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모든 것을 한몸으로 보아라
일체동관분(一體同觀分)
18-1.
“수보리야! 네 뜻에 어떠하뇨? 여래는 육안이 있느뇨? 없느뇨?’ ‘그러하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는 육안이 있사옵니다.”
“須菩堤! 於意云何? 如來有肉眼不?” “如是. 世尊! 如來有肉眼.”
“수보리! 어의운하? 여래유육안불?” “여시. 세존! 여래유육안.”
18-2.
“수보리야! 네 뜻에 어떠하뇨? 여래는 천안이 있느뇨? 없느뇨?” “그러하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는 천안이 있사옵니다.”
“須菩堤! 於意云何? 如來有天眼不?” “如是. 世尊! 如來有天眼.”
“수보리! 어의운하? 여래유천안불?” “여시. 세존! 여래유천안.”
앞 절에서 말한 ‘육안(肉眼)’은 그냥 우리말대로 육안이며, 우리의 평상적 몸을 구성하는 감각기관으로서의 육안이다. 그러나 ‘육안’이라는 말은 항상 어폐가 있다. ‘눈이 본다’ 할 때, 과연 눈이 보는가? 눈동자를 후벼 파내어 책상 위에 놓는다면 과연 그것은 보는 작용을 하는 것일까? 눈은 과연 보는 것일까? 감각기관의 기능의 국부성은 그것 자체로 독립되는 것이 아니라, 그 기능을 가능케 하는 신체 전체와 관련되어 있다는 것은 우리가 너무도 상식적으로 깨달을 수 있는 우리 몸의 사태이다. 눈은 결코 보지 않는다. 그것은 보는 과정의 한 단계를 담당하는 빈 그릇과도 같은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본다’고 하는 전체적 과정은 어떻게 이루어 지는가? 그것이 바로 여기서 말하는, 육안(肉眼) → 천안(天眼) → 혜안(慧眼) → 법안(法眼) → 불안(佛眼)이라는 총체적 과정인 것이다. 이것은 생리적 과정의 사실인 동시에 우리 인식의 단계적 제고를 말하는 것이다.
‘천안(天眼)’의 원어는 ‘divyaṃ cakṣus’이다. 티베트역(譯)은 ‘신(神)의 눈’(Ihaḥi spyan)으로 번역하였다. 콘체역은 “heavenly eye.”
18-3.
“수보리야! 네 뜻에 어떠하뇨? 여래는 혜안이 있느뇨? 없느뇨?” “그러하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는 혜안이 있사옵니다.”
“須菩堤! 於意云何? 如來有慧眼不?” “如是. 世尊! 如來有慧眼.”
“수보리! 어의운하? 여래유혜안불?” “여시. 세존! 여래유혜안.”
18-4.
“수보리야! 네 뜻에 어떠하뇨? 여래는 법안이 있느뇨? 없느뇨?” “그러하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는 법안이 있사옵니다.”
“須菩堤! 於意云何? 如來有法眼不?” “如是. 世尊! 如來有法眼.”
“수보리! 어의운하? 여래유법안불?” “여시. 세존! 여래유법안.”
18-5.
“수보리야! 네 뜻에 어떠하뇨? 여래는 불안이 있느뇨? 없느뇨?” “그러하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는 불안이 있사옵니다.”
“須菩堤! 於意云何? 如來有佛眼不?” “如是. 世尊! 如來有佛眼.”
“수보리! 어의운하? 여래유불안불?” “여시. 세존! 여래유불안.”
18-6.
“수보리야! 네 뜻에 어떠하뇨? 저 갠지스강에 있는 저 모래를 부처가 말한 적이 있느냐? 없느냐?” “그러하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는 그 모래를 말하신 적이 있사옵니다.”
“須菩堤! 於意云何? 恒河中所有沙, 佛說是沙不?” “如是. 世尊! 如來說是沙.”
“수보리! 어의운하? 항하중소유사, 불설시사불?” “여시. 세존! 여래설시사.”
