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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 5부 내부에서 외부로 외부에서 내부로 - 2장 세 개의 첨점: 천하ㆍ주자ㆍ서양, 주자학과 이단들 본문

문집/열하일기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 5부 내부에서 외부로 외부에서 내부로 - 2장 세 개의 첨점: 천하ㆍ주자ㆍ서양, 주자학과 이단들

건방진방랑자 2021. 7. 10. 1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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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자학과 이단들

 

 

주자는 주자주의자일까? 아닐까? 아마도 가장 정확한 대답은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일 것이다. 긍정의 경우는 주자주의가 기존의 배치를 동요시키면서 새로운 담론적 에너지를 발산하는 상황을, 부정의 경우는 주자주의가 교조적 담론으로 기능하는 상황을 상정한 것일 터이다. 즉 이 단순소박한 문답은 어떤 전복적 사유도 시공간적 배치에 따라 의미가 달라질 뿐 아니라, 자신에 반하는 의미까지도 생성할 수 있다는 것을 환기시켜준다.

 

중세의 텍스트를 다루는 이들에게 주자는 언제나 넘어서야 할, 탈주자주의의 맥락에서만 그 얼굴을 드러내는 존재다. 앞서 간략하게 짚었듯이 16세기 이후 조선은 주자학이 통치이념으로 자리잡았고, 17세기 당파 간 분열이 가속화되면서 육경(六經)에 대한 주자 이외의 어떤 해석도 이단으로 낙인찍히는 궤적을 밟아왔다. 따라서 조선 후기 텍스트를 다룰 때는 언제나 주자학으로부터 얼마나 벗어났는가가 그 사상의 진보성 여부를 판단하는 척도로 기능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다 보니 주자는 항상 저 드높은 초월적 위치에서 천리(天理) 혹은 이법(理法)’을 설파하는 근엄한 표정으로만 각인되어 있다. 하지만 주자가 자신의 학문을 구성하는 과정은 실로 역동적이다. 불교의 선()에 깊이 침잠했으나 과감하게 그로부터 몸을 돌리고 북송(北宋) 도학(道學)의 계보를 집대성하면서 유학의 거대한 체계화를 시도하는 과정도 그렇거니와, 무엇보다 그는 혼자가 아니었다. 숱한 지적 고수(!)들과의 만남, 1천 명에 달하는 제자들과의 공동생활, 논적(論敵) 육상산(陸象山)과의 치열한 논쟁 등 주자학은 하나의 거대한 지적 운동 속에서 태동되었던 것이다.

 

과거를 위한 학문을 그토록 조롱하고, 만년에 위학(僞學)의 금()’에 몰려 혹독한 탄압을 받았던 자신의 학문이 뒷날 과거시험의 교과서가 되고, 국가학이 되어 다른 종류의 학문들을 모조리 이단으로 낙인찍는 도그마가 되리라는 것을 주자는 아마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맑스가 자신의 사유가 사회주의 국가학이 되어 감시와 처벌의 도구가 되리라는 것을 상상하지 못했듯이. 그런 점에서 주자 역시 주자주의자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한 셈이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조선 후기 사상사에서 주자가 언제나 탈주자주의의 맥락에서만 나타난다는 건 조선의 주자학이 늘 인간 주자의 학문이 아니라, 주자주의로만 기능했음을 뜻하는 것이다. 소중화주의가 통치 이데올로기의 층위에서 작동한 것이라면 주자주의는 철학적 카테고리로서 그 내부를 떠받치고 있었다. 조선의 유학자들에게 공맹(孔孟)의 이념은 오직 주자로 귀결되고, 한족문화의 정통성 역시 주자주의를 통해서만 표현될 수 있는 것이었다.

 

당시 청왕조의 국가 이념 역시 주자주의였다. 강희제는 주자를 공자, 맹자로 이어지는 유학 십철의 다음에 모시고, 국가학으로 적극 장려하였다. 그 점에서는 조선과 하등 차이가 없었다. 문제는 주자학 외부에 대한 태도가 조선과는 전혀 달랐다는 사실이다. 주자를 정통으로 표방하면서도 청왕조는 주자학과 대척적인 것들이 공존할 수 있는 영역을 상당 부분 확보해두었던 것이다. 유목민의 유연함 때문인지 아니면 오랑캐의 근성 때문인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지만.

 

연암 역시 조선의 주자학자로서 이 문제를 그냥 지나치기 어려웠으리라. 연암의 분석은 이렇다. 청이 중국의 주인이 되면서 형세가 주자학으로 기울어졌음을 판단하여 주자의 도덕을 황실의 가학(家學)으로 삼자, 주자학과 대결했던 양명학은 급격히 쇠락하게 되었다. “! 그들이 어찌 진실로 주희의 학문을 알아서 그것을 취했겠는가.”, “중국의 대세를 살펴서 그것을 먼저 차지한 뒤, 온 천하 사람의 입에 재갈을 물려서 자기들을 감히 오랑캐라고 부르지 못하도록 하는 것에 그 뜻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고는 천하의 글을 몽땅 거두어들여 도서집성사고전서(四庫全書)등을 편찬했다. 그러고는 천하 사람들에게 외쳤다. 이것이 바로 주자가 남기신 말씀이며, 주자가 남긴 종지(宗旨).” 말하자면, 한족 선비들보다 더 강경하게 주자를 전유해버린 것이다.

 

연암이 보기에 이렇게 그들이 걸핏하면 주자를 드높이는 것은 "천하 사대부들의 목덜미에 걸터앉아 그들의 목구멍을 누른 채 그 등을 어루만지는 격이다. 천하의 사대부들은 대부분 예의절목의 구구한 항목에 골몰하여 자기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도 깨닫지 못한다“. 이로써 오늘날 주자를 반박하는 사람은 옛날 육구연의 학문을 따르던 이들과는 명백히 다르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그렇지만 우리 나라 사람들은 이런 속내를 알지 못한 채 잠깐 중국 선비를 접촉할 때 대수롭지 않은 말이라도 일단 주희와 어긋나는 바가 있을라치면 눈이 휘둥그레지며 깜짝 놀라 그들을 육구연의 무리라고 배척하곤 한다. 또 귀국해서는 이렇게 말한다. ‘중국에는 육구연의 학문이 크게 번성하여 유학의 도가 땅에 떨어졌더구만. 쯧쯧.’”한다. 한마디로 사태의 본질을 전혀 보지 못하고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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