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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무살 반야심경에 미치다, 3장 싯달타에서 대승불교까지 - 대승이란 무엇이냐 본문

고전/불경

스무살 반야심경에 미치다, 3장 싯달타에서 대승불교까지 - 대승이란 무엇이냐

건방진방랑자 2021. 7. 14. 05: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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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승이란 무엇이냐

 

 

자아! 이제 반야심경(般若心經)의 텍스트를 한 자 한 자 짚어가며 해설해야 할 시간이 되었습니다. 반야심경을 펼치면, 제일 첫머리에 관자재보살(觀自在菩薩)’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그런데 이런 단어를 해설하려면 관자재가 무엇인지, ‘보살이 무엇인지, 이런 것을 이론적으로, 역사적으로 파악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 모든 개념들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제일 먼저 대승불교라는 것이 무엇이냐 하는 것부터 뻐개 들어가지 않으면 안 됩니다. 반야경이 대승불교의 시작이라는 사실을 정확히 알기 위해서는 대승불교가 과연 무엇이냐 하는 문제부터 파고들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지요.

 

여기에 큰 문제가 있습니다. 대승불교가 무엇이냐? 이 한 주제만 전문적으로 설하려고 하면 또다시 거대한 단행본을 써도 모자랄 지경입니다. 그렇게 되면 심경에 도달치도 못하고 이 책이 끝나버릴 수가 있습니다. 최소한 25백 년의 불교사 전체가 항상 걸려있는 문제이기 때문에 전문적인 지식의 향연으로 함입하면 헤엄쳐 나올 길이 없습니다. 그래서 저의 작전은 저의 서가에 있는 모든 책을 덮고, 저의 전문적 지식을 닫아버리고 정좌하여 머리에 떠오르는 통찰만을 전달하려 합니다. 소략한 설명이 되어도 심경의 이해를 돕기 위한 대승의 성격만을 이야기한다는 전제 하에 양해하여 주시기를 앙망하겠습니다.

 

우선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하는 대승(大乘)’이라는 용어가 매우 부정확하고 근원적으로 타당치 않은 의미맥락에서 쓰이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해야 할 것 같습니다. 대승불교라 하면 소승불교와 대비되는 상대개념으로 이해되고 있고, 지역적으로 중국ㆍ한국ㆍ일본의 불교는 대승, 버마ㆍ타이ㆍ스리랑카 등 남방의 불교는 소승이다. 이런 식의 도식적 이해는 참으로 엉터리 이해입니다. 대승불교 이전의 부파불교까지를 소승이라고 이해하는 것도 엉터리 이해입니다.

 

대승이라는 것은 소승이라는 개념의 짝으로 태어난 말이 아닙니다. 대승은 그 자체로서 절대적인, 어떤 새로운 불교운동을 지칭하는 말로서 태어났습니다. ‘대승(大乘)’은 문자 그대로 큰 수레(Great Vehicle)’를 의미하는데 그것은 원어로 마하야나(Mahayāna)’라고 합니다. 이것을 음역한 것이 마하연(摩訶衍, 온전한 번역은 마하연나摩訶衍那’)’인데 재미있게도 이 용어가 도행반야경에 나옵니다. 그러니까 마하야나대승이라는 말은 AD 1세기에는 확립된 개념이라는 뜻이죠.

 

그런데 소승히나야나(Hīnayana, Small Vehicle)’라는 개념은 그것보다 최소한 200년 이후에나 나타납니다. 큰 수레라는 말을 쓴 사람들이 이 큰 수레운동에 따라오지 않는 보수적인 사람들을 대비적으로 지칭하여 비하한 말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바라밀다(‘건너간다라는 뜻이 있다)’를 전제로 해서 말한다면 차안(此岸. 이쪽 강둑)에서 피안(彼岸, 저쪽 강둑)으로 가는 배가 큰 것은 대승이고 작은 것은 소승일 텐데, 건너간다는 것만을 목적으로 한다면 큰 수레나 작은 수레나 별 차이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버스와 자가용을 생각한다면 버스는 아무나 탈 수 있지만 자가용은 그 주인과 아는 사람만이 탈 수 있습니다. 버스는 개방적인 데 반해 자가용 세단은 폐쇄적이죠. 버스는 대중이 더불어갈 수 있는 수단이고 자가용은 선택된소수만이 갈 수 있는 수단입니다.

 

수행자들의 성격에 따라 그들이 타는 수레와 관련하여 쓰는 삼승(三乘, yana-traya)이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3종류의 수레라는 뜻이지요.

 

 

 

 

인용

목차

반야심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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