‘혜안(慧眼)’은 지혜의 눈이다. ‘법안(法眼)’은 현상계의 형체를 넘어서서 그 다르마(법法) 그 자체를 직시하는 눈일 것이요, ‘불안(佛眼)’은 모든 존재의 구분이 사라진 여여(如如)의 눈일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나의 설명 자체가 구차스러운 것이다. 독자들이 스스로 느끼는 대로의 의미가 가장 적합한 의미가 될 것이다.
5절과 6절 사이에는 단절이 있다. 다른 주제로 옮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갑자기 11분에서 언급되었던 ‘갠지스강의 모래’의 이야기를 상기시킨다. 그 상기의 방법도 여태까지와는 달리 매우 간접적이다. 우리의 기대는 또 ‘갠지스강의 모래’하면 바로 ‘칠보공덕’으로 옮겨 가리라는 예상 속으로 빠져들어간다. 그러나 놀라웁게도 이 ‘갠지스강의 모래’는 칠보공덕과는 전혀 다른 맥락에서 언급되고 있음이 드러난다. 매우 신선하다! 이 분(分) 전체의 주제는 육안(肉眼)을 넘어서는 심안(心眼)의 문제라는 일관성을 잃지 않고 있다. 그러면서 과거에 언급되었던 상투적인 개념의 틀을 새롭게 사용하는 자세가 변주의 색다른 다양성을 창조하고 있는 것이다.
18-7.
“수보리야! 네 뜻에 어떠하뇨? 하나의 갠지스강에 있는 모든 모래, 그만큼의 갠지스강들이 있고, 이 갠지스강들에 가득 찬 모래 수만큼의 부처님세계가 있다면, 이는 많다고 하겠느냐? 많지 않다고 하겠느냐?” “너무도 많습니다. 세존이시여!”
“須菩堤! 於意云何? 如一恒河中所有沙, 有如是沙等恒河, 是諸恒河所有沙數佛說世界, 如是寧爲多不?” “甚多. 世尊!”
“수보리! 어의운하? 여일항하중소유사, 유여시사등항하, 시제항하소유사수불설세계, 여시녕위다불?” “심다. 세존!”
여기 ‘불세계(佛世界)’는 ‘불안(佛眼)’으로 보이는 세계일 것이다. 여기 갠지스강의 모래에 대한 과장된 형용을 많은 사람들이 문학적 상상력에 의한 과장으로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나 도올은 생각한다. 그것은 과학적 사실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세계(世界)란 현대 물리학이 말하는 물리적 우주가 아니다. 물리적 우주는 물론 그 무한대의 시공연속체를 전제로 하면 하나밖에 있을 수 없다. 그러나 불교가 말하는 세계는 ‘삶의 세계(Umwelt)’인 것이다. 존재가 인식하는 세계요, 나의 감관이 구성한 세계요, 나의 행업(行業)이 지어놓는 세계다. 나에게 있어서 세계는 실제적으로 이러한 삶의 세계를 벗어나지 않는다. 우리가 말하는 우주도 알고보면 이러한 ‘삶의 세계’의 총화에 불과한 것이다. 한 집안에서도 부인의 세계가 다르고 아들의 세계가 다르고 딸의 세계가 다르고 나의 세계가 다르다. 부인의 세계가 인식하는 부엌과 나의 세계가 인식하는 부엌은 완전히 다른 공간이다. 그리고 그 속에 들어와 있는 바퀴벌레가 인식하는 또 다른 세계가 있는 것이다. 이렇게 한번 생각해보라!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 그 우리를 구성하는 그 무한한 ‘나’의 수(數)는 실로 한강의 모래수만큼의 한강들에 가득찬 모래보다도 훨씬 더 많은 것이다. 바로 이 세계들의 중첩구조를 불교에서 ‘연기(緣起)’라 말하는 것이다.
18-8.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이르시되: “그 많은 부처님 나라에 살고 있는 중생들의 갖가지 마음을 여래는 다 아느니, 어째서 그러한가? 여래가 설한 갖가지 마음이 모두 마음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비로소 마음이라 이름할 수 있는 것이다.
佛告須菩堤: “爾所國土中所有衆生若干種心, 如來悉知. 何以故? 如來說諸心, 皆爲非心, 是名爲心.
