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거운 주체로 살아가는 방법
대학에 입학하기 위해서 고등학교 생활 자체를 수단으로 만드는 고등학생들이 있습니다. 또 취업이란 숭고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대학 생활 자체를 수단으로 만드는 대학생들이 있습니다. 또 월급을 받기 위해서 한 달의 삶을 수단으로 만들고 마는 직장인들이 있습니다. 물고기 한 마리를 얻기 위해 물 위로 솟구치는 놀이 공원의 돌고래처럼 살아간다면 과연 우리의 삶은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수단과 목적이 분리되었을 때, 우리의 삶은 불행, 우울, 슬픔으로 점철되기 마련입니다. 물로 목적이 달성되는 아주 짧은 순간에는 일말의 행복과 즐거움을 느낄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우리가 지속적인 즐거움과 행복의 상태에 있으려면 과연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 방법은 바로 수단과 목적의 일치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이 점과 관련해 우리는 네덜란드의 위대한 문화사가인 호이징하(J. Huizinga, 1872~1945)【호이징하는 네덜란드 출신으로 그로닝겐대학과 라이덴대학의 역사학과 교수를 지냈으며 중세와 르네상스 시기를 주로 연구했다. 그의 역사 연구 방법론은 후에 인간의 심성 내용을 주로 연구했던 프랑스 아날학파의 연구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특히 그의 놀이에 관한 연구는 현대 문명을 비판적으로 성찰할 수 있는 통찰을 제공하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주요 저서로 『호모 루덴스』, 『중세의 가을』 등이 있다】의 이야기를 경청할 필요가 있을 겁니다. 그는 ‘놀이’에서 수단과 목적의 일치라는 테마를 찾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선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모든 놀이가 자발적인 행위라는 점이다. 명령에 의한 놀이는 이미 놀이가 아니다. 기껏해야 놀이의 억지 흉내일 뿐이다. 자유라는 본질에 의해서만이 놀이는 자연의 진행 과정과 구분된다. (……) 어른이나 책임이 있는 인간들에게 놀이는 도외시하여도 무관한 기능이다. 놀이는 여분의 것이기 때문이다. 놀이에 대한 욕구는, 즐거움이 놀이하기를 원하는 한에서만 절실해진다. 놀이는 언제고 연기될 수도 있고 중지될 수도 있다. 왜냐하면, 놀이는 물리적 필요가 도덕적 의무로 부과되는 것이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 놀이는 임무가 전혀 아니다. 『호모 루덴스(Homo Ludens)』
보통 수단‘과 ‘목적’이 분리된 행동을 ‘노동’이라고 말합니다. 반면 ‘수단’과 ‘목적’이 일치되는 행동을 ‘놀이’라고 부릅니다. 노동의 경우 행복은 목적을 달성했을 때에만 찾아옵니다. 예를 하나 들어보지요. 어린아이가 부모를 따라 바닷가로 피서를 갔다고 해봅시다. 해가 뜨자마자, 이 아이는 플라스틱 삽과 그릇들을 가지고 바닷가로 달려갑니다. 그러고는 모래성을 만들며 한껏 즐거워하지요. 왜 이 아이는 쉬지 않고 모래성을 만드는 것일까요? 그리고 왜 이 아이는 이 행위로 인해 절로 즐거워하는 것일까요?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아이가 모래성을 만들려고 한 것이 본인의 자유로운 선택, 즉 진정한 자유로부터 가능했다는 점입니다. 누구도 그것을 강제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모래성을 만드는 것을 칭찬하지도 특별한 대가를 주지도 않았습니다. 이 아이에게 모래성을 만드는 행위는 즐거움의 수단이면서 동시에 목적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다른 주변 사람들의 시선과는 관계없는 그 아이 자신만의 즐거움이기도 하지요.
