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한계에 이르러야만 가치를 알게 되는 것들
9-27.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날씨가 추워진 연후에나 소나무와 잣나무가 시듦을 견디어내는 모습을 알 수 있도다.” 9-27. 子曰: “歲寒, 然後知松柏之後彫也.” |
‘세한(歲寒)’은 일년 중 추운 계절, ‘송백(松柏)’은 상록침엽수, ‘후조(後彫)’는 문자 그대로는 ‘늦게 시든다’는 의미이지만, 강조가 ‘시든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시들지 않는다’는 데 있다. 그래서 나는 ‘시듦을 견디다’로 번역하였다. 그런데 고주는 이와는 다른 해석을 내리고 있다. ‘세한’을 매년 다가오는 겨울로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모처럼 다가온 특별한 해의 추위로 해석하는 것이다. 중목(衆木)은 극심한 추위로 다 시들고 얼어죽고 마는데, 송백만은 조금 시들고 만다는 식으로 해석했다.
대한(大寒)의 해에는 중목은 다 죽어버리고 만다. 그때야 비로소 송백이 약 간 시들거나 다치고 마는 강건함을 볼 수 있다. 평년에는 중목 또한 죽지 않고 멀쩡한 놈들도 있다. 그러므로 반드시 대한의 겨울추위를 기다려봐야 식별이 되는 것이다. 비유컨대, 범인도 안정된 치세(治世)에 처해서는 몸버리지 않는 온전한 삶을 살 수도 있어 군자와 별로 구분이 되질 않는다. 그러나 어지러운 탁세(濁世)에 처하게 되면 군자의 올곧고 구차스럽지 않은 모습이 돋보이는 것이다.
大寒之歲, 衆木皆死. 然後知松柏之小凋傷. 平歲則衆木亦有不死者, 故須歲寒而後別之. 喩凡人處治世, 亦能自修整, 與君子同. 在濁世, 然後知君子之正, 不尙容也.
이것 또한 공자의 귀로 후의 말년 탄성일 것이다. 14년 유랑길의 환난을 겪고 났을 때, 변절하고 나자빠지는 온갖 종류의 인간을 바라보면서도 꿋꿋하게 자기 길을 걸어온 자신과 주변 몇몇 제자들의 모습을 송백에 비유했을 것이다.
범순부가 말하였다: “소인도 태평성세에 있어서는 군자와 다름이 없게 보일 수도 있다. 이해(利害)에 닥치고, 사변(事變)을 만난 연후에나 군자가 지켜가는 절개를 엿볼 수 있다.”
范氏曰: “小人之在治世, 或與君子無異. 惟臨利害, 遇事變, 然後君子之所守可見也.”
사현도가 말하였다: “선비가 궁한 데 처해야 그 절의(節義)가 돋보이고, 세상이 어지러워야 충신(忠臣)이 식별된다. 학문에 뜻을 두는 자는 반드시 그 마음을 보편적인 기준에 맞추어 덕을 함양해야 한다.”
○ 謝氏曰: “士窮見節義, 世亂識忠臣. 欲學者必周於德.”
내가 평소 느끼는 문제인데 후학들을 위하여 꼭 해주고 싶은 말이 있 다. 우리나라에서는 ‘한학’하면 꼭 마치 그것이 옛 서당에서 공부하는 식으로 해야만 권위가 있는 것처럼 착각하는데, 서당교육은 그 나름대로 고루한 습벽이 있고 제대로 된 한학의 전통은 이미 다 끊겨버린 지 오래다. 복문(複文)에 있어서 구독점을 찍을 때, 우리나라에서 ‘한학’을 한다하는 사람들이 꼭 ‘고(故)’나 ‘연후(然後)’ 같은 접속사(중국어문법에서는 연사라고 부른다)를 상문(上文)의 말미에 붙이는 고루한 습벽이 있다. 이것은 전혀 정당성이 없는 잘못된 습벽일 뿐이다. 접속사는 반드시 하문(下文)에 붙여 읽어야 한다. 학문은 보편성이 있어야 한다. 구두점은 이미 세계적으로 통용되는 규칙이 있다. 모든 접속사는 뒤에 오는 종속문을 리드하는 것이므로 그것이 상문에 붙어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 ‘…하는 고로’는 우리말의 버릇일뿐이다. 반드시 그것은 ‘…이다. 그러므로 …’로 끊어 읽어야 한다. ‘…한 연후’가 아니라 ‘…이다. 그 후에 …’로 인식되어야 한다. 한문은 우랄알타이어족의 우리말이 아니며 어디까지나 한장어족에 속하는 고전중국어(Classical Chinese)일 뿐이다. 한학을 한다 하는 한국의 젊은 학도들이여! 고루한 옛 습벽에서 벗어나시기를!
본 장의 내용은 한국인들에게 매우 친숙한 인연이 하나 있다. 우리나라 국보 제180호, 완당(阮堂)의 「세한도(歲寒圖)」가 바로 이 장의 공자의 말씀을 주제로 해서 그린 선말(鮮末)의 대표적 문인화이기 때문이다. 추사는 윤상도(尹商度, 1768~1840)의 옥사에 연루되어 1840년부터 1848년까지 9년간 제주도에서 귀양 살이를 한다. 「세한도」는 이 시기에 그려진 것이다. 지위와 권력을 다 박탈당하고 있는 추사에게 역관(譯官)으로서 중국을 왕래하던 제자 이상적(李尙迪, 1804~1865)은 자기의 스승을 잊지 않고 제주도로 2차에 걸쳐 책을 보낸다.
제1차(1843년)에 보낸 책은 다음의 2종이다.
