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   2024/11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Archives
Today
Total
관리 메뉴

건빵이랑 놀자

논어한글역주 - 번역론 본문

고전/논어

논어한글역주 - 번역론

건방진방랑자 2021. 6. 26. 17:27
728x90
반응형

 번역론(飜譯論)

 

 

번역은 해석을 전제로 한다. 해석(Interpretation)은 이해(Understanding)에 도달하려는 노력이다. 해석의 과정에는 매우 중층적이고 복잡한 이해의 구조가 얽혀있다. 지금 내가 해석하려는 것은 논어라는 텍스트다. 현존하는 나의 논어텍스트는 이미 진한(秦漢)시대에 성립한 것이다. 최근에 묘혈에서 나오는 간백(簡帛)의 문자들로 미루어 생각해볼 때 거의 상응되는 문자체계의 고본 책자가 2천 년 이상 지속성(continuity)을 유지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이해에 얽힌 주체들은 시공에 따라 다르지만, 이해의 대상이 되고 있는 텍스트 그 자체는 동일성을 유지했다는 의미가 된다. 이것은 참으로 서양문화권에서는 흔히 있기 어려운 현상이다. 고전 희랍 텍스트나 이집트 텍스트의 언어는 이미 사어화된 반면, 한문텍스트의 언어는 연속성을 지니는 활어(活語)로서 인간세의 삶 속에서 지속되었기 때문이다.

 

춘추전국시대의 중국대륙의 사람 ()    
     

   
       
       
       
    () 21세기의 한국인인 나

 

논어의 성립과정 자체가 기나긴 역사를 거치면서 복잡한 삶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에 그 성격을 한마디로 규정하기 어렵지만, 일단 공자라는 역사적 개인의 말을 기록한 것이라고 단순화해서 상정해보자! 이때 공자는 발신자(source)가 된다. 공자는 말을 할 줄 아는 사람이다. 다시 말해서 의미를 소통할 수 있는 언어를 가지고 있었다. 공자라는 발신자의 언어는 지금으로부터 약 2500여 년 전의 산동반도의 곡부 지역에서 소통되고 있던 언어체계였다당시의 방언은 지금 정확하게 재구되기 어렵다.

 

그런데 인간의 언어의 발설은 반드시 타인의 이해를 전제로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공자의 발신체계는 같이 생활하는 사람들이나 제자들에 의하여 이해되었던 것들이다. 나는 말한다. 인간의 언어는 어떠한 경우에도 이해되기 위한 것이다. 이해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언어가 아니다.

 

논어(論語)의 어()는 공자라는 발신자가 그 발설된 상황에 있던 제자들이라는 수신자(receptor)에게 던진 메시지(message)인 것이다. 그 메시지를 어느 기자가 문자(the written form)의 형태로 기록한 것이 바로 논어인 것이다. 이것이 곧 논어(the Analects)1차적 이해의 구조를 형성한다.

 

공자
S1
말씀
M1
제자
R1
       
    기자
W1
   
       
    논어
A
   

 

그런데 내가 지금 논어를 읽는다고 하는 행위는 이러한 1차적 이해의 구조와는 또 다른 차원의 구조를 갖는 것이다. 나는 2500년 전의 수신자(R1)가 아니다. 그러나 나는 그 메시지를 2500년 후에 수신하는 사람(R)이다. 보다 정확하게 말하면, 나는 M1을 직접 수신하는 것이 아니라 기자(W1)의 해석을 거친 기록(A)를 수신하는 것이다.

 

공자
S1
말씀
M1
제자
R1
     
       
R

 

그런데 나의 수신은 나홀로의 이해로서 완결되는 것이 아니다. 나는 수신자(R)인 동시에 반드시 발신자(S2)가 된다. 나는 나의 이해를 나와 동일한 시공에 사는 사람들, 나의 제자들(R2)에게 전달하는 행위를 통해 나의 이해를 확인한다. 이것이 바로 나를 둘러싼 2차적 이해의 구조이다. 이 두 차원의 이해의 구조를 간단히 도식화하면 다음과 같다.

 

공자
S1
말씀
M1
제자
R1
         
               
       
R
S2 M2 R2
발신자 언어 수신자 언어

 

여기서 S1R1의 사이는 기본적으로 1개 국어통용의 체계(monolingual)이다. 그러나 나(R S2)는 반드시 2개국어화자(bilingual)가 되어야만 한다. 그러나 또다시 S2R2사이는 1개국어통용의 체계이다. 공자의 언어통용체계는 네모꼴(), 나의 언어통용체계는 짙은 네모꼴()로 표시되었다.

 

위의 도식에서 M1R1의 관계와 M2R2의 관계는 제각기 상이한 문화권 속에 있다. 언어와 풍습과 제도와 관습을 달리하는 각기 다른 독자적 장()에 놓여있다. 이 각기 다른 장을 다른 삶의 양식(Lebensform)’으로 이해한다면, 그 삶의 양식은 보편적 공통성과 상대적 상이성의 양측면을 동시에 보유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논어의 이해의 궁극적 의미가 M2R2의 관계에 집중되어 있다고 생각하면 그것은 딜타이류의 주관주의(subjectivism)에 빠진다. 그리고 그 이해의 궁극적 기준이 M1R1사이에 있으며, M1R1의 이해의 구조는 절대적인 기준으로서의 객관성이 보장되는 그 무엇이라고 규정한다면 그것은 검증하기 어려운 객관주의(objectivism)에 빠진다. 내가 말하는 이해는 주관주의나 객관주의의 편협성을 초탈하는 것이다. 해석 그 자체가 이상적인 기준(M1-R1), 현실적인 기준(M2-R2)도 아닌 어떤 새로운 역동적 객관성(dynamic objectivity)을 보장받아야 하는 것이다.

