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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철학 삶을 만나다, 제3부 삶을 위한 철학적 성찰 - 2장 즐거운 주체로 살아가기, 니체가 칸트를 공격했던 이유 본문

책/철학(哲學)

철학 삶을 만나다, 제3부 삶을 위한 철학적 성찰 - 2장 즐거운 주체로 살아가기, 니체가 칸트를 공격했던 이유

건방진방랑자 2021. 6. 29. 2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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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가 칸트를 공격했던 이유

 

 

칸트에 따르면 일체의 외적인 간섭 없이 도덕법칙을 구성하고 그것에 복종할 수 있을 때 우리는 주체, 즉 주인이 됩니다. 그래서 그는 도덕 주체야말로 자유로운 주체라고 이야기했던 것입니다. 자기가 만든 도덕법칙을 스스로 따르는 것은, 분명 타인이 만든 도덕법칙을 타율적으로 따르는 것과는 다른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가 만든 도덕법칙이 초자아로부터 기원한 것이라면, 이야기는 전혀 달라질 겁니다. ‘자율을 가장한 타율혹은 자발적 복종이란 기이한 논리가 출현하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장씨 부인의 경우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초자아의 명령은 나의 내면에서 일체의 외적인 간섭 없이 작동합니다. 따라서 초자아의 명령을 듣는 것은 나의 자율적인 명령을 듣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장씨 부인은 자신의 두 번째 선택을 자율적인 것이라고 착각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장씨 부인의 선택이 프로이트가 말한 초자아의 명령에 대한 자발적 복종에 지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녀가 자신의 두 번째 선택을 어머니에게 털어놓은 것은 매우 상징적인 의미를 갖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초자아란 부모를 매개로 해서 공동체의 규칙이 우리 내면에 내재화된 것이 아닙니까? 그녀는 이제 내면화된 어머니에게 복종하기로 결정하고, 그것을 바깥에 있는 실제 어머니에게 알려주는 것입니다. 결국 내면화된 어머니와 바깥의 실제 어머니가 화해를 한 셈이지요. 어떤 구체적인 외적 강요가 없었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이미 과거에 이루어진 간섭과 강요의 흔적들을 가지고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따라서 진정한 주체가 되려고 할 때, 외적인 간섭을 단순히 거부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주체란 내면화된 공동체의 규칙, 즉 초자아를 거부할 수 있을 때에만 비로소 가능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니체가 주체에 대한 칸트의 논의를 철저하지 못한 것으로 공격했던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인간이 존재하는 한, 어느 시대든지 무리를 이룬 인간 집단 역시 존재했으며 (씨족 연합, 공동체, 부족, 민족, 국가, 교회), 언제나 소수의 명령하는 자에 비해 복종하는 사람들이 대단히 많았다. ‘복종이란 지금까지 인간들 사이에서 가장 잘 그리고 가장 오랫동안 훈련되고 훈육되어온 것이라는 사실을 고려하면, 이제 당연히 각 개인은 평균적으로 일종의 형식적인 양심으로서, "너는 어떤 것을 무조건 해야만 하고, 또 어떤 것을 무조건 해서는 안 된다고 명령하는 것, 즉 간단히 말해 너는 해야만 한다고 명령하고자 하는 욕구를 타고났다고 전제해도 좋을 것이다. 이런 욕구는 항상 만족하고자 하며 형식을 내용으로 채우고자 한다. 이때 그것은 자신의 강함, 성급함, 긴장에 따라 왕성한 식욕처럼 닥치는 대로 손을 뻗치며, 그 어떤 명령자 - 부모, 선생, 법률, 신분 상의 편견, 여론의 말이라도 귀에 들어오는 즉시 받아들인다.

선악의 저편(Jenseits von Gut und Böse)

 

 