호이징하에 따르면 놀이는 수단과 목적의 일치 그리고 자유, 즐거움, 행복이라는 여러 규정을 동시에 함축하고 있는 행동입니다. 놀이의 성격을 명확히 하기 위해서 다른 사례를 하나 들어보도록 하지요. 우리는 모래성을 만드는 놀이를 변질시켜 하나의 고된 노동으로 만들 수도 있습니다. 이제 그 어린아이와 함께 피서지에 도착한 어머니의 경우를 주목해봅시다. 그녀는 아침이 되자 텐트에서 자고 있는 아이를 흔들어 깨웁니다. 그러고는 이렇게 말하지요. “바닷가에 가서 모래성을 열 개 만들어. 안 그럼 너 오늘 아침밥 굶는다.” 이제 아이에게 모래성을 만드는 것이 ‘수단’이 되고 밥을 먹는 것이 ‘목적’이 됩니다. 이 경우 모래성을 만드는 것이 이전처럼 아이에게 즐거움과 행복을 가져다줄 수 있을까요? 결코 그렇지 못할 겁니다. 이제 이 행위는 놀이가 아니라 강제된 노동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아이의 즐거움과 행복은 밥을 먹는 그 짧은 순간에나 찾아오겠지요. 그래서 호이징하는 놀이가 결코 ‘도덕적 의무’나 ‘임무’여서는 안 된다고 이야기했던 것입니다.
호이징하 덕분에 이제 우리는 자유가 근본적으로 행복과 즐거움으로 연결될 수 있어야만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수단과 목적의 일치만이 이런 행복과 즐거움을 가져다준다는 점도 그로부터 배우게 됩니다. 따라서 진정한 주체는 자유로운 주체여야 하지만, 또한 동시에 즐거운 주체이기도 해야 합니다. 주체가 즐겁지 않다는 것은 모순된 표현에 불과한 것이니까요.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니체는 칸트의 윤리학을 공격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칸트에게는 절름발이 주체, 절름발이 자유만이 가능했기 때문입니다.
▲ 앙리 마티스의 춤(1910)
여러분은 우울한 주체가 아닌 즐거운 주체, 그리고 자발적 복종이 아닌 행복한 자유를 얻고 싶지 않습니까? 여기서 우리는 니체가 제안하는 참된 주체, 즉 즐거운 주체가 되는 방법을 엿볼 필요가 있습니다. 물론 그가 우리에게 권하는 방법은 칸트의 정언명령과는 확연히 다른 것이겠지요. 충실한 니체주의자였던 들뢰즈의 설명을 통해 니체의 이야기를 들어봅시다.
법칙에 대한 증오와 운명애(amor fati), 공격성과 동의는 차라투스트라의 두 얼굴이다. 성서에 호의적이고 다시 성서를 적대시하는 차라투스트라, 그는 여전히 특정한 방식으로 칸트와 싸우고 있다. 도덕법칙 안에 있는 반복(répétition)의 시험을 두고 경쟁하는 것이다. 니체의 영원회귀(éternel retour)는 이렇게 말한다. “네가 무엇을 의지하는 그것의 영원회귀를 의지하는 방식으로 그것을 의지하라.” 이것은 칸트류의 형식주의이지만, 칸트를 그의 고유한 영토에서 전복해버리는 형식주의이다. 여기에 (칸트의 명령법이 함축하는 시험보다) 더 멀리에까지 이르는 시험이 있다. 이는 미리 가정된 어떤 도덕법칙에 반복을 결부시키는 대신, 도덕을 넘어서는 어떤 법칙에 반복을 결부시키기 때문이다.
『차이와 반복(Différence et Répétition)』
칸트는 우리에게 어떤 행위를 할 때 보편적 입법자인 것처럼 행동하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니체는 보편적이라고 생각했던 입법이 결코 보편적이지 않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법칙에 대한 증오’를 언급한 것입니다. 니체의 논의를 알기 쉽게 설명하기 위해서 장씨 부인이 세운 보편적 도덕법칙의 내용을 다시 생각해보지요. 그녀는 자신의 학문 활동을 접고 봉건사회의 가치 규범을 수용하기로 결정할 때 다음과 같이 생각합니다. “이어지는 세상이 없다면 무엇을 남긴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아니 그 이상, 아내로서 이 세상을 유지하고 어머니로서 보다 나은 세상을 준비하는 것보다 더 크고 아름다운 일이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만약 장씨 부인이 현재의 우리 사회에서 태어났다면 이런 도덕법칙을 세울 수 있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녀는 아마 자신의 학문 활동을 계속 영위하려고 계획할 것입니다. 다시 말해 그녀에게 어머니와 아내로서의 역할은 중요하지만 부차적인 것으로 바뀔 수 있다는 것이지요. 오늘날 많은 여성이 바로 이런 이유로 다양한 전문 직종에서 능력을 발휘하고 있고 또 그럴 수 있길 기대한다는 점을 부인할 수는 없을 겁니다.