 

내가 말하는 번역(translation)’이란 구극적으로, 나의 실존적 이해의 구조 속에서 일어나는 사건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러나 그것은 M1M2로 전환시키는 것이 아니다.

 

공자의 메시지
M1
나의 메시지
M2
번역X

 

그런데 이러한 전환이야말로 흔히 사람들이 상식적으로 생각하는 2개국어화자의 번역행위이다. 그것은 축어적 일치성(verbal consistency)이나 양식적 상응성(formal correspondence)을 지향하고 있다. 나는 이러한 번역과 그 번역에 깔린 이해의 구조를 동양고전의 번역에 있어서 반드시 우리가 경계해야 할 위험한 사태라고 생각한다.

 

내가 말하는 번역이란 M1에서 M2로의 일방적 전환이 아니라, M1R1사이에 성립하는 반응의 체계(System of Response), M2R2사이에 성립하는 반응의 체계 사이의 상응성이다. 상응성은 동일성과 구분되는 것이다. 그것은 축어적 일치가 아닌 맥락적 일치(contextual consistency), 양식적 상응이 아닌 역동적 상응(dynamic equivalence)이다. 그리고 이 두 반응의 관계는 궁극적으로 쌍방적일 수밖에 없다.

 

M1   M2

Response
반응의 체계

번역O

Response
반응의 체계
R1   R2

 

이러한 번역의 구조가 곧 나의 이해의 구조며, 이것이 곧 나의 해석학적 입장이다. 그런데 여기서 반응의 관계가 쌍방적이라는 사실을 좀 부연설명할 필요가 있다. 번역이 M1에서 M2로의 일방통행이라고 한다면 이때 M1은 절대적인 의미체계로서의 그 무엇이다. 그리고 M2M1이라는 절대적 기준에 접근하는 도수로서만 그 가치서열을 보장받는다. 그러나 내가 생각하는 번역과 이해는 전혀 이러한 것이 아니다. 우선 나는 M1M2의 주체인 S1S2의 실체성을 인정하지 않는다. 이것은 불교에서 말하는 제법무아(諸法無我: 모든 다르마에는 실체가 없다)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공자와 나는 다 같이 고정불변의 실체가 아니며, 시간적ㆍ공간적 불변의 점이 아니다. 그것은 점이 아닌 면()이며, 그 면은 수없는 관계로 착종된 면인 것이다. S1의 발설체계인 M1이나 S2의 발설체계인 M2는 그 자체로 고정적일 수 없으며, 그것은 오직 각기 R1, R2와의 관계 속에서만 의미를 갖는 술어적인 것이다. M1, M2는 모두 주어적인 실체가 아니라 술어적인 상태이다. 따라서 역동적 상응이라고 하는 것은, M1-R1의 반응체계라고 하는 이해의 지평과 M2-R2의 반응체계라고 하는 이해의 지평사이에 융합이 일어나는 것을 의미한다.

 

이 두 반응체계는 상응되는 관계를 통해 나의 이해의 지평 속에 출현(emergence)하게 되는 것이다. 즉 그 두 반응체계가 비록 2500년의 시간을 격하고, 황해(黃海, Yellow Sea)라는 공간을 격하고 있을지라도, 그 반응체계 자체가 궁극적으로 실체적ㆍ주어적 상태가 아니기 때문에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주면서 비실체적으로, 술어적으로 출현하게 되는 것이다. 모든 해석의 지평은 열려있어야만 한다. 그래야 비로소 지평간의 융합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융합이 가능해야만 주관주의나 객관주의의 오류에 함몰되지 않는 이해가 성립하는 것이다.

 

2500년 전의 공자(S1)와 제자(R1) 사이의 반응의 체계는 학문적으로 역사적으로 축적된 주소학(注疏學)의 성과를 통하여 어느 정도의 객관성을 전제할 수는 있지만, 그 객관성이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방편적이며, 따라서 유동적이고 상황적일 수밖에 없다. 이것을 나는 술어적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사실 공자와 제자 사이의 반응의 체계의 실재(reality)는 구극적으로 불가지론의 대상일 뿐이다. 그러나 그 불가지론을 가지론으로 끊임없이 극복하는 과정이 곧 지평의 융합이요, 해석이요, 이해인 것이다.

 

나는 언어를 논리로 생각하지 않는다. 언어는 논리를 포괄하는 느낌(Feeling, 나의 기철학적 개념)’의 총체성 속에서 현현하는 것이다. 논리도 궁극적으로 느낌의 반복적 정형일 뿐이다. 언어는 평면적 논리를 전달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느낌의 입체성을 전달키 위한 것이다.

 

나의 번역에는 다음의 5가지 우선의 체계가 있다.

1. 맥락적 일치성이 축어적 일치성에 우선한다.

2. 역동적 상응성이 양식적 상응성에 우선한다.

3. 언어의 청각적 형태가 문어적 형태에 우선한다.

4. 번역이 의도하고 있는 대상에 의하여 받아들여지고 쓰여지는 양식이 전통적으로더 권위있는 양식에 우선한다.

5. 삶의 총체적 느낌이 형식논리적 의미에 우선한다.

 

이상의 논의는 나이다와 타버의 번역의 이론과 실제를 참고하였다Eugene A. Nida and Charles R. Taber, The Theory and Practice of Translation, Published for the United Bible Societies by E. J. Brill, Leiden 1974. 나의 책, 도올논문집(통나무, 1991)에 본서의 우리말 번역이 실려있다.

 

 

 

 

인용

목차

맹자한글역주

효경한글역주

 

728x90
반응형
그리드형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