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70살의 공자가 주역에 발분하다
7-16.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하늘이 나에게 몇 년의 수명만 더해준다면, 드디어 나는 『주역(周易)』을 배울 것이다. 그리하면 나에게 큰 허물이 없으리.” 7-16. 子曰: “加我數年, 五十以學易, 可以無大過矣.” |
이 장에 대해서는 해석의 여지가 너무 많아 제가(諸家)의 설이 분분하지만 간략히 내 생각만을 논술하겠다. 공자의 시대에 과연 우리가 생각하는 『주역(周易)』이라는 문헌이 있었을까? 『주역(周易)』에 미쳐 홀로 도통했다는 광인이 아닌 이상, 전문학자의 세계에서는 『주역』을 문왕(文王)의 작으로 본다든가 공자 시대에 「주역」이 엄존하고 있었다는 헛소리를 뇌까리는 사람은 없다. 주역이라고 해도 우리가 소위 『경(經)』이라고 하는 것은 64개의 여섯자리 음양 심볼인 괘모양과, 그 괘모양의 이름 64개와, 그 64개의 괘상에 딸린 전체적인 괘사(卦辭) 혹은 단사(彖辭), 그리고 각 효에 딸린 384개(64×6)의 효사(爻辭)만을 말하는 것으로 극히 제한된 분량의 것이다. 그 외의 『주역』이라는 문헌의 대부분은 소위 십익(十翼)【열개의 날개. ‘날개’는 뜻을 펼친 주해라는 뜻】이라는 것인데 8개의 전(傳)으로 구성되어 있다. 대상전(大象傳)ㆍ소상전(小象傳)ㆍ단전(傳)ㆍ계사전(繫辭傳)ㆍ문언전(文言傳)ㆍ설괘전(說卦傳)ㆍ잡괘전(雜卦傳)ㆍ서괘전(序卦傳)이 그것이다.
이 8전의 숫자와 십익이라는 개념이 안 맞아떨어지므로, 단전을 상ㆍ하경으로 나누고, 계사전을 상ㆍ하로 나누어 10이라는 숫자를 맞춘다. 그러니까 『주역(周易)』이라는 문헌의 대부분이 이 8전으로 구성된 것이며 공자와의 관련성도 이 8전에 한정된 것이다. 그러나 8전의 언어를 분석해보면 도저히 춘추시대의 작품으로 볼 수는 없다. 그것은 모두 전국시대로부터 한 대에 걸쳐 점차로 형성된 것이다.
그래서 이 장의 ‘역(易)’이라는 글자를 ‘역(亦)’으로 바꾼다. 실제로 그렇게 쓰여져 있는 노론(魯論)계열의 텍스트가 있다는 것이다(『경전석문』에 의거). 그러면 ‘역(亦)’은 그 아래 문장으로 붙게 된다. 그렇게 되면 ‘나에게 몇 년의 세월만 더 허락하여 50살까지만이라도 열심히 공부할 수 있다면 또한(亦) 큰 허물이 없는 인간이 될 텐데.’라는 식의 문장이 된다. BC 505년, 공자 48세 때 계씨의 가신인 양호(陽虎)가 반란의 뜻을 품고 공자를 부르려 할 때 공자가 거절한 사건이 있는데 이때 즈음 공자가 한 말로 보면 이 얘기는 딱 맞아떨어진다는 것이다. 치엔 무(錢穆), 타케우찌 요시오(武內義雄) 등이 이 설을 주장한다. 퍽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학역(學易)’을 그대로 살리려는 사람들은 ‘오십(五十)’이라는 글자가 영 마음에 안 들기 때문에 그 두 글자를 합쳐서 ‘졸(卒)’로 만든다[五十 → 卒]. 그러면 ‘결국’, ‘드디어’, ‘마침내’의 부사가 되어버린다. 그러면 50이라는 나이의 부담이 사라진다. 그러면 이것은 공자가 죽기 직전에 안타깝게 향학열의 마지막 심정을 토로하는 이야기가 되어버린다: ‘하늘이 나에게 몇 년의 수명만 더해준다면, 드디어[卒] 나는 역(易)을 배울 텐데……’ 주자는 ‘가(加)’를 「세가」의 용법에 따라 ‘가(假, 빌려준다)’로 읽었는데 뜻은 대차가 없다: ‘하늘이 나에게 몇 년의 수명만 더 빌려주면……’ 나는 이 설을 취한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주역(周易)』 십익(十翼)의 문헌은 확실하게 공자 이후에 성립한 문헌이므로 논의의 대상이 될 필요가 없다. 그러나 경(經)에 해당되는 부분은 지극히 간결한 것으로 이것이 과연 언제 성립했느냐에 관해서는 의론의 여지가 무궁무진하다. 아주 간단히 말하자면 그 핵심은 64개의 괘(Hexagram)라는 심볼리즘이다. 이것은 양효(⚊)와 음효(⚋)의 여섯 자리로 구성된 것이며 그것은 매우 수리적인 사유를 통해 연역적으로 구성되는 것이다. 26=64라는 숫자는 너무도 명료한 것이다. 이 64개의 심볼을 가지고 우주만상을 설명할 수 있다는 생각은 지극히 모순적이면서도 지극히 당연한 것이다.
