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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무살 반야심경에 미치다, 2장 한국불교의 흐름과 그 본질적 성격 - 해인사 반살림 본문

고전/불경

스무살 반야심경에 미치다, 2장 한국불교의 흐름과 그 본질적 성격 - 해인사 반살림

건방진방랑자 2021. 7. 13. 1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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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인사 반살림

 

 

그런데 이 90일간의 싸움기간 동안의 한 중간이 되는 45일을 반살림또는 반결제라고도 부릅니다. 그때에는 시작이 반인데 이미 반을 잘 채웠으니 나머지 기간도 아무런 마장(魔障)이 없이 공부 잘 하라는 뜻으로 큰 행사를 합니다. 성찬을 준비하여 대중공양을 하기도 하고, 중요한 것은 방장스님께서 설법을 하시는 것입니다. 당대의 해인사 총림 방장스님은 성철(性徹, 1912~1993, 경허 스님 돌아가신 해에 태어남)이라는 분이었는데, 해방 후 정화운동과정을 통하여 한국불교, 특히 비구승단의 중심점이 되신 분으로 엄청난 권위를 축적해온 거목이었습니다. 학인들은 감히 궐내에서 고개 들고 쳐다보지도 못하는 서슬퍼런 존재였습니다.

 

법문이 이루어지는 곳은 대웅전 앞마당 삼중석탑(三重石塔)이 있는 곳에서 왼쪽으로 기다랗게 서있는 강당(講堂)인 궁현당(窮玄堂: 신라시대 동호대사東護大師가 강법지당講法之堂으로서 시창始創하였다고 하나 자세한 시말은 알 길이 없고, 중수기에 의거하여 이 건물이 성종成宗 21, 1490년에 학조대사學祖大師의 감독으로 중창되었다는 것은 알 수 있다. 관세음보살상이 모셔져 있다. 380칸으로 293평에 이르는 큰 건물이다. 실제로 해인사의 추요樞要라고 상량문에 쓰여져 있다)이었습니다. 당시 동안거였기 때문에 바닥이 따뜻한 궁현당을 사용했습니다. 성철 스님이 나오실 때는 해인사 역내의 비구ㆍ비구니가 다 모이고 또 재가신도들도 참여할 수 있었기 때문에 500여 명 가량이 꽉 들어찬 장엄한 분위기였습니다. 죽비가 쳐지고 입정하면서 법상에 올라앉은 성철 스님은 경상도 사투리 액센트(경남 산청 사람)에 짙은 한문투의 문구로 이루어진 말들을 쏟아냅니다. 이때 법거량(法擧揚, 법의 경지를 겨루어보는 말싸움)을 작정한 명진이 대중 속에서 불쑥 일어나 성철을 향해 외칩니다.

 

저 놈의 성철의 모가지를 한 칼에 쳐서 현당 밖 마당에 내던지면 그 죄가 몇 근이나 될꼬?”

 

참으로 과격한 언사입니다. 그러나 당시 28세였던 명진의 입장에서 보면 참으로 용기 있는 행동이었죠. 아무도 감히 성철의 모가지를 칠 생각은 못했으니까요. 명진이 이 말을 내뱉었을 때는 성철의 답변에 대한 논리적 반박문구들을 몇 초식(招式)은 미리 준비해두었을 겁니다. 그러나 명진의 가장 긴박한 문제는 한학의 밑천이 딸렸다는 데 있었습니다. 한문투는 시적(詩的)이고, 한글투는 산문적이라는 데 그 특성이 있습니다. 시적이라는 것은 논리적 전개를 절단시킨다는 것이죠. 이러한 시적 대응에 명진은 속수무책이었던 것이죠.

 

퇴옹 성철은 이러한 사태에 매우 노련했습니다.

 

백골연산(白骨連山)이다!”

 

우선 명진은 이 간결한 말의 뜻을 정확히 파악할 길이 없었습니다. 이것은 아마도 하이얀 백골들이 쌓여 산을 이루었다는 뜻일 텐데 결국 아무런 의미가 없는 말입니다. 그것은 이미 떨어진 모가지가 산같이 쌓였다는 뜻으로, 조사들의 잘린 모가지가 이미 산처럼 쌓여있는 데 네가 뭘 또 다시 내 모가지를 치겠다고 까부느냐 뭐 이 정도의 뜻이겠죠. 그러나 의미를 따지려고 들면 이미 지는 것입니다. 비논리적인 명제를 논리적으로 대응하려는 순간 이미 경지의 얕음이 폭로되는 것이죠. 아마도 이 말의 진정한 뜻은, “야 이 새끼야! 너 죽었다정도의 의미일 것입니다. 도올이 그 자리에 있었더라면 이런 식으로 응구했을 것입니다.

 

백골이귀공(白骨已歸空)인데 하운산(何云山)이리오?”

(백골은 이미 공으로 돌아갔는데 어찌하여 산을 말하는고?)

 

혹은

 

흑골파산(黑骨破山)”

(흑골이 산을 깨버렸다)

 

하여튼 말이 안 되는 말을 계속 씨부렁거려대면(한문으로 끝없이 대구를 만들 수 있으니깐요) 아마 성철이라 한들 지쳐 나가떨어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논리적 답변을 준비했던 명진의 초식은 일시에 쓸모없는 것이 되어 버렸고, 뜻뜻 머뭇거리는 명진에게 성철은 욕지거리를 퍼붓습니다.

 

저 놈은 행자시절부터 목청을 높이더니 공부는 안 하고 쓸데없는 짓만 도모하고 있구나……

 

한마디로 명진은 대중 앞에 좆돼불은것이죠. 그러나 명진은 계속 칼을 갈았습니다. 그러나 성철은 다시 명진 앞에 나타나질 않았습니다. 성철은 명진을 행자 때부터 매우 사랑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명진이 해인사를 떠난 것을 매우 아쉬워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성철 스님은 명진이라는 인간의 가능성을 명진다웁게 발양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너그러운 교육의 방편을 가지고 있었던 스님은 아니었습니다(해인사의 역시 큰 스님이신 가산 지관 스님께서는 나에게 이 사건을 언급하시면서 명진의 그릇됨이 대단하다라고 말씀하셨죠. 나중에 가산 스님은 총무원장 소임을 맡게 되자 명진을 봉은사 주지로 임명하셨습니다).

 

 

 

 

인용

목차

반야심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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