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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철학 삶을 만나다, 제3부 삶을 위한 철학적 성찰 - 1장 마음의 고통을 치유하는 방법, 마음의 고통과 불교의 가르침 본문

책/철학(哲學)

철학 삶을 만나다, 제3부 삶을 위한 철학적 성찰 - 1장 마음의 고통을 치유하는 방법, 마음의 고통과 불교의 가르침

건방진방랑자 2021. 6. 29. 16: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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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부 삶을 위한 철학적 성찰

 

 

1장 마음의 고통을 치유하는 방법

 

 

마음의 고통과 불교의 가르침

 

 

여러분은 마음이 쓰리도록 아플 때 어떻게 하나요? 넘어져 다리에 상처가 나거나 혹은 음식을 잘못 먹어서 배가 아플 경우, 우리는 가까운 병원이나 약국을 찾아가면 됩니다. 그러나 마음이 아플 때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하나요? 정신과 의사를 찾아가야 하나요? 그러나 정신과 의사는 약간의 상담을 거친 후 우리에게 신경을 안정시켜주는 약을 처방해주는 것이 전부입니다. 약을 먹으면 마음의 고통이 조금 완화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약 기운은 곧 떨어지기 마련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또다시 약을 먹어야 할까요? 약을 먹는 것으로 결정을 내리더라도 분명 이전보다 더 많은 양을 복용해야 할 겁니다. 약에 내성이 생길 테니까 말이죠. 서양의학이 몸의 상처를 치유하는 데는 탁월해도 마음의 상처를 다스리는 데는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하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그래서 서양 사람들마저도 마음의 고통을 치유하기 위해서 다른 방법을 찾고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들이 찾았던 것은 놀랍게도 우리에겐 너무나도 익숙한 불교의 가르침이었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불교는 마음의 고통을 치유하는 방법을 가르쳐주는 사상이었던 셈이지요. 여기서 우리는 궁금해집니다. 도대체 어떻게 불교가 우리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준다는 것일까요?

 

살아가는 동안 우리는 모두 견디기 힘든 마음의 고통을 겪게 됩니다. 아마도 이 점 때문에 우리는 불교에 어느 정도 관심을 가질 수 있을지 모릅니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전통적으로 불교는 종교의 하나로서 이해되어왔습니다. 물론 종교로서의 성격 때문에 불교를 믿는 신자들 역시 사찰에 가서 불상 앞에 절하고 기도를 올립니다. 이 모습은 기독교 신자들이 교회에 나가 하느님과 예수님께 기도를 드리는 것과 매우 유사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흔히 사람들은 너는 부처님을 믿고, 나는 하느님을 믿는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불교에는 이 세상과 인간을 포함한 만물을 창조한 창조주, 혹은 우리가 죽은 뒤 우리의 행동을 심판할 심판자와 같은 초월적인 신이 없습니다. 사실 부처라는 말도 인도 고대 언어인 산스크리트어의 붓다(Buddha)’라는 말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그래서 불교가 영어로 부디즘(Buddhism)’이라고 불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붓다라는 말은 깨달은 자를 의미합니다. 흔히 절에 가보면 가장 크게 만들어져 있는 불상이 하나씩 있기 마련입니다. 이 불상은 깨달음을 처음으로 얻었던 고타마 싯다르타(Gautama Siddhartha, BC 5632~483?)고타마 싯다르타는 불교를 창시했으며 석가모니라고도 불린다. ‘석가라는 것은 싯다르타가 속한 부족의 이름이고, ‘모니는 성자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는 원래 석가족이 살고 있던 카필라바투라는 작은 도시국가의 왕자였다. 싯다르타가 왕자로서의 안락한 삶을 버리고 수행을 통해서 얻은 가르침이 바로 네 가지 성스런 진리, 즉 사성제였다. 그의 사상은 법구경, 아함경등에 드러나 있다라는 인물을 본떠 만든 것입니다. 그런데 이 커다란 불상 옆에 작게 만들어진 수많은 불상이 함께 놓여 있는 것을 본 적이 있나요? 불교의 가르침을 열었던 싯다르타 이후, 많은 사람이 그와 마찬가지로 마음의 고통을 치유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이 작은 불상들은 모두 이런 깨달음을 얻은 사람들을 나타내는 것이지요.

 

 

 

 

 그래서 불교를 믿는다는 것은 싯다르타와 그를 따라 깨달았던 많은 사람처럼 깨달음을 배우겠다는 의지를 지니는 것과 동일한 것입니다. 물론 쉽지는 않겠지만 언젠가 그 깨달음을 얻는다면 우리도 부처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절에서 내려올 때 스님들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며 합장하곤 합니다. “성불(成佛)하십시오!” 여기서 성불이란 말은 부처[]가 된다[]’는 뜻입니다. 이제 싯다르타가 깨달은 내용이 조금 궁금하지 않습니까? 싯다르타가 깨달은 내용은 법구경(法句經, Dhammpada)이라는 경전에 다음과 같이 실려 있습니다.