이것은 니체만의 고유한 사유 방식, 계보학적인(genealogical)’ 사유의 구체적 내용이 될 수 있을 겁니다. 니체가 계보학적으로 사유했다는 평가는 그의 유명한 도덕의 계보학에 대하여(zur Genealogie der Moral)라는 책의 막대한 영향력 때문에 생겼습니다. 계보학적인 사유는 어떤 주어진 것을 정당화하기보다 그것의 기원이나 발생 과정을 추적하는 사유 방식입니다. 마치 어떤 사람이 태어났을 때 그 사람의 부모나 선조들을 추적하는 것처럼 말이지요. 따라서 도덕의 계보학이란 인간이 도덕적 존재라는 현실을 정당화하는 작업이 아니라, 인간의 도덕이 어떤 발생 과정을 거쳐서 생기게 되었는지를 해명하는 작업입니다. 이 때문에 니체는 프로이트의 진정한 선배라고 말할 수도 있는 사람입니다. 프로이트도 초자아를 정당화하기보다 어떻게 해서 우리에게 초자아가 내재하게 되었는지를 해명하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이 점에서 우리는 장씨 부인 혹은 칸트에게 결여된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니체 그리고 프로이트와는 달리 역사성사회성의 문제를 전혀 숙고하지 않는다고 할 수 있지요. 어떻게 해서 자신이 선택을 하게 되었으며, 그 선택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알려면 장씨 부인은 자신이 어떤 역사와 사회의 산물인지를 이해할 필요가 있었다는 말입니다. 물론 칸트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니체는 형식적인 양심의 발생 과정을 추적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형식적인이라는 표현이 매우 중요합니다. 이로부터 우리는 그의 표적이 누구인지를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형식적이라는 표현은 칸트가 자신의 정언명령에서 이야기했던 보편적 입법의 원리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마음속에서 양심, 즉 보편적 입법자의 소리를 들어본 적이 있습니까? 예를 들어 길에 떨어진 지갑을 주웠다고 해봅시다. 이 경우 우리의 내면에서는 두 가지 욕구가 꿈틀거립니다. ‘어차피 다른 사람이 주웠다고 해도 지갑을 돌려주지는 않을 거야. 애초에 잃어버린 사람의 잘못이지 뭐라고 속삭이는 욕구가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만약 누군가가 너의 지갑을 땅에서 주워서 너에게 돌려주지 않는다면, 너는 그 사람을 원망하지 않겠니? 지갑을 잃어버린 사람이나 너나 모두 지갑을 돌려받기를 원하지 않을까? 그러니 너는 주운 지갑을 주인에게 돌려줘야 해라고 말하는 욕구도 있습니다. 바로 이 후자가 보편적 입법자의 목소리입니다.

 

장씨 부인이 자신의 선택을 자율적인 선택이라고 믿었던 것처럼, 칸트도 이런 양심의 명령을 실천이성의 자율적인 목소리라고 정당화합니다. 그러나 니체는 이것을 당연한 것으로 정당화하지 않았습니다. 그에게 있어 이런 양심의 목소리는 훈육의 결과로 인간에게 내면화된 것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칸트에 대한 니체의 계보학적 비판은 다음과 같은 예로 간단히 설명될 수 있을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에게 어린아이가 하나 있다고 해봅시다. 그런데 이 아이는 자신의 방을 항상 지저분하게 만들어버리는 습관이 있습니다. 이때 우리는 그 아이에게 명령합니다. ‘방을 깨끗이 치워야 해, 절대 더럽혀서는 안 돼!’ 그러나 이런 명령은 여러분의 소망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지, 아이의 소망은 결코 아닐 겁니다. 아쉽게도 아이는 계속 자신의 방을 정돈할 줄 모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이제 어떻게 하겠습니까? 회초리를 써서 아이를 호되게 혼낼 수도 있고, 아니면 다시 한번 진지하게 타이를 수도 있겠지요. 이렇게 할 수 있는 것은 물론 여러분이 그 아이에 비해 강자이기 때문이란 점도 중요한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런 훈육의 과정을 거듭하다보면 놀랍게도 그 아이의 내면에 방을 깨끗이 치워야 해, 절대 더럽혀서는 안 돼라는 명령이 각인됩니다. 마침내 이 아이는 어느 순간 여러분이 더는 강제로 시키지 않아도 스스로 방을 치우게 됩니다. 이제 아이는 외면의 명령을 듣기보다 자기 내면의 명령을 듣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아이는 이처럼 자신이 자율적으로 방을 치우게 된 기원 자체를 망각하게 됩니다. 다시 말해 아이는 자신이 방을 청소하는 것은 부모님의 강압적인 명령 때문이 아니라 자신이 원해서라고 생각하게 된다는 말이지요. 흥미로운 것은 이제 아이가 방을 깨끗이 치워야 해라는 명령을 일종의 선천적 욕구인 것처럼 느끼게 된다는 점입니다. 만약 불가피한 사정이 생겨서 자기 방을 정돈하지 못하면, 마치 배가 고프지만 음식을 먹지 못하는 경우처럼 이 아이 역시 일종의 불만족과 불쾌감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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