1. 계복(桂馥, 1736~1805)의 『만학집(晩學集)』
청나라 공자 고향 곡부(曲阜)사람으로 자는 동훼(東卉), 호는 미곡(未谷). 건륭의 진사(1790). 문자학에 정통한 인물이었다.
2. 운경(惲敬, 1757~1817)의 『대운산방문고(大運山房文藳)』
운경은 강소성 무진현(武進縣) 양호(陽湖)의 사람으로 자는 자거(子居), 호는 간당(簡堂), 건륭의 거인(擧人), 고문(古文)에 정통.
그리고 다음해 헌종 10년(1844)에 방대한 한 질을 또 보낸다.
3. 하장령(賀長齡, 1785~1848)이 편(編)한 『황조경세문편(皇朝經世文編)』120권
하장령은 선화(善化, 지금 호남성 장사長沙) 사람으로, 자가 우경(耦耕), 호는 서애(西涯), 설결수(齧缺叟), 만호는 내암(耐菴). 가경(嘉慶)의 진사. 경세치용(經世致用)의 학문을 중시하였다. 『문편』은 청조의 경세(經世)에 관한 글을 모은 것인데, 학술(學術)ㆍ이정(吏政)ㆍ호정(戶政)ㆍ예정(禮政)ㆍ병정(兵政)ㆍ형정(刑政)ㆍ공정(工政)의 칠류(七類)로 분류하였다.
그러니까 이 책들은 모두 당대 중국의 선진문명을 전하는 청나라의 사람들의 신학문 성과였으며, 제주도에 귀양 가있는 완당으로서는 눈물겨웁게 고마운 일이었다.
작년에는 『만학집』 『대운산방문고』 두 책을 보내오더니, 올해는 또 다시 우경의 『황조경세문편』 120권을 보내왔다. 이것은 참으로 세상의 흔한 일 이 아니다. 천만 리 떨어진 곳에서 사온 것이고, 햇수로도 수년을 걸려 겨우 얻은 것이니, 이것은 일시에 가능했던 일도 아니었다.
去年以晚學大雲二書寄來, 今年又以藕耕文編寄來. 此皆非世之常有, 購之千萬里之遠, 積有年而得之, 非一時之事也.
「세한도」의 발문은 이렇게 시작하고 있다. 제자 이상적의 인품을 날씨가 추워진 후에야 뒤늦게 낙엽 지는 소나무와 잣나무의 지조에 비유하여 그에게 답례로 그려준 그림이 바로 이 「세한도」인 것이다. 세상이 온통 권세와 이득을 쫓아 아부하는 풍조로 가득찬 지금, 바다 멀리 초췌하게 시들어 있는 사람[蕉萃枯稿之人]에게 꼭 권력자에게 아부하는 듯 열심히 책을 구해 보내주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말한다.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날씨가 추워진 연후에나 송백이 늦게 시듦을 안다”고 하시었다. 송백은 본래 사계절이 없이 시들지 않는 것이다. 세한 이 전에도 그것은 송백이요, 세한 이후에도 그것은 송백이다. 그런데도 성인께서는 특별히 추워진 이후의 송백을 칭송하시었다. 그대는 나에게 있어서는 예전에도 특별히 잘한 것이 없었고 지금에도 특별히 못한 것이 없는 항 상스러운 송백과 같은 존재였다. 예전의 그대는 덤덤히 넘어갈 수 있겠으나, 지금의 그대는 참으로 성인의 칭송을 받을 만하지 않겠느뇨! 성인께서 추워진 이후의 송백을 특칭하신 것은 시듦을 견디어내는 송백의 강인한 지조와 절개만을 그냥 말씀하신 것은 아닐 것이다. 아마도 추워져가기만 하는 세월에 대하여 느끼시는 바 있어 발한 탄성일 것이다.
孔子曰: “歲寒, 然後知松柏之後凋” 松柏是毋四時而不凋者. 歲寒以前 一松柏也, 歲寒以後一松柏也. 聖人特稱之於歲寒之後. 今君之於我由前 而無加焉, 由後而無損焉. 然由前之君無可稱, 由後之君亦可見稱於聖人 也耶! 聖人之特稱, 非徒爲後凋之貞操勁節而已. 亦有所感發於歲寒之時 者也.
세한도를 바라보면 우선(藕船) 이상적의 절개와 인품을 나타낼 수도 있지만 발문 속에 쓰여진 그대로 초췌 고고하게 다 빼앗기고 앙상한 가지만 남아있으면서 고결한 생명력을 유지하는 자신의 모습을 그렸을 수도 있다. 더구나 예산고택에 가보면 그와 비슷한 백송고목이 있어 그러한 정취를 더욱 실감나게 한다.
어린 추사의 심상에 그런 모습이 투영되었을지도 모른다. 긴 화면에 집 한 채, 그 좌우로 소나무와 잣나무가 두 그루씩 대칭을 이루며 지극히 간략히 묘사되어 있고 나머지는 텅 빈 여백, 화원화가들의 인위적인 장식과 허식적인 기교에 반발하는 추사의 의도가 엿보인다. 추사의 내면에서 농축된 필선의 담백한 표출은 사의(寫意)와 서화일치(書畵一致)의 고일(高逸)한 경지를 과시하고 있다.
이상적이 이듬해 이것을 북경으로 가져가 그곳 명인들에게 보여주었고 그 중 16명이 찬시를 그 「세한도」 두루마리의 뒤에 붙였다. 『논어』는 그냥 『논어』가 아니다. 우리 조선사람들의 삶이었고 예술이었고, 모든 문화적 향기의 진원이었다는 것을 추사의 「세한도」에서도 느낄 수 있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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