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야경과 대승불교와 선불교
『금강경』과 『심경』은 어느 쪽이 더 먼저 성립했을까요? 『금강경』은 구라의 질감이 매우 평이하고 비개념적이며 시적이며 반복의 묘미가 매우 리드믹한 느낌을 형성하고 있지요.
“수보리야! 갠지스강에 가득찬 모래알의 수만큼, 이 모래만큼의 갠지스강들이 또 있다고 하자! 네 뜻에 어떠하뇨? 이 모든 갠지스강에 가득찬 모래는 참으로 많다 하지 않겠느냐?”
그런데 반해, 『반야심경(般若心經)』이라는 260개의 문자 속에는 이미 ‘공(空)’이라는 철학용어가 나오고, 오온(五蘊), 18계(十八界), 사성제(四聖諦), 십이지연기(十二支緣起)와 같은 기초이론이 깔려있는가 하면, 용수(龍樹, Nāgārjuna, c.150~c.250)의 중론(中論)의 논리도 이미 반영되어 있는 느낌을 받습니다. 그러니까 당연히 『반야심경(般若心經)』이 『금강경』보다는 후대에 성립한 경전이라고 보아야겠지요. 저의 추론으로는 『금강경』은 AD 50년경, 『반야심경(般若心經)』은 AD 300년경으로 그 성립연대를 잡으면 무방할 것 같습니다. 라집의 『반야심경』 번역(『대명주경』)의 정체성을 의심하게 되면 『심경』 성립연대가 더 후대로 잡힐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논의는 모든 정황을 신중히 고려한 방편적 가설이지, 절대적인 크로놀로지(Chronology, 연대기)는 아닙니다.
나는 여러분께 이와 같이 말했습니다.
“반야경의 성립은 곧 대승불교의 시작이다.”
이 논리를 전제로 해서, 기나긴 불교사를 바라본다면 우리는 또 이런 말을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대승불교의 종착지는 선종이었다.”
선불교라는 것은 대승불교의 모든 가능성을 극단적으로 구현한 실천불교의 정점입니다. 불교는 선종을 통해서만 법난(法難)을 이겨낼 수 있었고, 우리나라 조선왕조시대에만 해도 선종의 독자적이고 실천적인 성격 때문에 그 통불교적인 포용성을 상실하지 않고 순결한 모습을 지켜낼 수 있었습니다.
인용
'고전 > 불경'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무살 반야심경에 미치다, 3장 싯달타에서 대승불교까지 - 대승이란 무엇이냐 (0) | 2021.07.14 |
---|---|
스무살 반야심경에 미치다, 3장 싯달타에서 대승불교까지 - 선불교의 뿌리와 우리 민중의 선택 (0) | 2021.07.14 |
스무살 반야심경에 미치다, 3장 싯달타에서 대승불교까지 - 반야경과 도마복음서 (0) | 2021.07.14 |
스무살 반야심경에 미치다, 3장 싯달타에서 대승불교까지 - 확대와 축약 (0) | 2021.07.14 |
스무살 반야심경에 미치다, 3장 싯달타에서 대승불교까지 - 현장의 『대반야경』이라는 거질 (0) | 2021.07.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