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권위 있는 말은 고쳐야 하고 칭찬의 말은 실마리를 찾아야 한다
9-23.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법에 따라 해주는 권위있는 말은, 따르지 않을 수 있겠느뇨? 자신의 잘못을 고치는 것이 귀하니라. 귀에 거슬림이 없는 부드러운 말은, 기쁘지 않을 수 있겠느뇨? 왜 칭찬을 받는지 그 실마리를 캐어보는 것이 귀하니라. 기뻐하기만 하고 그 실마리를 캐어보지도 않고, 따르기만 하고 자신의 잘못을 고치지 않는 사람들은, 내가 과연 해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이 있겠느뇨?” 9-23. 子曰: “法語之言, 能無從乎? 改之爲貴. 巽與之言, 能無說乎? 繹之爲貴. 說而不繹, 從而不改, 吾末如之何也已矣.” |
‘법어지언(法語之言)’과 ‘손여지언(巽與之言)’의 정확한 뜻에 관해서는 주석가들의 의견이 엇갈린다. ‘법어지언’은 권위있는 교훈일 것이다. ‘손여지언’은 칭찬의 말이다. 마지막 말은 ‘그런 놈들은 어찌해볼 도리가 없다, 내가 상대할 가치가 없다’는 뜻이다.
‘법어(法語)’라고 하는 것은 제대로 된 바른 말이다. ‘손언(巽言)’이라고 하는 것은 완곡하게 돌려서 나를 이끌어주는 말이다. ‘역(繹)’이란 그 실마리를 찾는 것이다. 법언(法法)이란 사람들이 공경하고 또 두려워하는 말이니 반드시 따라야 할 것이다. 그러나 따르기만 하고 자기의 잘못을 고치지 않는다면 면(面從: 체면치레로 따르는 척만 하는 것)하는 것일 뿐이다. 손언(巽言)은 어긋나거나 거슬리는 것이 없으니 마음이 반드시 기쁠 것이다. 그러나 내가 왜 칭찬을 받는지 그 실마리를 캐어보지 않는다면 그 은미(隱微)한 뜻의 소재를 알 길이 없을 것이다.
法語者, 正言之也. 巽言者, 婉而導之也. 繹, 尋其緖也. 法言人所敬憚, 故必從; 然不改, 則面從而已. 巽言無所乖忤, 故必說; 然不繹, 則又不足以知其微意之所在也.
○ 양중립이 말하였다: “법언(法言)이라고 하는 것은 맹자가 왕도의 정치를 행할 것을 논구하는 따위의 말일 것이다. 손언(巽言)이라고 하는 것은 맹자가 재화를 좋아하고[好貨], 여색을 좋아하는 것[好色]을 논구한 따위의 말들일 것이다. 말해주어도 통달하지 못하거나, 혹은 그 말을 거절하고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오히려 괜찮다. 그러다가 깨달을 수도 있는 것이고, 그러다가 거의 자기 허물을 고치고 행동의 실마리를 캐는 데에 이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따르기만 하고 기뻐하기만 하면서 자기의 잘못을 고치지도 않고 자기 기쁨의 실마리를 캐지도 못하면, 영영 잘못을 고치지도 못하고 실마리도 캐지 못하는 인간이 되어버리고 마는 것이다. 비록 성인이라 할지라도 그런 사람들을 어찌하겠는가!”
○ 楊氏曰: “法言, 若孟子論行王政之類是也. 巽言, 若其論好貨ㆍ好色之類是也. 語之而未達, 拒之而不受, 猶之可也. 其或喩焉, 則尙庶幾其能改繹矣. 從且說矣, 而不改繹焉, 則是終不改繹也已, 雖聖人其如之何哉?”
여기 ‘따르기만 하고 기뻐하기만 한다’는 것은 대표적 표본이 종교에 복속하는 인간이다. 종교도 결국은 인간과 인간세의 개선을 위한 것인데, 종교의 질곡은 ‘맹종’을 강요한다는 데 있다. 맹종을 강요하는 모든 종교는 사교이다. 종교를 따르는 자라 할지라도 끊임없이 자신의 허물을 고치면서 신앙의 본질을 캐어묻고 따져봐야 하는 것이다. 맹종의 강요라는 측면에서는 이슬람이 가장 많은 반성을 해야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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