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와 세계화
우리의 현실은 단순한 산업 자본주의의 모습이 아닙니다. 우리는 산업자본이 국가를 탈출해서 세계로 탈주하는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현실이지요. 몇몇 사람들은 이런 현실을 그저 현실로서 묵묵히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젊은 엄마들도 이제는 아이가 우리나라 말을 배우기도 전에 세계어인 영어를 아이의 머릿속에 각인시켜주려고 노력합니다. 바로 조기 영어 교육, 조기 영어 캠프, 영어 마을 등이 극성을 부리는 것이지요. 심한 경우 어떤 지식인은 당당하게 아예 영어를 모국어로 사용하자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또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몇몇 대학에서도 이제는 수업의 반 이상을 영어로 진행할 계획이라고 자랑하기도 합니다. 세계화에 발맞추어 인재를 양성하자는 것이겠지요. 그러나 결국 이 모든 현상은 미국 산업자본이 우리나라 출신의 미래 노동자를 재교육하는 비용을 줄이는 것에 불과한 일이 아닐까요?
세계는 하나라는 세계화의 화려한 구호를 의심하면서 우리는 일본이 말했던 대동아공영권이란 이념을 함께 떠올려볼 수 있습니다. 동아시아가 모두 ‘함께 번영하자[共榮]’는 약속은 얼마나 솔깃한 것입니까? 그러나 결국 이런 이념을 외친 일본은 어떤 일을 벌였나요? 우리나라를 포함한 동아시아는 모두 일본의 식민지, 일본 산업자본의 시장으로 전락하지 않았던가요? 일본은 그 당시 한국어를 금지하고 일본어를 모국어로 쓰도록 강제했습니다. 물론 명분은 일본과 우리나라는 하나니까 원활한 의사소통을 하기 위해서 언어를 통일하자는 것이었죠. 그러나 사실 이런 언어정책은 식민지 지배를 저비용으로 효율적으로 수행하기 위한 것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피지배자가 자신의 명령을 알아듣도록 하기 위해서 지배자는 먼저 피지배자를 교육시킬 필요가 있었던 것이지요.
일제강점기에 이런 일본의 식민지정책에 그대로 동참했던 몇몇 우리의 못난 조상들을 우리는 결코 잊어서는 안 됩니다. 자신들 소수만의 기득권을 보호하기 위해서, 그들은 동시대의 동포들뿐만 아니라 후손들까지도 모조리 일본에 팔아넘겼기 때문입니다. 삶의 터전을 지키기는커녕 스스로의 문화나 역사, 심지어 언어마저도 해체하려고 했던 일부 지식인들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그로부터 수십 년이 흐른 지금, 일제강점기의 그들과 너무도 유사하게 몇몇 사람들은 세계화, 미국화가 불가피한 현실이라고 짐짓 정색을 하며 이야기합니다. 마치 자신들도 슬프기는 하지만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말이지요. 여기서 우리는 윌리엄 탭이 제출한 이런 제3세계 지식인들의 기원에 대한 슬픈 보고서를 읽어볼 수 있습니다.