니체는 ‘법칙에 대한 증오’를 이야기하지만, 동시에 ‘운명애’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주어진 삶의 조건을 숙명으로 받아들이고 체념하자는 의미가 결코 아닙니다. 만약 이런 뜻이라면 이것은 도리어 ‘법칙에 대한 수용’이라고 불려야 하겠지요. 니체의 운명에는 영원회귀라는 그의 개념과 밀접히 연결되어 있습니다. 영원회귀라는 말은 말 그대로 영원히 반복되는 세계와 삶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의 삶과 세계는 주기적으로 똑같이 반복된다는 것이지요. 예를 들어봅시다. 내가 1000년 뒤 다시 똑같은 나로 똑같은 이 세상에서 살아가게 된다고 가정해봅시다. 물론 오늘의 세계나 나도 이미 1000년 전에 있었던 똑같은 세계와 나 자신일 뿐입니다. 이렇게 1000년 주기로 모든 것이 똑같이 반복된다고 생각해봅시다. 내가 오늘 어떤 책을 읽고 있다면, 1000년 전에도, 2000년 전에도 나는 똑같은 책을 읽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또 1000년 뒤에도, 2000년 뒤에도 나는 똑같은 책을 읽게 되겠지요.
만약 영원회귀가 옳다면 여러분은 과연 앞으로 어떻게 행동하겠습니까? 우울하고 불행한 일들, 어쩔 수 없이 의무적으로 해야만 하는 행동을 하겠습니까? 그것이 영원히 반복되는데도 말입니다. 타인의 강압에 비겁하게 굴종하겠습니까? 이런 굴종이 1000년 뒤에도, 2000년 뒤에도 똑같이 반복될 것인데도요? 아마 여러분은 가장 자유로운 행동, 가장 즐거운 행동, 가장 행복한 행동을 하려고 애쓸 겁니다. 그런 행동은 앞으로 영원히, 다른 삶에서도 반복될 행동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니체는 ‘네가 무엇을 의지하는 그것의 영원회귀를 의지하는 방식으로 그것을 의지하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니체가 말했던 ‘운명애’의 내용입니다. 니체의 묘수풀이는 사실 우리가 1000년 전에 자신이 어떤 행동을 했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알 수 없다는 데 있습니다. 바로 이 점이 ‘운명애’를 주어진 삶의 조건에 대한 체념이나 굴종으로 만들지 않는 힘이라고 말할 수 있지요. 단지 우리가 아는 것은 지금 나의 이 행동이 앞으로 영원히 반복될 것이라는 사실뿐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어떤 행동을 선택하든지 간에, 그것은 영원한 것이 될 겁니다. 이 점에서 그의 운명애는 미래로, 긍정으로, 행복으로 열려 있고, 우리를 즐거운 주체로 만들 수 있는 중요한 정언명령으로 불릴 수 있겠지요.
인용
'책 > 철학(哲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철학 삶을 만나다, 제3부 삶을 위한 철학적 성찰 - 3장 타자에 대한 우리의 태도, 내가 원하는 것과 타자가 원하는 것 (0) | 2021.06.29 |
---|---|
철학 삶을 만나다, 제3부 삶을 위한 철학적 성찰 - 2장 즐거운 주체로 살아가기, 더 읽을 책들 (0) | 2021.06.29 |
철학 삶을 만나다, 제3부 삶을 위한 철학적 성찰 - 2장 즐거운 주체로 살아가기, 불행한 주체와 행복한 주체 (0) | 2021.06.29 |
철학 삶을 만나다, 제3부 삶을 위한 철학적 성찰 - 2장 즐거운 주체로 살아가기, 니체가 칸트를 공격했던 이유 (0) | 2021.06.29 |
철학 삶을 만나다, 제3부 삶을 위한 철학적 성찰 - 2장 즐거운 주체로 살아가기, 이문열의 칸트적 ‘선택’ (0) | 2021.06.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