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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경 강해 - 제17분 지혜의 궁극은 나가 없음 본문

고전/불경

금강경 강해 - 제17분 지혜의 궁극은 나가 없음

건방진방랑자 2021. 7. 12. 1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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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지혜의 궁극은 나가 없음

구경무아분(究竟無我分)

 

 

17-1.

이 때에, 수보리가 부처님께 사뢰어 말하였다: “세존이시여! 선남자 선여인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을 냈으면, 어떻게 마땅히 살아야 할 것이며, 어떻게 그 마음을 항복받아야 하오리까?”

爾時, 須菩堤百佛言: “世尊! 善男子善女人, 發阿耨多羅三藐三菩堤心, 云何應住? 云何降伏其心?”

이시, 수보리백불언: “세존! 선남자선여인, 발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 운하응주? 운하항복기심?”

 

17-2.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이르시되: “선남자 선여인으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발하는 자는 반드시 이와 같은 마음을 낼지어다: ‘나는 일체중생을 멸도한다 하였으나 일체중생을 다 멸도하고 보니 실로 멸도를 한 중생이 아무도 없었다라고.

佛告須菩堤: “若善男子善女人, 發阿耨多羅三藐三菩堤心者, 當生如是心, 我應滅度一切衆生, 滅度一切衆生已, 而无有一衆生實滅度者.

불고수보리: “약선남자선여인, 발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자, 당생여시심, 아응멸도일체중생, 멸도일체중생이, 이무유일중생실멸도자.

 

 

해인사본은 목판본이기 때문에 각()의 시간과 수고를 덜기 위해 약자(略字)나 속자(俗字)를 많이 썼다. 그 예()는 이() , () , () , () , () , () 𠩄, () 등이다. 처음에 나오는 이시(爾時)()’는 예외없이 다 ()’로 되어 있다. 금강경이 앞으로 두고두고 많은 사람에게 정본(正本)으로서 읽히게 될 상황을 고려하여, ‘()’를 제외한 모든 글자는 정자(正字)로 환원하였다.

 

23에는 응운하주(應云何住)’로 되어 있었으나, 1절에서는 운하응주(云何應住)’로 되어 있다. 상통(相通)하는 용법(用法)이다.

 

전체적으로 23분의 내용을 압축한 것인데 그 문자를 사용함이 아주 절묘하게 경제적이고, 그 변주의 느낌이 아주 새롭다.

 

1절에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 다음에 ()’이 있으나 2절에는 ()’이 없다. 송본(宋本)ㆍ원본(元本)ㆍ명본(明本) 모두 ()’이 들어가 있으나, 우리 해인사본에는 ()’이 없다. 그러나 해인사본은 뒤에 당생여시심(當生如是心)’이라는 말이 따라오기 때문에 그 중복을 피하여 심()을 뺀 것이며, 이것이 라집역의 원 모습임이 분명하다. 대정은 우리 해인사본을 따랐다. 세조본, 우리나라 통용본들(이기영, 무비, 석진오 등)은 모두 ()’을 삽입하고 있다.

 

 

 

 

17-3.

어째서 그러한가? 수보리야! 만약 보살이 아상이나 인상이나 중생상이나 수자상이 있으면 곧 보살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 까닭이 무엇이뇨? 수보리야!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발한다고 하는 법이 실로 따로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何以故? 須菩堤! 若菩薩有我相人相衆生相壽者相, 則非菩薩. 所以者何? 須菩堤! 實無有法發阿耨多羅三藐三菩堤者.

하이고? 수보리! 약보살유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 즉비보살. 소이자하? 수보리! 실무유법발아뇩다라삼먁삼보리자.

 

17-4.

수보리야! 네 뜻에 어떠하뇨? 여래가 연등부처님의 곳에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을 만한 법이 있었느냐? 있지 아니하였느냐?” “있지 아니하였나이다. 세존이시여! 제가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바의 뜻을 이해하기로는, 부처님께서 연등부처님의 곳에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을 만한 법이 따로 있지 아니하옵니다.”

須菩堤! 於意云何? 如來於然燈佛所, 有法得阿耨多羅三藐三菩堤不?” “不也. 世尊! 如我解佛所說義, 佛於然燈佛所, 無有法得阿耨多羅三藐三菩堤.”

수보리! 어의운하? 여래어연등불소, 유법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불?” “불야. 세존! 여아해불소설의, 불어연등불소, 무유법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

 

17-5.

부처님께서 말씀하시었다: “그렇다! 그렇다! 수보리야! 여래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는다고 하는 그런 법이 도무지 있지 아니한 것이다.

