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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경 강해 - 제16분 더러운 업을 항상 깨끗이 본문

고전/불경

금강경 강해 - 제16분 더러운 업을 항상 깨끗이

건방진방랑자 2021. 7. 12. 1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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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더러운 업을 항상 깨끗이

능정업장분(能淨業障分)

 

 

16-1.

이제 다음으로 수보리야! 선남자 선여인이 이 경을 받아 지니고 읽고 외울 때에 이로 인하여 사람들에게 경시당하고 핍박을 받는다면 이는 전생에 지은, 지옥에 떨어지게 될지도 모르는 죄업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바로 지금 세상의 사람들이 이 사람을 경시하고 핍박하기 때문에 곧 전생의 죄업이 소멸할 것이요. 그래서 반드시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깨달음을 얻을 것이다.

復次須菩堤! 善男子善女人受持讀誦此經, 若爲人輕賤, 是人先世罪業應墮惡道. 以今世人輕賤故, 先世罪業則爲消滅, 當得阿耨多羅三藐三菩堤.

복차수보리! 선남자선여인수지독송차경, 약위인경천, 시인선세죄업응타악도. 이금세인경천고, 선세죄업즉위소멸, 당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

 

 

그 내면적 뜻의 정확한 논리구조에 따라 의역한 것이다. 문법적 구조만 그대로 따르면 무슨 말인지 확연히 이해하기 어렵다.

 

대륙의 합리론 전통과 영국의 경험론 전통을 종합하여 대성한 계몽주의 사상의 완성자(完成者),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 1724~1804)는 그의 대저 실천이성비판(實踐理性批判)에서 인간의 도덕적 행위와, 그 행위에 대한 사회적 보상이나 현실적 결과 사이에 존재하는 괴리의 문제를 아주 심도있고 고민스럽게 파헤치고 있다. 간략히 말하면, 도덕(moral conduct)과 행복(happiness)의 괴리의 문제를 분석하고 있는 것이다.

 

우선 칸트는 도덕은 상식이라는 전제를 깔고 있다. 우리의 직관적 상식은 건전한 도덕의 궁극적 기준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다는 것이다. 도덕철학의 임무는 이 궁극적 기준을 명료하게 명시하는 작업일 뿐이다. 칸트는 이것을 정언명령(定言命令, kategorischer Imperativ)이라 불렀다. 그것은 어떤 조건하에서만 타당한 가언명령假言命令(hypothetischer Imperativ)이 아닌 무조건적 명령이요, 절대적 명령이다.

 

칸트는 인간이 결코 행복하기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이 정언명령의 의무를 실천하기 위해서 산다고 생각한다. 과연 내가 행복하기 위해서만 사는가? 그럼 이 시간에도 이 고생하고 원고 쓰는 짓을 포기하고 저 천고마비(天高馬肥)의 푸른 하늘 아래 신나게 여행이라도 하련만! 하여튼 행복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는 보다 깊은 고려가 필요하다.

 

그러나 가장 결정적인 문제는 내가 아무리 나의 도덕의지(ein guter Wille)를 실천하고 산다고 해도, 바로 그러한 삶이 나에게 불행을 가져오는 상황! 이것은 현실적으로 우리가 얼마든지 경험할 수 있는 괴리며, 이 문제로 인해 우리의 모든 억울함의 느낌이 발생한다.

 

칸트는 이 억울함의 느낌을 해소하기 위한 유일한 방도로서 신()을 요청(postulation)‘하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신에 의하여 그의 미래적 삶에 있어서 오늘의 선행에 대한 보상이 있으리라는 보장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우리는 결코 도덕의 근거를 확보하는데 실패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칸트의 신의 요청은 사실 불교에 있어서 윤회(saṃsāra)의 요청과 동일하다. 무르띠(T. R. V. Murti)바나라스 힌두대학 철학교수. 동국대 원의범 교수의 선생는 불교의 중심철학인 중관사상(中觀思想)의 종합을 칸트의 순수이성적 종합으로 보았지만, 그보다 불교와 칸트가 더 잘 대비될 수 있는 영역은 실천이성 영역인 것이다. 그 불교적 해결의 가장 명료한 논리가 바로 이 161절에 잘 드러나 있다.

 

흔히 우리가 일상적으로 쓰는 말에 좋은 일 하면 손해본다라는 말이 있다.