냉전이 끝나자, 미국은 제3세계에서의 정치적 지배 전략을 바꿀 수 있었다. 냉전 기간 동안 미국은 제3세계의 독재자를 지지했다. 미국의 지지를 받은 독재 정권들은 ‘혁명적인’ 토지개혁, 노조의 조직화, 그리고 자유롭고 공평한 선거를 가로막으며 국가의 획일적인 질서를 유지할 수 있었고, 한편 미국 투자자들의 접근을 보장해주었다. (……) 1980년대와 1990년대경에도 가혹한 장군들과 그 측근의 가족 엘리트들에 의해 장악된 이들 권위주의 정부는 외국 및 국내기업들로부터 지대를 착취했고, 비생산적인 억압 기구들을 계속 유지했다. (……) 이 지배계급의 자손들 역시 결국에는 이들 나라의 정치 경제를 변화시키는 데 주요한 세력으로 떠올랐다. 주변국의 엘리트들은 언제나 그들의 자손을 미국이나 영국의 대학으로 유학을 보냈던 것이다. 레이건 대처시대에 그들은 미국과 영국에서 자유 시장 경제학을 공부하였고, 그들 나라로 다시 되돌아가 자국 경제를 세계화의 조류에 맞게 스스로 변화시켜나갔다. 그들은 경영자 계급이 직접적인 군사 지배를 대체하는 과정에서, 규제 완화와 민영화라는 정책을 채택하게 된다. 즉 그들은 귀국하여 자국 경제를 신자유주의에 따라 구조 조정했던 것이다. 또한 그들은 특정한 계급으로서, 국가주의 형태에서 시장 지배적 체제로 변화하는 과정에서 막대한 이득을 얻었다. 국가가 소유한 자산을 민영화하면서 그로부터 큰 이득을 얻은 것이 바로 그들이었던 것이다. 『부도덕한 코끼리』
물론 이런 냉소적인 지적은 주로 남미나 중동의 친미 독재 정권들을 염두에 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런 인식은 우리나라의 사정에도 상당 부분 적용될 수 있는 것입니다. 불행히도 우리나라의 친미 독재 세력의 피에는 친일파의 피도 함께 흐르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제 잠시 친일파로부터 친미파로 이어지는 반역의 역사에 대해 회고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친일파의 기원은 조선 말 집권층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권력이 있어야 권력을 팔아먹든 말든 할 수 있을 테니까요. 친일파들은 친일의 대가로 식민지 조선에서 엄청난 기득권을 보장받게 됩니다. 그리고 결국 그 기득권을 토대로 그들은 자신들의 자식을 일본에 유학 보낼 수 있었고, 장래의 지식인으로 키워 낼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해방된 조국에서 자신들의 기득권을 영구히 유지하기 위해서 이승만 정권과 연대하고, 반민특위를 해체시켜버립니다. 그리고 그들은 마침내 박정희 정권과도 결탁하게 됩니다. 그들은 탁월한 현실주의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들의 현실주의는, 우리 사회의 모든 사람을 위한 현실주의는 결코 아니었습니다. 오로지 자신들만의 기득권을 위한 현실주의였지요. 이렇게 얻어진 기득권을 통해서 이제 그들은 자신들의 자식을 미국으로 유학 보내게 됩니다. 그들은 미국의 산업 자본주의가 앞으로 대세가 될 것임을 내다볼 수 있는 정도의 안목은 충분히 가진 사람들이기 때문이지요. 마침내 그들의 자식들이 하나둘 우리 사회로 되돌아옵니다. 신자유주의 이념과 세계화의 전도사가 되어서 말이지요. 그리고 그들은 지금 학계에서, 언론계에서, 관계에서 왕성하게 활약하고 있습니다. 이제 세계화는 최소한 우리나라에서는 막을 수 없는 추세가 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바로 우리 사회의 헤게모니를 쥐고 있으니까요.
자본주의는 기본적으로 인간을 상품으로 그리고 화폐를 신으로 만드는 체계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인생 대부분의 시간을 돈을 벌기 위해서 고단하게 보내지 않으면 안 되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도 언제 올지 모를 먼 훗날의 행복을 기대하면서 말이죠. 이제 세계화라는 거역하지 못할 현실 속에서, 우리 대부분은 돈을 벌기 위해서 더 힘든 일에 종사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만큼 행복은 우리로부터 더 멀어지겠지요. 그러나 사실 자본주의 속에는 진정한 행복이라고 말할 만한 것이 애초에 없었습니다. 단지 소비의 행복, 소비의 자유만이 존재했을 뿐이니까요. 우리는 자신만의 삶을 위해서 시간을 보내고 있지는 못합니다. 아니 그런 방법마저도 완전히 잊었다고 말해야 옳을 겁니다. 오직 잘 팔리는 상품으로 자신을 만들기 위해서 하루하루를 열심히 보내고 있습니다. 영어를 공부하기 위해서라면 언제든 학원에 나가지만, 역사 강의를 듣는다거나 혹은 판소리를 익히기 위해서 편안하고 여유 있게 학원에 나가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겁니다. 역사, 문학, 철학, 판소리 등을 배워서 무엇하겠습니까? 이런 것들은 여러분을 구매할 산업자본에게는 전혀 불필요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신자유주의 이념하에서 국가는 우리와 같은 평범한 사람들에게 더 이상 복지를 제공하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국가기구에 속한 정책 결정자들이나 재계나 학계에 있는 기득권자들은 오히려 반대로 행동하고 있지 않습니까? 