 

 

거룩한 부처님과, 그가 이야기한 가르침과 가르침을 따르는 승려에게 귀의하면, 네 가지 진리를 자세히 명상하여 반드시 바른 지혜를 얻으리라. 생사의 고통[]’, 이 고통의 원인인 집착[]’ 그리고 이 모든 고통을 이미 떠난 소멸[]’과 그 소멸로 나아가는 여덟 가지 방법[]’, 이 네 가지 가르침은 우리를 여러 고통으로부터 건져줄 것이다. 법구경

 

 

싯다르타가 깨달은 것은 바로 그 유명한 사성제(四聖諦)입니다. ‘사성제는 글자 그대로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를 의미합니다. 구체적으로 말해 그것은 고통’, ‘집착’, ‘소멸’, ‘방법’, 고집멸도(苦集滅道)’로 정리될 수 있는 네 가르침입니다. 이 네 가지의 가르침은 얼핏 보면 별개의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모두 하나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즉 우리 인간의 마음에는 불가피하게 고통이 찾아오는데, 그 고통의 원인은 바로 집착에 있습니다. 다시 말해 우리 마음의 고통은 결과이고, 집착이 그 원인이라는 것이죠. 그렇다면 마음의 집착만 제거하면 고통이 사라지는 것이 아닐까요? 그 상태가 바로 소멸입니다. 흔히 소멸열반(涅槃)’이라고도 부릅니다. ‘열반이란 말은 그 자체로는 별다른 뜻이 없습니다. 그것은 니르바나(nirvāṇa)’라는 말을 음역한 것입니다. ‘니르바나라는 말은 불꽃(vāṇa)’꺼진다(nir)’는 의미입니다. 즉 활활 타오르는 집착의 불꽃이 꺼져서 뜨거운 고통의 불빛이 사라진다는 것을 뜻하는 말이죠. 그러면 집착을 어떻게 제거해야 할까요? 바로 방법이란 것이 집착을 제거하는 과정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싯다르타는 집착을 제거하는 방법으로 여덟 가지를 이야기했습니다. 이것을 팔정도(八正道)라고 하는데, 바른 견해[正見], 바른 사유[正思], 올바른 말[正語], 올바른 행동[正業], 올바른 생활[正命], 올바른 노력[正精進], 올바른 집중[正念], 올바른 참선[正定] 등이 바로 그것입니다.

 

인도의 한 작은 도시국가에 살았던 왕자의 깨달음으로부터 기원한 불교2000여 년 전에 중국에 들어온 이래 동아시아 사람들에게 강력한 영향을 끼쳐왔습니다. 하긴 인간의 고통을 치료하는 방법에 그 누구인들 매료되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나 중국에 들어온 불교는 중국에 동화되어 커다란 변화를 겪게 됩니다. 중국화된 불교 중 가장 중요한 종파 가운데 하나는 선종(禪宗)이라고도 불리는 선불교(禪佛敎)일 것입니다. 여러분은 서울 종로에 있는 조계사를 알고 있을 겁니다. 이 절은 우리나라 불교계를 석권하고 있는 조계종(曹溪宗)의 본부라고 할 수 있는데, 이 조계종도 바로 위에서 말한 선불교에 속하는 종파이지요. 선불교에서는 집착을 제거하기 위한 새로운 방법을 도입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화두(話頭)라고 불리는 방법입니다. 그리고 이 화두라는 방법에는 싯다르타의 팔정도의 의미가 응축되어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화두라는 방법이 어떤 것인지 간단히 알아보도록 하죠. 우선 깨달은 스승이 제자에게 화두라고 불리는 어떤 문제를 냅니다. 그러면 제자는 이 문제를 풀어야 합니다. 만약 그 문제를 풀게 된다면, 이 제자는 깨달음을 얻은 것입니다. 그런데 이 화두라는 것을 잠시 살펴보면, 우리는 당혹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화두는 말도 안 되는 질문의 형식을 취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화두라는 질문은 글자 그대로 상식적인 생각으로는 풀 수 없게 고안된 것입니다. 그래서 역설(paradox)이나 무의미(non-sense)로 가득 차 있는 질문이라고 할 수 있지요. 그런데 이런 황당무계한 질문에 대답할 수만 있다면, 우리는 마음을 고통스럽게 하는 모든 집착을 뿌리째 뽑아버릴 수 있는 특별한 경험을 하게 된다고 합니다. 그러니 한번 도전해볼 만하지 않겠습니까? , 그럼 여러분을 열반과 해탈로 이끌지도 모를 화두 하나를 제가 먼저 던져보겠습니다. 한번 마음속으로 풀어보세요.

 

 

큰스님이 몽둥이를 들고 제자의 머리 위로 흔들며 말했다. “이 몽둥이가 있다고 해도 너는 맞을 것이고, 이 몽둥이가 없다고 해도 너는 맞을 것이다. 만일 아무 말도 하지 않아도, 너는 맞을 것이다. 이 몽둥이는 있느냐, 없느냐?”

 

 

제가 큰스님이고, 여러분이 제자라고 해봅시다. ! 여러분은 어떻게 대답하겠습니까? 어떻게 대답해야 큰스님으로부터 몽둥이세례를 피할 수 있겠습니까? 너무 지체하지 말고 빨리 대답해야 합니다. 가령 여러분이 침묵만 지키고 있어도 제가 가진 몽둥이는 여러분의 머리를 강타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떻습니까? 아마 바로 대답하기는 매우 힘들 겁니다. 그럼 잠시 화두 푸는 것을 여기서 멈추도록 하지요. 아직 우리는 열반에 들 준비가 덜 된 것 같으니까 말입니다. 그때까지 우리의 마음을 고통으로 몰고 가는 집착이란 것이 어떤 메커니즘을 통해서 발생하는지 먼저 살펴보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화두에 대해서는 이번 장 말미에서 저와 같이 그 답을 찾아보도록 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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