佛言: “如是如是. 三菩堤! 實無有法如來得阿耨多羅三藐三菩堤.

불언: “여시여시. 삼보리! 실무유법여래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

 

 

3절의 끝에 나오는 발아뇩다라삼먁삼보리(發阿耨多羅三藐三菩堤) 다음에도 ()’이 없다. 세조언해본에는 있는데, 우리나라 통용본들이 모두 이 언해본류의 조잡한 개악(改惡)판본을 따르고 있기 때문에 일제히 ()’을 삽입하고 있다. 대정만이 우리 해인사본을 따르고 있다. 일본사람들은 정확하게 우리 고려대장경판본을 따르고 있는데, 우리 한국사람들은 아무도 우리 자신의 해인사판본을 따르고 있지 않다는 이 기초적인 오류를 도대체 무엇으로 설명해야 할 것인가?

 

앞에서 10에서 말한 주제가 더 상세하게 전개되고 있다. 그리고 10분에서는 언급이 없었던 수기(授記, vyākaraṇa)의 구체적 상황과 그 의미가 되씹어지고 있다.

 

 

 

 

17-6.

수보리야! 만약 여래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는다고 하는 그런 법이 있다고 한다면, 연등부처님께서 나에게 수기를 내리시면서, 너는 내세에 반드시 석가모니라 이름하는 훌륭한 부처가 되리라고 하지 않으셨을 것이다. 진실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는다고 하는 법이 없기 때문에, 연등부처님께서 나에게 수기를 내리시면서, 너는 내세에 반드시 석가모니라 이름하는 훌륭한 부처가 되리라고, 이런 귀한 말씀을 해주신 것이다.

須菩堤! 若有法如來得阿耨多羅三藐三菩堤者, 然燈佛則不與我受記, 汝於來世當得作佛, 號釋迦牟尼. 以實无有法得阿耨多羅三藐 三菩堤, 是故然燈佛與我受記作是言, 汝於來世當得作佛, 號釋迦牟尼.

수보리! 약유법여래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자, 연등불즉불여아수기, 여어래세당득작불, 호석가모니. 이실무유법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 시고연등불여아수기작시언, 여어래세당득작불, 호석가모니.

 

 

명본(明本)에는 고려본의 수기(受記)’수기(授記)’로 되어 있다. 일반불교용어로 말할 때는 수기(授記)’라는 표현이 보편적으로 쓰인다. 그런데 수기(授記)’라는 표현은 문자 그대로 (, 증거, 확약, 표시)를 준다()’는 뜻이다. 수기(授記)’라 할 때는 수()준다는 타동사이고 기가 그 목적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수기(受記)’라는 표현은 그 전체가 여()라는 수여동사의 직접목적이 되어 있다. ‘여수기(與受記)’기를 받음을 허락한다.’ ‘받을 기를 주다가 된다. 따라서 우리 해인사본에서는 수()자를 안쓰고 수()자를 의도적으로 쓴 것이다. 우리나라 통용본들은 이러한 맥락의 고려가 없이 이 수를 수로 고친 것들이 대부분이다. 참 딱한 노릇이다.

 

석가모니(釋迦牟尼, Śākya-muni)’라 할 때 석가(釋迦)’는 싯달타가 속한 종족의 이름이다. 종족은 부족보다 작은 단위의 원시적 씨족 공동체를 말한다. 우리나라 성씨마을을 생각하면 쉽게 이해될 것이다. ‘모니(牟尼)’영감을 얻은 자’, ‘예언자’, ‘고행자’, ‘성자의 뜻이다. 석가모니란 석가족의 존경받는 수행자정도의 뜻이 될 것이다.

 

그런데 과연 유법여래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有法如來得阿耨多羅三藐三菩堤)’의 정확한 의미는 무엇일까? 이런 것의 해석에 있어, 모든 번역자들이 적당히 넘어가는데, 내가 생각키에 정확하게 두 가지 뜻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 하나는 콘체의 번역대로 어떤 한 법이 존재하여, 그 존재하는 법에 의하여 여래가 무상정등각(無上正等覺)을 얻는다는 뜻이 있을 것이다(There is not any dharma by which the Tathagata has fully known the utmost, right and perfect enlightenment)콘체의 번역문 맥락은 그러한 법의 존재를 부정하는 맥락이지만, 일단 그러한 법의 존재를 전제로 하고 있다. 콘체의 텍스트와 라집역의 텍스트는 대조할 수 있도록 일치하지 않는다. 라집역은 한문의 맥락 그대로 해석하는 것이 정도이다. 또 하나의 가능성은 여래가 무상정등각을 얻었다고 하는 마음의 상태가 하나의 법인 것처럼 생각한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서 무상정등각을 얻었다고 하는 마음의 상태가 하나의 실체화되는 오류에 관한 것이다. 이러한 법을 부정하게 되면, 무상정등각 그 자체의 존재성이 해소되어 버릴 것이다.

