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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로 설파한 생사일여, 정말 생사일여냐?
공포와 오한에 떨며 느티나무 등걸에 기대어 깊은 잠을 자고 일어났을 때 찬란한 아침 햇살이 동욱의 적삼을 때리고 있었습니다. 동욱 은 갑자기 산다는 게 무엇이냐, 죽는다는 게 무엇이냐, 내가 『금강경』을 운운하며 생사일여(生死一如)를 자신있게 강론했건만 지금 죽음의 귀신이 그토록 무서워 도망치고 또 도망쳤다니, 도대체 내가 20년 넘도록 쌓아온 지식의 공덕이 뭔 소용이냐, 온갖 상념에 휩싸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일세를 풍미한 강백으로서의 자신의 모습이 한없이 초라했고 뜬구름처럼 보였습니다. 『법화경』의 오묘한 비유들을 그토록 재미있게 설파하고, 『화엄경』의 선재동자의 모험을 그토록 환상적으로 그려나갔건만 지금 이 내 꼬라지가 무엇이냐? 정말 내가 무주(無住, 집착함이 없음)하는 마음을 냈단 말인가? 내가 과연 그 죽음의 마을에서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에 머물지 않고 마음을 낼 수 있었던가? 그는 자신이 살아온 전 생애가 다 위선으로 느껴졌고, 그 위선적인 자아상을 바라보고 신뢰한 모든 사람들에게 부끄러운 마음을 금할 길이 없었습니다.
심리학에서 흔히 미드라이프 크라이시스(Mid-life Crisis)라는 말을 쓰는데 성취를 누적해온 위대한 인간에게는 중년의 나이쯤에 그것을 부정하는 계기가 찾아온다는 뜻이지요. 경허는 그 길로 옛 은사를 찾아볼 생각도 다 잊어버리고 동학사로 직행합니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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