불고수보리: “이소국토중소유중생약간종심, 여래실지. 하이고? 여래설제심, 개위비심, 시명위심.
‘중생들의 갖가지 마음’이라는 표현에 내가 윗절에서 말한 ‘삶의 세계’의 의미가 잘 드러나고 있다. ‘갖가지’라는 우리말 속에는 ‘온갖 종류의’라는 ‘종(種)’의 뜻이 포함되어 있어 ‘약간종(若干種)’의 번역으로 썼다.
여기서 말하는 ‘심(心)’이란 원어로 ‘citta-dhārā’인데 이것은 실로 ‘의식의 흐름(Flow of Consciousness)’을 뜻한다. 과거의 경험에 기초한 의식 및 무의식이 현재ㆍ미래로 흘러가면서 우리의 의식작용이나 행동을 규정하고 있다는 의미의 맥락에서 사용되는 것이다. 진체(眞諦, Paramārtha, AD 499~569【중국불교사에서 4대 번역가 중의 한 사람. 서인도 아반티국의 학승】는 ‘심상속주(心相續住, 마음이 서로 끊임없이 흘러가면서 어떤 아이덴티티를 유지한다)’라고 아주 좋은 번역을 내었고, 현장(玄奘)은 ‘심류주(心流注, 의식의 흐름)라 번역했으니, 이제 와서 제임스 죠이스(James Joyce, 1882~1941)【아일랜드 출신의 소설가】를 따로 말할 필요도 없다.
불교는 결국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를 심의 류주(流注)로 본다. 거대한 마음이 흘러가고 있는 세계가 곧 우리가 바라보고 있는 세계라고 생각하면 되는 것이다. 물리학적 우주도 알고보면, 물리학자들의 마음이 흘러가고 있는 우주인 것이다. 우리는 너무 과도하게 그 하나의 세계에 객관성을 부여하고 있을 뿐이다. 따라서 불교라는 것은 이 세계를 인식하는 우리의 마음의 상태를 전환시키려는 거대한 사회운동인 것이다. 프롤레타리아혁명은 생각해봤을지언정, 과연 참으로 위대한 마음의 혁명을 생각해본 적이 있는가? 이 땅의 젊은 이들이여! 일어나라! 혁명을 위하여! 일어나라! 깨어라! 마음의 혁명을 위하여! 동학혁명을 부르짖었던 조선의 민중은 보국안민(輔國安民) 척양척왜(斥洋斥倭)를 서슴치 않고 표방했는데, 지금 우리도 과연 그러한 용기를 가지고 있는가? 대한민국의 민중은 너무도 자유로운 사고를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18-9.
그 까닭이 무엇이뇨? 수보리야! 과거의 마음도 얻을 수 없고, 현재의 마음도 얻을 수 없고, 미래의 마음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니라.”
所以者何? 須菩堤! 過去心不可得, 現在心不可得, 未來心不可得.”
소이자하? 수보리! 과거심불가득, 현재심불가득, 미래심불가득.”
여기에 이르면 누구든지, 선가에 일가견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덕산방(德山棒), 임제할(臨濟喝)’의 한 주인공 덕산선감(德山宣鑑, 780~865)의 그 유명한 이야기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덕산(德山)은 청원행사(靑原行思)에서 석두희천(石頭希遷)으로 이어지는 법통에서 나온 『금강경』의 대가(大家)였다. 아주 어려서 출가(出家)하였고, 율장(律藏)을 정구(精究)하고 성상(性相)의 제경(諸經)의 지취(旨趣)를 관통하였는데, 그가 『금강경』에 미쳐있었기 때문에 그를 ‘주금강(周金剛)’이라 불렀다【주(周)는 그의 속성(俗姓)이다】.
그가 남방(南方)에서 선풍(禪風)이 성행한다는 소리를 듣고 아주 불쾌하게 생각하여 그 선풍(禪風)의 소굴로 뛰어들어 직지인심(直指人心) 운운(云云)하는 새끼들의 씨종자를 다 말려버리겠다고 결심하고, 그는 호남 예양, 당대의 최고의 선사 용담숭신(龍潭崇信)이 주석하고 있는 예강변으로 긴 여로를 떠났다. 자기가 지은 『청룡소초(靑龍疏鈔)』라는 『금강경』 주석서를 멜빵에 메고!