 

 

 

 

17-7.

어째서 그러한가? 여래라고 하는 것은 모든 법이 있는 그대로의 모습일 뿐이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何以故? 如來者, 卽諸法如義.

하이고? 여래자, 즉제법여의.

 

 

이것은 여래가 자신을 여래라 부르는 것에 대한 최종적 선포이다. ‘bhūta-tathatā’를 라집(羅什)()’라는 단 한마디로 번역하였다.

 

모든 존재가 있는 그대로의 모습일 뿐()이라면 사실 깨달음이라는 것이 따로 설정될 수 없는 것이다. 기독교식으로 말하면, 모든 존재가 있는 그대로 있는 것이라면 구원(Salvation)’이라는 개념이 성립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는 문자 그대로 같다이다. ‘여여(如如)’같고 같다이다. 그런데 내가 생각하기에 불교에서 이 여자(如字)만큼 혼란스러운 글자가 없다. 사실 인도사람들이나 일본의 불교학자들은 ()’라는 말을 쓰면서도, 이것을 변화의 배후에 상정되는 불변의 진리라는 식으로 쓸 때가 많다. 다시 말해서 생멸(生滅)하는 현상의 근원을 이루는 불변(不變), 항상 같고 같은 모습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런데 현상의 배후에 항상 같고 같은 그 무엇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이야말로 또 하나의 실체의 오류일 수밖에 없다. 일본학자들은 이러한 오류에 대해 일반적으로 섬세한 감각이 결여되어 있다.

 

그런데 중국어에서의 ()’는 그냥 그러한 모습이다. 다시 말해서 현상과 본체라는 이원적 인식의 구조가 근원적으로 틀 지워져 있지 않은 상태의, 말하자면 아무 틀이 없는 가운데서의 그냥 그러한 모습이다. 이것은 매우 철저한 현상일원론적 해석이다. 나는 금강경은 이러한 철저한 현상일원론적 입장에서 해석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물론 여기 현상이라는 말 자체의 상대적 어폐가 또 개재된다). 바로 이 점이 금강경이 후대에 선의 소의(所依)경전으로 인식된 측면일 것이다.

 

 

 

 

17-8.

만약 어떤 사람이 있어, 여래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다고 말한다면, 수보리야! 실로 깨달은 자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깨달음을 얻었다고 하는 그러한 법이 있지 아니한 것이다.

若有人言如來得阿耨多羅三藐三菩堤, 須菩堤! 實無有法佛得阿耨多羅三藐三菩堤.

약유인언여래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 수보리! 실무유법불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

 

17-9.

수보리야! 여래가 깨달은 바 아뇩다라삼먁삼보리, 바로 그 속에는 진실도 없고 거짓도 없나니, 그러하므로 여래는 설하기를, 일체의 법이 모두 부처님 법일 뿐이라 한 것이다.

須菩堤! 如來所得阿耨多羅三藐三菩堤, 於是中無實无虛. 是故如來說, 一切法皆是佛法.

수보리! 여래소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 어시중무실무허. 시고여래설, 일체법개시불법.

 

 

어째서 이 분()이 여췌(餘贅)라 말하는가? 이 분이 없다면 금강경무상정등각(無上正等覺)이 보다 여실(如實)하게 우리 가슴에 와 닿을 길이 없다. 위대하도다! 금강경의 기자들이여! 그대들은 참으로 위대한 심포니를 지었도다. 깨달음에는 진실도 없고 거짓도 없다. 내가 참된 기독교인이요 네가 사탄이라고 하는 생각도 없다. 사탄도 껴안으면 곧 천사요, 천사도 껴안으면 곧 사탄이라! 진실한 여여(如如)와 허망한 미혹(迷惑)이라는 생각, 그것이 없는 자리가 곧 여래의 무상정등각이다. 오미불이(悟迷不二)!

 

일체의 존재()는 곧 깨달음의 존재다. 일체의 존재는 있는 그대로 각자(覺者), 붓다인 것이다. 풀 한 포기에서 성자의 모습을 보라! 꽃 한 송이에서 예수의 모습을 보라!

 

 

 

 

17-10.

수보리야! 내가 말한 바 일체의 법이라 하는 것도 곧 일체의 법이 아니다. 그러므로 일체의 법이라 이름할 수 있는 것이다.”

須菩堤! 所言一切法者, 卽非一切法. 是故名一切法.”