아주 쉽게 피아노건반 위의 째즈코드를 가지고 설명을 해보자. 피아노 한 옥타브는 12개의 건반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12개의 평균분할의 음마다 음정간격을 어떻게 설정하냐에 따라, ‘세븐쓰 코드’로서 대략 5개의 기본 코드를 만들 수 있다. 메이저(Major), 도미난트(Dominant), 마이너(Minor), 해프 디미니 쉬드(Half Diminished), 디미니쉬드(Diminished). 그러면 12음 모두에 5가지 코드가 다 가능하므로 12×5=60개의 코드가 만들어진다. 이 외로도 얼마든지 많은 코드를 만들 수 있지만 일단 이 60개의 코드로 제한을 시켜도, 이 60개의 코드를 컴비네이션해서 만들 수 있는 음의 진행은 무한대에 가깝다. 모든 멜로디를 다 이 60개 코드의 변주로써 해결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아주 수학적이고 아주 제한된 연역적 심볼리즘이지만, 그 심볼리즘은 전혀 필연성이 없는 무한대에 가까운 개연적 사태를 연관지어 설명하는데 별 무리가 없다. 『주역』이라는 문헌에 어느 정도 달통하지 않으면 내가 지금 말하는 것을 이해하기 어려울지 모르겠으나 괘의 심볼리즘의 세계와 효의 사(辭) 즉 언어의 세계는 전혀 이질적인 것이다. 괘의 심볼이 필연이라면 효의 언어는 매우 우연적인 것이다.
괘(卦)의 심볼리즘 | 효(爻)의 언어 |
필연의 세계 The World of Necessity |
우연의 세계 The World of Chance |
공자의 시대에 육경(六經)은 존재하지 않았다. 확실히 존재했던 것은 육예(六藝)였다. 그런데 예ㆍ악ㆍ사ㆍ어ㆍ서ㆍ수라는 6과목 속에 바로 수(數)가 들어가 있는 것이다. 이 수는 일차적으로 역법(曆法)과 관련된 것이다. 그러니까 천문학【‘Astronomy’의 수준이라기보다는 ‘Astrology’라 해야 맞겠지만, 퍽 합리적ㆍ수리적 사고가 들어있다】과 관련된 것이다. 게다가 공자는 음악의 달인이었다. 따라서 이 우주의 삼라만상을 어떠한 단순한 수리로써 공식화해보고 싶은 생각은 금(琴)의 현줄만 들여다 보고 있어도 구체적인 이미지를 가지고 떠오를 수 있는 것이다. 나는 64괘의 아이디어는 점차적인 축적의 결과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은 명료한 음양의 관념과 상ㆍ하괘의 수리적 사유만 있으면 일시에 포뮬레이션(formulation, 정형화)이 가능한 것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주역(周易)』의 성립시기를 전국말기의 음양가학파의 성립 이후로 생각했다. 먼저 64괘만 만들어지면 효사와 그에 따른 전(傳)들이 비교적 짧은 시기에 발전하여 만들어질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최근에 엄청난 사건이 터졌다. 1973년 12월 호남성 장사(長沙) 마왕퇴(馬王堆) 3호 한묘(漢墓)에서 노자(老子) 갑ㆍ을본과 함께 거의 완정한 백서(帛書) 『주역(周易)』이 출현한 것이다. 사실 이 사건이 던지는 의미는 막대한 것이었다. 그런데 사태는 여기에서 멈추지 않았다. 1977년 안휘성 부양현(阜陽縣) 쌍고퇴(雙古堆) 1호 한묘에서 『부양한묘죽간주역』이 출토되었고, 또 1993년 호북성 강릉현(江陵縣) 왕가대(王家臺) 15호 진묘(秦墓)에서 『왕가대진묘죽간귀장(王家臺秦墓竹簡歸藏)』이 출토된 것이다. 그리고 최근의 BC 300년 전후로 추정되는 상박초간(上博楚簡) 자료 속에도 『전국초간주역(戰國楚簡周易)』이 들어있는 것이다. 이 자료들이 아직 충분히 연구되지 못한 상태이기 때문에 이에 관한 단정적 언급이 어렵지만, 『마왕퇴한묘백서주역』은 30여 년의 세월을 거치면서 현재 어느 정도 포괄적 해석이 가능한 상태라 할 수 있다. 