가난한 자를 보호하면 가난을 지속시킬 뿐이라는 궤변으로 그들은 자유주의 원칙을 고수하려고 합니다. 이런 이념에 따라 그들은 시장을 개방하고 관세를 줄임으로써 국가 경쟁력을 높일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이런 신자유주의적 조치들이 우리 사회에 얼마나 많은 비정규직 노동자를 만들어냈습니까? 이제 노동자의 절반 이상을 비정규직이 차지하고 있지요. 우리 정부는 이들도 취업자로 분류함으로써 실업률이 크게 완화되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실질적 실업률은 도리어 IMF【IMF는 세계은행(IBRD)과 함께 국제금융기구의 양대 축인 국제통화기금을 말한다. IMF는 가맹국의 출자로 공동의 기금을 만들어 각국의 외환자금조달을 원활히 하고자 1947년 3월에 설립되었다. IMF는 각 회원국이 그 경제 규모에 따라 투표권을 갖는다. 따라서 IMF는 애초에 미국 등 서방 선진국의 이익을 대변할 수밖에 없도록 고안된 것이다. 가령 미국은 세계 인구의 5%를 차지하지만 IMF에서의 투표권은 17%나 갖는다】 구제금융 사태 이전보다 더 크게 늘어난 셈입니다. 어떻게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삶의 행복을 추구할 여유가 있겠습니까? 여러분 세대 절반 이상이 바로 이런 절박한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그런데도 비정규직이 확대되는 조치를 정부가 오히려 묵인하고 있다는 것은, 정부가 이제 대다수 국민 편이 아니라 산업자본의 편을 들고 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세계인권선언(Univeral Declaration of Human Rights)【세계인권선언은 1948년 12월 제3차 유엔총회에서 발표되었다. 전문(前文)과 본문 30개 조로 되어 있는데, 그중 제21조까지는 시민적ㆍ정치적 성질의 자유, 즉 자유권적 기본권에 관한 규정이다. 그리고 경제적ㆍ사회적ㆍ문화적 성질의 자유, 즉 생존권적 기본권에 관해서도 상당히 배려하고 있으며, 사회보장에 대한 권리(22조), 노동권과 공정한 보수를 받을 권리 및 노동자의 단결권(23조) 등에 관해서도 상세히 규정하고 있다】은 모든 이가 노동하고 자유롭게 일자리를 선택할 권리, 그리고 정의롭고 공평한 노동조건을 보장받고 실업으로부터 보호받을 권리를 지니고 있다고 말했다. (……) 세상의 주인인 자본가가 세계를 자기 뜻대로 만들기 위해 국제화된 국가와 국내 대리인들을 마음대로 부릴 수 있는, 새로운 봉건주의를 만들어내려는 자본의 뻔뻔함이 극도에 달한 이 시대에 세계적 금융기관, 초국적 기업 그리고 정부가 우리로부터 무엇을 약탈해가려고 하는지 잊지 않기 위해서 세계인권선언의 내용을 명심해야만 한다. 자본의 권리보다 인권이 더 중요한 것이다.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한지를 인식하고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투쟁하는 것은 계급의식에 기초한 정치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부도덕한 코끼리』
자본주의는 신처럼 이 세계에서 군림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본주의의 대리인들은 마녀사냥을 주도했던 제사장들처럼 우리를 궁지로 몰아넣고 있습니다. 자본주의는 우리 자신을 부단히 상품으로 만들고, 우리의 행복을 잠식해 들어가는 체계입니다. 그러나 현재의 우리는 세계화에 맞서기에는 자본에 너무나도 깊숙이 길들여져 있습니다. 그래서 자본주의에 맞선다는 것은 결국 자기 자신에게 맞서는 것과 같은 용기를 필요로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용기 이전에 우리 자신의 행복을 스스로 지켜내야 하는 우리의 의무이기도 합니다. 만약 그렇게 할 수 없다면, 우리만이 자본의 노예로, 자본주의의 상품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후손까지도 그렇게 살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실 우리가 가야 할 길은 분명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힘으로 자유롭고 공평하게 일할 수 있는 조건을 얻어내야만 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인간으로서 누려야만 하는 최소한의 권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이제 우리를 도와줄 수 있는 사람들이 별로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만약 아직도 그런 사람들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결국 우리 자신뿐이거나, 아니면 우리와 같은 처지에 놓인 다른 나라의 형제들일 것입니다. 그래서 맑스가 이렇게 말했던 것이겠지요.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Proletarier aller Länder vereinigt Eu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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