 

() ()
좋은 일 하면 손해 본다
조건절 주절

 

 

좋은 일 하면, 손해 본다에서 좋은 일 하는 행위는 손해 보는 것의 조건이 되며, 따라서 좋은 일 함이 원인이 되고 손해 봄이 결과가 된다는 것이 우리의 분석의 상식적 구조이다. 그래서 이 인과관계가 억울하게 느껴진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 윤회연기를 도입하면 이러한 우리의 추론은 단연코 깨어지고 만다. 여기서의 인과관계의 설정이 너무 협애한 현재적 시점에만 국한되어 그 연기적 실상의 전체를 간과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현재 내가 좋은 일을 하고 있는 행위는 미래 어느 시점에선가 반드시 선과(善果)를 거둘 것이며, 현재 내가 손해를 보고 있다는 악과는 과거의 나의 악업(惡業)의 결과일 뿐이라는 것이다.

 

    좋은 일 하면 미래 언젠가
좋은 일이 생기고
과거 언젠가
나쁜 일을 했기
때문이다
손해 보고 있는 것은    

 

 

다시 말해서 우리는 우리의 행위의 인과관계를 기나긴 윤회(saṃsāra)의 과정 속에서 넓게 설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좋은 일 하면 손해본다라는 우리의 현실적 판단은 옳은 듯하지만, 결코 옳지 못하다는 것이다. 이것은 반드시 미신적인 전생이나 후생을 이야기하지 않아도, 나의 삶에 있어서 내가 지금 받고 있는 고통이 곧 나의 현재적 행위의 결과라는 생각을 지양하는데 보다 포괄적인 인식의 지평을 제공하는 훌륭한 논리구조인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좋은 일 해서 손해 보기 때문에 좋은 일을 안할 것이 아니라, 손해 보든 말든 반드시 선업(善業)을 계속 쌓아가는 행위야말로 나의 삶의 정언명령이라는 것이다.

 

이 절은 바로 선남자 선여인이 금강경의 실천으로 인해 현시적으로 핍박을 받는다 해도 그것은 과거 악업의 결과일 뿐, 오히려 그러한 핍박으로 인해 나의 전생의 죄업이 다 씻기고 반드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으리라고 하는 희망에 찬 찬란한 멧세지를 우리에게 던지고 있는 것이다.

 

 

 

 

16-2.

수보리야! 내 돌이켜 생각해보니, 과거의 헤아릴 수도 없는 아승기의 겁의 기나긴 시간 동안에, 연등부처님을 뵈옵기 전에도 이미 팔백사천만억 나유타 수의 많은 부처님을 뵈올 수 있었고, 또 이 분들을 공양하고 섬김에 조금도 헛된 세월이 없었어라.

須菩堤! 我念過去無量阿僧祈劫, 於然燈佛前, 得値八百四千萬億那由他諸佛, 悉皆供養承事無空過者.

수보리! 아념과거무량아승기겁, 어연등불전, 득치팔백사천만억나유타제불, 실개공양승사무공과자.

 

 

아승기(阿僧祇)’‘asaṃkhya(아삼카)’의 음역이며, 그 뜻은 셀 수 없음의 의미다. ‘무수(無數)’, ‘무앙수(無央數)’로 한역(漢譯)된다. 일정한 수치로서는 1059승 혹은 56승으로 알려져 있다. 너무 거대한 수들이기 때문에 때로 정확한 규정이 없다. 여기서는 겁의 시간을 상상할 수도 없을 만큼 늘려놓은 시간개념이다. ‘아승기겁(阿僧祇劫)’, ‘아승기수(阿僧祇數)’ 등의 표현이 법화경(法華經)등에도 보인다.

 

나유타(那由他)’1,000억에 해당되는 매우 큰 수량의 단위. 여기서는 부처님의 숫자를 나타내는 개념으로 쓰였다. ‘팔백사천만억나유타(八百四千萬億那由他)’에 해당되는 산스크리트 원문의 뜻은 팔십사(八十四)의 백천억조배(百千億兆倍)’의 의미로 되어 있다. 불교에서는 다수를 나타낼 때 큰 수의 앞에 팔십사(八十四)를 곱하는 관용적 습관이 있다. 한역은 팔백사(八百四)’로 되어 있다.

 

 

 

 

16-3.

여기 또 한 사람이 있어, 오는 말세에 이 경을 잘 받아 지니고 읽고 외워서 공덕을 쌓는다면, 그 공덕에는 내가 과거세에서 그 많은 부처님들을 공양했던 그런 공덕이 그 백분의 일도 미치지 못할 뿐 아니라, 천만억분의 일 내지 어떠한 숫자의 비유로도 그에 미치지 못하리라.

若復有人, 於後末世, 能受持讀誦此經所得功德, 於我所供養諸佛功德, 百分不及一, 千萬億分乃至算數譬喩所不能及.