『백서주역』의 충격은 우선 64괘의 괘상은 동일하지만 괘명도 부분적으로 다를 뿐 아니라 64괘의 배열순서가 현행본 『주역(周易)』과 전혀 다르다는 것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주역』의 유일정통성을 완전히 파괴시킨 것이다. 그러니까 『백서주역』의 초사(抄寫)시기로 추정되는 문제(文帝)기나 혜제(惠帝)기, 그러니까 전한초기만 해도 『주역』이란 여러 종류의 시스템이 병존했다는 가설을 성립시킨다. 『백서주역』을 살펴보면 현행본 『주역』과 시스템이 완전히 다르지만 임의적인 것이 아니라, 음양의 관념, 건(乾)ㆍ곤(坤)【=천(川). 『백서주역』에는 곤이 천으로 되어있다】의 중요성, 그리고 8괘의 관념, 상ㆍ하 중괘방식(重卦方式)이 그대로 살아있으며, 그 나름대로 매우 치열하게 정제(整齊)된 체제를 과시하고 있다. 그리고 대체적으로 『백서주역』의 체제가 현행 『주역』보다 더 오리지날한 것, 더 오래된 것이라고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지만 그것도 확정지을 수가 없다. 그리고 『백서주역』에는 현행 「계사」 상전 제9장의 「대연지수(大衍之數)」장이 없다. 따라서 현행본의 「대연지수」 운운한 것은 후대의 첨가로서 판결이 나버렸다.
이 두 판본을 둘러싼 많은 세부적 논의를 내가 지금 여기서 다 설명할 수는 없다. 그러나 『백서주역』이 『주역(周易)』이라는 문헌의 성립연대나 『주역』의 원래모습을 확정짓는 데는 결정적 도움을 주지는 못한다. 그러나 『주역』의 경(經)에 해당되는 어떠한 프로토타입의 성립이 그동안 『주역』을 전국말기 문헌으로 간주했던 견해보다는 그 상한선이 상당히 높아지는 것만은 부정할 수 없게 되었다. 더구나 상박초간 속에 들어있는 『주역』 관계문헌이 여태까지 십익(十翼)에 대하여 텍스트 비평을 해왔던 많은 비평가들이 상정한 보다 오리지날한 『주역』의 모습을 과시하고 있기 때문에 『주역』의 핵심부분인 『역경(易經)』 그 자체는 전국 중기 이상으로 소급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상박초간 『역』에는 십익(十翼)은 그림자도 비치지 않는다. 그리고 괘의 심볼(卦畫)과 괘명(卦名)ㆍ괘사(卦辭)ㆍ효사(爻辭)가 일렬로 연접되어 기술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괘획(卦畫)이외로도 흑색과 붉은색으로 표시된 6종의 심볼이 원간(原簡)의 매괘(每卦) 수미(首尾)에 나타나고 있는데, 다산이 사전(四箋)【추이(推移), 물상(物象), 호체(互體), 효변(爻變)】이라고 말하는 어떤 상수학적 상관성을 연상시키나, 그렇게 치밀한 것은 아니고 단지 괘서(卦緖)와 관련있는 것으로 추정할 뿐 아직 확실한 의미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괘명, 괘사, 효사의 내용이 거의 통행본 『주역(周易)』과 일치한다는 것이다. 중국문명의 문헌의 전승의 정밀성이 또 한 번 입증된 셈이다. 십익이 성립하기 이전의 원초적인 『역경』이 BC 300년 이전에 이미 엄존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물리적으로 확고하게 입증된 것이다. 이렇게 되면 문제는 결코 간단치 않다. 효사(爻辭)의 내용도 잘 뜯어보면 고대 중국사회의 풍습을 전하는 것이 많아, 갑골문시대로부터 내려오는 점술사들의 전통 속에서 유명하게 정형화된 말들이 암송되어 전해내려 오다가 어느 시점에 괘상과 결합되었다는 가설도 가능해진다. 결코 역(易)의 전통이 후대의 날조로만 간주할 수 없는 그 무엇이 되고 만 것이다. 그렇다면 결론적으로 여기 『논어』의, 이 공자의 언급도 결코 허황된 얘기로 간주할 수는 없게 되어 버린다.