다 왔을 무렵, 해는 저물어가고 낙엽은 소조히 스치는데, 배가 심히 고파 참을 수가 없었다. 때마침 노상에서 한 노파가 빈대떡(유자油糍, ‘油餈’라고도 쓴다. 인절미 자)을 자글자글 부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돈은 없지, 끼웃끼웃 거리고 있는데, 노파가 말을 걸었다.
“거추장스럽게 어깨에 메고 다니는 것이 뭐유?”
“『청룡소초』니라.”
“소초라구? 뭔 경을 해설한 게요?”
“『금강경』이니라.”
“『금강경』이라구? 내 일찌기 항상 궁금한 게 있었는데, 그대가 내 물음에 대답을 하면 점심을 거져줄 것이고, 그렇지 못하면 딴 곳으로 꺼지게나!”
“어서 씹어보아라!”
우리말에 ‘점심’은 ‘lunch’를 의미한다. 그런데 중국말에서 ‘점심(點心)’【우리말의 ‘점심’을 많은 사람이 순수 국어로 아는데, 그것은 중국말의 점심(點心)을 그대로 옮긴 것일 뿐이다】은 ‘lunch’를 의미할 때도 있겠지만, 우리말에 더 정확히 해당되는 말은 ‘간식’이다. 사이사이 조금조금 먹는 비정통 식사를 말한다. 그런데 이 점심은 보통 배고플 때 먹기 마련이다. 배고프면 머리가 혼란스럽고 마음이 어두워진다. 점심(點心)이란 문자 그대로 ‘마음에 불을 켠다’는 뜻이다. 음식은 한의학적으로 화(火)다. 그것은 탄수화물 에너지다! 배고픈 마음에 퍼뜩 불을 켜는 데는 점심 이상이 없는 것이다. 바로 이 노파의 질문은 이 점심(點心)이라는 말의 의미의 펀(pun: 쌍관희어雙關戱語)과 관련된 것이다.
“여보게 청년! 난 말이지, 옛날부터 『금강경』에 있는 이 말이 뭔 뜻인지 궁금했거든. 거 중간쯤 어디께 ‘과거심불가득, 현재심불가득, 미래심불가득’이란 말이 있지 않나?”
고개를 끄떡이는 덕산에게 노파는 대짜고짜 다그친다.
“야 이눔아! 근데 넌 지금 뭔 마음(심心)을 점(점點) 하겠다는 게냐?”
이 노파의 한마디는 『금강경』에 관한 한 더 이상 없는 아뇩다라 천하(天下)의 명언(名言)이다. 여기서부터 흥미진진한 덕산의 오도(悟道)의 이야기가 끊임없이 이어진다. 그 흥미진진한 이야기! 과연 덕산은 뭐라 말했을까? 이놈들아! 뭘 꾸물거리는 게냐! 내 책을 보아라! 『화두(話頭), 혜능과 셰익스피어』(통나무, 1998) 제4칙(第四則) 부분에 상술되어 있다.
아마도 이 이야기는 픽션이 아닐 것이다. 당나라 선승들의 뼈저린 구도적 삶의 이야기였을 것이다. 그리고 이 노파도 결코 픽션 속의 인물이 아니었을 것이다. 우리나라 절깐 앞에서 빈대떡을 팔고 있는 조선의 할머니 중에, 지금도 『금강경』을 암송하고 있는 분은 얼마든지 있다. 그리고 덕산 같은 큰스님에게 이와 같은 통찰력 있는 질문을 던질 수 있는 지혜를 가지신 분들이 얼마든지 있다. 그들은 단지 침묵할 뿐인 것이다.
지혜는 지식의 단계에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지성의 교만이나 오만을 불식하지 않으면 우리는 『금강경』의 지혜로 영원히 입문할 수 없는 것이다. 불행하게도! 불행하게도!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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