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횡무진 한국사, 11부 불모의 세기 - 4장 되놈과 왜놈과 로스케 사이에서, 도발된 전쟁과 강요된 개혁③: 갑오개혁

건방진방랑자 2021. 6. 22. 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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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발된 전쟁과 강요된 개혁

 

 

결국 주제를 모르고 주체성을 보였던 대원군은 한 달도 못 가 퇴출되고 만다. 일본이 다음 후보로 내세운 인물은 바로 김홍집(金弘集)이다. 온건 개화파였던 그는 급진 개화파가 주도한 갑신정변(甲申政變)을 수습한 뒤 10년 동안이나 한직에 머물러 있다가 실로 오랜만에 화려하게 컴백했다. 물론 그에게 주어진 임무는 일본이 짜준 개혁 프로그램을 충실히 이행하는 것뿐이다. 그 프로그램을 갑오개혁(甲午改革)이라 부르는데, 실상 김옥균(金玉均)10년 전에 시도했던 개혁이 당시에는 그것을 반대했던 김홍집의 손에 의해 추진되는 격이니 공교로울 뿐이다.

 

겉으로 보기에 개혁의 주체는 김홍집이 이끄는 군국기무처(軍國機務處)인 듯하지만, 알고 보면 고문의 직함을 가진 오토리 공사이고, 더 알고 보면 그의 배후에 있는 일본의 메이지 정부다. 따라서 갑오개혁이 메이지 유신(明治維新)의 축소판일 것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다. 어쨌든 그 내용은 나무랄 데가 없다. 문벌과 신분의 차별을 철폐하고 노비문서를 소각한 것이라든가, 연좌제를 폐지하고 과부의 재혼을 허용하고 관권에 의한 인신 구속을 제한하는 등 인권 보장에 비중을 둔 것은, 비록 강요된 개혁일지라도 한반도 최초로 근대적 법과 제도가 자리잡은 기념비적 변화에 해당한다. 게다가 중국의 연호를 버리고 조선 고유의 개국기년을 사용하기로 한 것과 과거제(科擧制)를 폐지한 것은 중화세계의 굴레를 벗어던진 것이므로 500년 조선사, 아니 1천 년 한반도사를 완전히 뒤집는 획기적인 일이다(그래서 서기 1894년은 개국 503년으로 불리게 되었다). 그와 더불어 화폐제도도 개혁되고, 조세제도도 은납제로 바뀌고, 은행과 회사의 설립이 시작되고, 도량형도 통일되었으니 역대 어느 정권도 하지 못한 전반적인 개혁을 김홍집(金弘集) 내각은 불과 며칠 만에 우지끈 뚝딱 해치운 것이다.

 

그러나 개혁의 내용이 아무리 좋다 해도 그것을 받아들이는 측에서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면 아무런 소용도 없다. 어쩔 수 없이 친일로 선회하게 된 조선 정부에서마저 지나치게 급진적인 갑오개혁(甲午改革)을 선뜻 받아들이지 않을 정도였다면, 조선 백성들이 개혁을 바라보는 태도야 더 말할 것도 없다. 아무리 새로 발행한 화폐를 사용하라고 해도, 조세를 화폐로 내라고 해도, ()이나 리()를 쓰지 말고 미터법을 쓰라고 해도 백성이 따르지 않으면 말짱 헛거다. 더욱이 조선백성들은 정부의 모든 조치를 불신하고 있을 뿐 아니라 외세가 남의 나라 땅에 와서 자기들끼리 싸움박질을 벌이고 내정에 간섭하는 꼴을 더 이상 참지 않으려 한다. 전봉준이 2차 봉기에 나선 것은 그 때문이다.

 

외세 간섭의 빌미를 주지 않기 위해 한동안 사태를 관망하기만 했던 전봉준은 청일전쟁에서 일본의 승리가 굳어지자 다시 척왜의 기치를 치켜들고 봉기했다. 집강소를 통해 신속히 연락이 이루어진 결과 189410월 전라도 삼례역에는 무려 11만에 이르는 동학 농민군이 모이게 된다원래 동학(東學)2대 교주인 최시형(崔時亨)은 전봉준의 계획에 반대했다. 동학이라는 새 종교를 착근시키는 것에 목숨을 건 그는 오히려 전봉준을 역적이라 부르며 정부 측에 추파를 던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2차 봉기도 처음에는 전봉준을 비롯한 전라도 접주들(남접)이 시작했고 최시형이 관장하는 충청도 접주들(북접)은 참여하지 않았다. 오지영(吳知泳, ? ~ 1950)이 항일에 매진하자고 최시형(崔時亨)을 설득한 끝에 가까스로 남접과 북접이 함께 대규모 농민군을 이룰 수 있었다. 그러나 이 봉기가 실패한 이후 남접의 지도부가 모두 죽음을 당한 것과는 달리 최시형, 오지영, 손병희(孫秉熙, 1861 ~ 1922) 등 북접의 지도부는 살아남았고 훗날 동학(東學)을 계승한 천도교에서 간부를 맡았다. 굵고 짧은 삶보다 가늘고 긴 삶을 선호하는 종교의 생리를 말해준다.

 

하지만 일본군이 정식으로 투입된 이상 농민군의 투쟁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11월 공주성 공략에서 실패한 농민군은 곧이어 벌어진 우금치 전투에서 일본 정규군의 조직력과 우세한 화력에 버티지 못하고 결정적인 패배를 당한다. 전봉준, 손화중, 김개남의 남접 삼총사가 체포되어 이듬해 참수당함으로써 동학농민운동(東學農民運動)은 최종적인 막을 내렸다.

 

 

관점의 차이 조선에서 내란이 터졌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청나라와 일본의 태도는 확연히 달랐다. 청나라는 민비(閔妃)의 초청장을 받고서 아산으로 온 반면 일본은 톈진조약을 구실 삼아 인천항으로 들이닥쳤다. 사진은 그 일본군의 모습이다. 이렇듯 같은 사태를 바라보는 관점에서 차이가 있었으니 청일전쟁의 승패는 보지 않아도 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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