공자가 여기서 말하고 있는 『역(易)』이 과연 무엇을 지시하고 있는지도 확실치 않다. 그것이 과연 오늘의 『역경(易經)』 텍스트였을까? 그것은 정말 지금 확정적으로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오늘의 많은 출토문헌의 연구결과는 공자의 시대 즈음에도 아직 미확정적이기는 하지만 몇 개의 괘상에 의하여 우주의 삼라만상의 다양한 모습을 담으려는 사유나 어떠한 시도가 있을 수도 있다는 가설은 충분히 성립시킨다. 공자는 그러한 ‘역(易)’의 세계에 대해 미련이 있었다. 그것을 직접 체계화시키지는 못했다 하더라도 어떤 우주론적 구상(cosmological construction)에 대한 직감 같은 것이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죽기 전에 그는 그 우주론적 구상에 대한 어떤 미련을 토로했을 것이다: “아~ 몇 년의 세월만 나에게 더 주어진다면 나는 역(易)을 공부하여 어떤 우주론의 체계를 만들 수도 있을 텐데. 그럼 보다 완정한 인(仁)의 철학을 만들 수도 있을 거야. 그럼 내 인생도 보다 허물이 적은, 앞ㆍ뒤의 일관성이 확립된 전관적(全觀的) 행동을 할 수 있을 텐데. 아~ 아쉽다. 태산은 무너지고 거목은 그냥 이대로 쓰러지고 마는구나!”
유빙군(劉聘君, 1091~1149: 주희의 어릴 적 스승이자 장인)이 원성(元城) 유충정공(劉忠定公, 1048~1125 유빙군의 스승)을 뵈었을 때, 유충정공께서 “일찍이 다른 판본의 『논어』를 읽은 적이 있는데, 거기에는 ‘가(加)’가 ‘가(假)’로 되어있고, ‘오십(五十)’은 ‘졸(卒)’로 되어 있다”라고 스스로 말씀하시는 것을 들은 적이 있었다고 했다. 그리고 유빙군께서 말씀하시기를 대저 ‘가(加)’와 ‘가(假)’는 소리가 서로 비슷하여 오독(誤讀)하기 쉽고, ‘졸(卒)’과 ‘오십(五十)’은 자형이 비슷하여 오분(誤分)하기 쉽다고 하셨다.
劉聘君見元城劉忠定公自言‘嘗讀他『論』, 加作假, 五十作卒. 蓋加, 假聲相近而誤讀, 卒與五十字相似而誤分也.
주희의 장인이며 어릴 적 스승인 유빙군, 즉 유면지(劉勉之)에 관하여 서는 6-24에서 충분히 해설하였다. 여기 나오는 유충정공(劉忠定公) 즉 유안세(劉安世, 리우 안스, Liu An-shi, 1048~1125)는 바로 주희의 장인의 스승이며 송대 유 학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점하는 인물이다. 북송의 사람으로 인종(仁宗) 경력(慶曆) 8년에 태어나 휘종(徽宗) 선화(宣和) 7년에 졸(卒)하였다. 명은 안세, 자는 기지(器之), 시호가 충정(忠定). 하북성 대명부(大名府) 원성(元城) 사람이기 때문에 그를 보통 원성선생(元城先生)이라고 부른다. 속수(涑水)【사마광의 고향이름. 사마광을 보통 속수선생이라고 부른다】의 문인이다. 희녕(熙寧)에 진사가 되었으나 취관(就官)하지 않았다. 후에 사마광의 천거에 의하여 벼슬을 하긴 했지만 바른 말을 잘해 좌천당하고 또 기용되곤 했다. 후에는 정계와의 인연을 끊고, 언행이 일치하고 표리가 상응하는 삶을 살면서 7년을 은거하였고, 원성학파(元城學派)를 창시하였다. 군자와 소인의 준별을 강조하였고, 그는 궁행실천을 학문의 목표로 삼았다. 일장(一丈)을 말하는 것보다 일척(一尺)을 행하는 것이 낫고, 일척 을 말하는 것보다 일촌(一寸)을 행하는 것이 낫다. 그는 성(誠)을 추숭(推崇)하여 배우러 오는 학생들에게 많은 말을 하지 않고 오직 성으로부터 들어가라[由誠入]는 말만 일러주었다고 한다. 그는 학문의 견문이 좁아진 것을 개탄하면서 될 수 있는대로 넓게 공부할 것을 강조했다. 