수보리! 소언일체법자, 즉비일체법. 시고명일체법.”

 

17-11.

수보리야! 비유컨대 사람의 몸이 장대한 것과도 같다.” 수보리가 사뢰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 사람의 몸이 장대하다고 말씀하신 것은 곧, 그 장대한 몸이 장대한 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비로소 장대한 몸이라 이름할 수 있는 것입니다.”

須菩堤! 譬如人身長大.” 須菩堤言: “世尊! 如來說人身長大, 則爲非大身. 是名大身.”

수보리! 비여인신장대.” 수보리언: “세존! 여래설인신장대, 즉위비대신. 시명대신.”

 

 

10()에서 이미 언급되었던 내용인데 그 삽입된 맥락이 좀 퉁명스럽다. 앞의 절과 단절시켜 독립적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여기 인신장대(人身長大)’하다는 것은 단순히 몸의 싸이즈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보살의 덕망이 위대하다는 뜻이다. 즉 그 위대함은 위대함이 아닐 때만 위대함이라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앞에서 말한 깨달음의 상태를 덕성의 위대함에 병치시켜 논리를 전개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나라 정치지도자들을 보면 왜 그렇게 모두 위대해질려고 노력하는 지를 모르겠다. 그다지도 못하는 영어를 그다지도 열심히 하려 하고, 이미 그런 식으로 자기의 잘남을 과시해야 할 하등의 필요가 없는 자리에 앉아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의 정치지도자들은 소위 지식에 대한 콤프렉스를 깨끗이 벗어났으면 좋겠다. 리더십의 본질은 기민한 상황판단과 명석한 가치판단에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판단능력에 있는 것이지 지식에 그 리더십의 본질이 있는 것이 아니다. 고등학교만 나왔으면 어떻구 초등학교만 나왔으면 어떤가? 있는 그대로 소신 있게 꾸밈없이 자신있게 판단을 내릴 줄 아는 사람, 그 여여(如如)의 진실을 우리 국민들은 원하고 있는 것이다. 나의 몸을 크다고 말하지 말라! 나의 위대함은 위대함이 아닐 때만이 그 위대함을 발휘할지니.

 

 

 

 

17-12.

수보리야! 보살 또한 이와 같다. 보살이 만약 나는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중생을 멸도하리라하고, 이와 같은 말을 지었다하면 그를 보살이라 이름할 수 없느니라. 어째서 그러한가? 수보리야! 진실로 이름하여 보살이라 할 수 있는 법이 있지 아니하기 때문이다.

須菩堤! 菩薩亦如是. 若作是言, “我當滅度無量衆生, 則不名菩薩. 何以故? 須菩堤! 實无有法名爲菩薩.

수보리! 보살역여시. 약작시언, “아당멸도무량중생, 즉불명보살. 하이고? 수보리! 실무유법명위보살.

 

17-13.

그러므로 부처는 말하느니라. 일체의 법이 아도 없고, 인도 없고, 중생도 없고, 수자도 없다라고.”

是故佛說一切法, 無我, 無人, 無衆生, 無壽者.”

시고불설일체법, 무아, 무인, 무중생, 무수자.”

 

17-14.

수보리야! 만약 보살이 나는 반드시 불토를 장엄케 하리라고 이런 말을 짓는다면, 그를 보살이라 이름할 수 없느니라. 어째서 그러한가? 여래가 불토를 장엄케 한다고 말한 것은 즉 장엄케 함이 아니다. 그러므로 오히려 장엄케 한다고 이름할 수 있는 것이다.

須菩堤! 若菩薩作是言, 我當莊嚴佛土, 是不名菩薩. 何以故? 如來說莊嚴佛土者, 卽非莊嚴, 是名莊嚴.

수보리! 약보살작시언, 아당장엄불토, 시불명보살. 하이고? 여래설장엄불토자, 즉비장엄, 시명장엄.

 

17-15.

수보리야! 만약 보살이 무아의 법에 통달하면, 여래는 비로소 그를 참으로 보살이라 이름할 수 있다 설하느니라.”

須菩堤! 若菩薩通達無我法者, 如來說名眞是菩薩.”

수보리! 약보살통달무아법자, 여래설명진시보살.”

 

 

12~14절까지는 1034의 주제가 다시 언급되었다.

 

17분도 역시 참으로 위대한 분이라 아니할 수 없다. 그 유례한 오케스트레이션의 클라이막스는 무아법(無我法)’이라는 말로 끝나고 있다. 그 산스크리트 원문은 ‘nirātmāno dharmā’이다. 불교의 종지는 무아(無我), 대승의 종착은 무아(無我), 보살의 종국은 무아(無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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