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보편적 앎에 대한 장자의 비판
1. 나를 대상화하는 문제점
철학은 크게 두 종류로 나누어질 수 있다. 그 하나가 세계와 인간을 포괄적으로 설명(explanation)할 수 있다고 인정되는 보편적이고 합리적인 체계를 설정하려고 노력하는 철학이라면, 다른 하나는 이런 보편성과 합리성을 회의하면서 실존적 사태에 주어진 것만을 기술(description)하려는 철학이다. 앞으로 편의상 전자를 합리적 철학이라고 부르고, 후자는 기술적 철학이라고 부르도록 하자. 물론 우리는 여기서 단순히 주어진 세계와 인간에 대해 합리적으로 설명하려는 합리적 철학을 넘어서는 새로운 종류의 합리적 철학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지적하여야만 한다. 지금은 존재하지 않지만 앞으로 도래해야만 할 합리적 체계를 모색하고 이것을 도달해야 할 이념으로 설정하는 실천적인 합리적 철학도 충분히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우리는 합리적 철학도 설명적인 합리적 철학과 실천적인 합리적 철학으로 나누어야 할 것이다.
설명(explanation) | 기술(description) | |
세계와 인간의 포괄적 설명 | 실존적 사태에 주어진 것만 기술 | |
합리적 철학 | 기술적 철학 | |
설명적인 합리적 철학 | 실천적인 합리적 철학 |
장자의 철학은 분명 합리적 철학이라기보다는 기술적 철학에 가깝다. 장자철학의 이런 성격은 그가 항상 반복적으로 ‘우리의 앎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데 그쳐야 지극한 것이다[知止其所不知, 至矣]’라고 말하고 있다는 데서도 확인되는 것이다. 이런 장자의 정신은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 우리는 침묵해야만 한다(Whereof one cannot speak, thereof one must be silent)는 청년 비트겐슈타인(Wittgenstein)의 정신과 유사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장자의 철학은 기술적 철학을 넘어서 있다. 엄밀하게 말해서 기술적 철학은 나에게 주어지는 경험들을 기술하는 데에서 그칠 뿐이다. 그러나 앞서의 조릉에서 터득한 깨달음에서 이미 살펴본 것처럼, 장자의 나는 혼탁한 물[濁水]과 같은 마음을 가진 나와 맑은 연못[淸淵]과 같은 마음을 가진 나, 즉 인칭적인 나와 비인칭적인 나로 나누어질 수 있다. 따라서 전자의 나가 경험하는 것과 후자의 나가 경험하는 것은 같을 수가 없다. 그러므로 당연히 주어진 경험을 기술하는 내용도 차이가 날 수밖에 없다.
뿐만 아니라 엄격하게 말해서 장자는 비인칭적인 나가 경험하는 사태를 기술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맑은 연못과 같은 마음, 즉 비인칭적 마음은 기본적으로 기술의 전제인 인칭성을 결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경우 마음에는 기술하는 주체가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다. 다른 관점에 보자면 비인칭적 나는 타자와의 소통이라는 실천적인 문맥 속에 놓여 있기 때문에, 이 경우 기술(description)이라는 거리둠은 존재할 수가 없다. 결국 비인칭적인 나를 기술하지만 이것은 항상 인칭적인 나로 변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행글라이더를 탄 내가 바람과 분리 불가능한 소통의 흐름을 형성하고 있는 경우를 생각해보자. 나는 지금 행글라이더가 바람인 듯 바람이 행글라이더인 듯 움직이고 있다. 만약 이런 비인칭성의 상태를 기술하려고 한다면 어떻게 될까? 예를 들어 ‘나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라고 내가 나 자신을 대상화하자마자 나는 바람과의 분리 불가능한 공존의 흐름에서 이탈하게 될 것이고 급기야는 곧 추락하고 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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