『주역(周易)』도 의리와 상수를 병수(竝修)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유(儒)ㆍ석(釋)ㆍ도(道)ㆍ신(神)이 모두 그 마음은 하나라고 주장하였다[其心皆一]. 그리고 선유(先儒)의 구설(舊說)을 맹목적으로 각수(恪守)하는 것은 매우 어리석은 일이라고 주장하면서 오늘날 말하는 텍스트비평 같은 것의 선구적 작업을 했다. 『춘추』 전의 저자인 좌씨(左氏)가 좌구명(左丘明)일 수가 없으며, 「문언(文言)」은 공자의 작일 수가 없고, 오늘날의 육경(六經)이 옛 모습의 육경일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역사적 사건 들의 모순을 예리하게 지적하였다. 그는 사마광의 학문을 가장 강건(剛健)하게 전한 인물로서 꼽히고 있다. 유빙군은 원성학파의 한 사람이었다. 『송원학안(宋元學案)』 「원성학안(元城學案)」에 그의 기사가 있다.
여기 주희의 주석에 인용되고 있는 유충정공의 말도 그의 문헌비평적 관심을 보여준다. 주희의 주석이 아주 애매하게 되어 있어서 ‘자언(自言)’의 주체가 누구인지도 잘 모르게 되어 있다. 전후맥락으로 보아 유빙군의 말이라기보다는 유충정공의 말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유충정공의 말은 ‘오십작졸(五十作卒)’에서 끝난다. 그 다음은 유빙군이 덧붙인 것이다. 여기 주희가 20세 미만의 어린 시절에 장인에게 들었던 말을 옮겨놓은 것이다.
나 주희는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이장의 말은 『사기(史記)』 「세가」에도 다음과 같이 적혀있다: ‘나에게 몇 년을 더 빌려준다면, 지금 공부하는 대로 계속 더 해나가면 나는 『역』에 있어서는 완미(完美)한 수준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가아수년(假我數年), 약시(若是), 아역즉빈빈의(我於易則彬彬矣)].’【이 앞에 ‘독역위편삼절(讀易韋編三絶)’의 이야기가 있다】. 『사기(史記)』에는 ‘가(加)’는 곧 ‘가(假)’로 되어있고, ‘오십(五十)’이라는 글자는 없다. 대저 이때 공자의 나이가 70에 가까웠다. 그러니 ‘오십(五十)’이라는 글자가 오류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역』을 배우게 되면 길흉소장의 우주적 이치와 진퇴존망의 인간의 길에 관하여 명백히 알게 되므로, 그래서 ‘큰 허물이 없을 것이다’라고 말한 것이다. 대저성인께서는 『역』도의 무궁한 경지를 깊게 통찰하시고 이 말을 하심으로써 사람들을 가르치려 하셨다. 그리고 노경의 이 말은 사람은 모름지기 끊임없이 배우지 않을 수 없는 존재이며 또 모든 것을 쉽게 배워서도 안 된다는 것을 깨우치려 하신 것이다
愚按: 此章之言, 『史記』作“假我數年, 若是我於易則彬彬矣”. 加正作假, 而無五十字. 蓋是時, 孔子年已幾七十矣, 五十字誤無疑也. 學『易』, 則明乎吉凶消長之理, 進退存亡之道, 故可以無大過. 蓋聖人深見『易』道之無窮, 而言此以敎人, 使知其不可不學, 而又不可以易而學也.
주희의 주석이 명료하다. 의고풍이 강했던 지난 세기만 해도 이런 멘트는 비판의 대상이었지만 오히려 21세기에는 리얼하게 들린다. 공자를 인간적으로 발굴하는 데 21세기와 같은 호조건은 없다. 공자가 죽은 이래 공자를 느낄 수 있는 최대의 자료, 갑골문으로부터 상박초간에 이르기까지의 방대한 자료가 구비된 시기라고 할 것이다. 이제 우리는 살아있는 ‘동네 아저씨’처럼 공자를 느낄 수 있게 된 것이다. 격동하는 사상의 홍류 속에서 뚜렷한 자기 칼라를 창 출한 인물이었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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