약복유인, 어후말세, 능수지독송차경소득공덕, 어아소공양제불공덕, 백분불급일, 천만억분내지산수비유소불능급.

 

 

이것은 부처님의 겸손의 말이 아니다. 우리는 확실히 알아야 한다. 어떠한 종교적 행위의 축적도 단 한 순간의 깨달음의 가치에 미치지 못한다고 하는 이 래디칼한 금강경의 멧세지야말로 모든 관습의 루틴에 빠진 종교인들에게 벼락을 내려치고 있는 일갈일 것이다.

 

 

 

 

16-4.

수보리야! 선남자 선여인이 법이 쇠퇴한 먼 훗날에도 이 경을 받아 지니고 읽고 외울지니, 그 때 그들이 얻을 수 있는 공덕을 내가 만약 자세히 다 말한다면, 보통 사람들은 그것을 듣고 마음이 미쳐 흐트러지거나, 반신반의하여 믿으려 들지 않을 것이다. 수보리야! 마땅히 알지라! 이 경의 뜻은 불가사의하며 그 과보 또한 불가사의하다는 것을!”

須菩堤! 若善男子善女人, 於後末世, 有受持讀誦此經, 所得功德, 我若具說者, 或有人聞, 心則狂亂狐疑不信. 須菩堤! 當知是經義不可思議, 果報亦不可思議.”

수보리! 약선남자선여인, 어후말세, 유수지독송차경, 소득공덕, 아약구설자, 혹유인문, 심즉광란호의불신. 수보리! 당지시경의불가사의, 과보역불가사의.”

 

 

이 절의 마지막 한마디는 마이스터 엑카르트(Meister Eckhart, c. 1260~1328)의 신비주의를 연상케 한다. 모든 신비주의는 신(, God)이라는 언어를 넘어서 신성(神性, Godhead) 그 자체로의 접근을 시도한다. 나 개인의 영혼과 신과의 합일(合一)을 추구한다. 그러나 그 구극에 있어서는 이러한 합일(合一)조차도 거부되는 단절이 드러난다. 신과 나라는 모든 실체가 거부되어야 하는 것이다.

 

금강경의 지혜는 불가사의한 것이다. 모든 지혜의 신비는 주관과 객관, 주부와 술부의 대립이 해소되는 자리에 서있다. 어떠한 언어도 그 자리에 진입할 수 없다. 그것은 진입될 수 없는 전체인 것이다. 그것은 불가분할(不可分割)이요, 그래서 불가사의(不可思議)한 것이다. 금강경은 아주 상식적인 이야기처럼 들린다. 그러나 금강경의 지혜는 우리의 상식으로 영원히 미칠 수 없는 불가사의의 세계에 서있는 것이다. 위대하도다! 금강경의 신비여!!

 

호의(狐疑)’초사(楚辭)한비자(韓非子)에 나오는 선진고경(先秦古經)의 언어로, 의심이 깊어 결심(決心)이 서지 않는 모습을 나타낸다. 여우가 초봄에 언 강물을 건너지 못하고 주저주저하는 모습에서 그 뜻이 유래되었다.

 

다음 제17분부터는, 2분에서 제기되었던 질문, ‘운하항복기심(云何降伏其心, 어떻게 그 마음을 항복받아야 하오리까?)’이 반복되면서 다시 여태까지의 모든 논의들이 반복되어 전개되어 나가기 때문에 바로 이 16분에서 금강경』」의 전반(前半)이 끝나고, 17분부터는 전반의 내용이 반복되는 후반(後半)으로 간주한다. 그러나 금강경을 이렇게 바라보는 것은 그 텍스트에 대한 관점이 너무 상투적인 데서 야기되는 오류이다. 콘체의 말대로 전반이 끝난다면, 132에서 끝난다고 보는 것이 정당하다. 그리고 그 후의 14, 15, 16분은 그 나름대로의 독립적 유기성을 지니는 다른 장르의 작품들이다. 그러니까 앞으로 오는 17분도 내가 보기에는 그런 성격의 유기적 단일체로 보아야 할 것이다. 우리가 복음서를 말할 때, 마태마가, 누가, 요한, 그 하나만을 말하지 않는다. 그 네 개의 중복되는 것들이 나열되어 모두 함께 예수의 복음의 멧세지의 전체를 구성하는 것이다. 금세기의 명화, 쿠로사와의 라쇼몬도 동일한 사건에 대한 여러 사람들의 이야기의 중복으로 구성되어 있다. 금강경의 편집체계는 바로 이러한 중복의 정직성과 다양성과 변주성을 고려하면서 이루어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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