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바타와 클로드 레비스트로스
브리콜라주, 인류의 잃어버린 꿈의 조립법
1. 아마존의 눈물, 아바타의 비명
네가 원하는 것을 가진 자라면 누구든 적(敵)으로 만들어 빼앗아야만 하는가?
-영화 『아바타』 중에서
신화적인 이야기는 변덕스럽고, 무의미하며, 불합리합니다. 또는 그렇게 보입니다. 그럼에도 그런 이야기들이 전 세계적으로 반복해 나타나고 있는 것처럼 보이더군요.
-클로드 레비스트로스, 임옥희 역, 『신화와 의미』, 이끌리오, 2000, 32쪽.
제임스 카메론의 영화 『아바타』를 본 후 우울증 증세를 보이는 관객들이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영화를 보고 난 후 온 세계가 무의미해졌다”, “판도라에 다시 태어날 수 있다면 무엇이든 하겠다”는 네티즌의 반응도 흥미롭다. 키는 3미터를 훌쩍 뛰어 넘고 인간보다 훨씬 뛰어난 육체적 감각과 운동신경을 타노난 나비족들이 자연과 진정으로 교감하며 살고 있는 머나먼 행성 판도라. 그곳은 엄청나게 낯설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어디선가 본 듯한 익숙한 기시감을 자아내는, 환상 속의 공간이다. 무려 162분 동안 3D 입체 영상으로 펼쳐지는 판도라 행성의 삶은 스크린과 관객 사이의 장벽을 녹여버리며 단지 ‘관람’이 아닌 영화 속 세계의 ‘시뮬레이션’ 효과를 톡톡히 맛보게 해준다. 『아바타』는 영화 속 주인공의 삶을 ‘머나먼 3인칭’의 이야기가 아닌 ‘철저한 1인칭’의 직접성으로 경험하게 만드는 것이다.
최첨단 SF영화가 흔히 보여주는 미래 사회의 화려한 스펙터클을 예상하고 『아바타』를 접하는 관객들은 오히려 나비족의 원시적 문명이 보여주고 ‘태고(太古)의 삶’에 매혹된다. ‘대단한 미래’를 감상하러 간 곳에서 오히려 ‘잃어버린 과거’를 만나는 셈이다. 매연으로 찌든 도로에서 자동차를 타고 있으면 나비족을 태우고 창공을 가르며 날아다니던 ‘아크란’이 부러워지고, 가로등 불빛과 네온사인 불빛으로 가득한 도시의 야경을 바라보면 식물들 고유의 알록달록한 야광이 발산되어 진풍경을 자아내는 판도라 행성의 아름다운 밤이 그리워진다.
나비족은 분명 제임스 카메론의 상상력이 만들어낸 부족이다. 나비족의 언어도 언어학자의 도움을 받아 만들어낸 ‘인공어’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비족은 그리 낯설지가 않다. 관객들은 나비족에게서 저마다의 가슴 속에 숨 쉬고 있는 이상적인 원시문명의 공간을, 더 이상 ‘야만’이라 치부할 수 없는 태고의 삶을 향한 노스탤지어를 발견한다. 제임스 카메론이 눈부시게 창조해낸 ‘판도라’는 문명의 습격으로 눈물 흘리고 있는 ‘아마존’의 잃어버린 시간을 재현하는 듯한 슬픈 착시를 일으킨다.
『아바타』는 지금까지 만들어졌던 수많은 SF 영화들과 판타지 영화를 빈틈없이 모자이크하여 집대성한 듯한 극단적인 패러디로도 논란이 되고 있다. 놀라운 것은 ‘하늘 아래 새로울 것 없는’ 그 많은 스토리와 모티프를 과감하고도 노골적으로 패러디한 듯한 이 작품이 자아내는 아찔한 ‘새로움’이다. 말하자면 『아바타』에는 가장 오래된 것과 가장 새로운 것이 미묘하게 공존한다. 『매트릭스』, 『반지의 제왕』, 『늑대와 춤을』 등의 영화는 물론이고 『천공의 성 라퓨타』,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등의 애니메이션까지 모두 떠올리게 만드는 낯익은 신화적 모티피들이 총출동한 『아바타』.
동서양의 신화적 스토리들을 모두 잘게 썰어 믹싱한 듯한 『아바타』는 신기하게도 레비스트로스가 말한 신화의 구조적 동형성을 떠올리게 만든다. 레비스트로스는 이 세상의 모든 이야기들을 ‘신화’와 ‘비신화’로 나눌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오히려 ‘신화 아닌 것’을 골라내기 힘들 정도로, 인류가 창조하고 향유해온 이야기들 속에는 신화적 요소들이 크고 작은 비율로 섞여 있다. 동서양 신화들이 갖추고 있는 가장 흥미로운 요소들을 오려 붙이면 신기하게도 레비스트로스를 비롯한 수많은 인류학자와 신화학자들이 도출해낸 ‘신화의 원형’에 접근하게 된다.
우리는 ‘판타지 영화’를 전형적인 ‘킬링 타임용’ 영화라고 생각하곤 한다. 현실과 거리가 머니까, 허황되니까, 그저 상상일 뿐이니까. 하지만 판타지 영화의 대부분이 전형적인 신화적 서사를 간직하고 있는 것은 왜일까. 신화적 스토리는 언제나 ‘비현실적’이라고 투덜거리면서도 그때마다 매혹되는 이유는, 그 신화적 공간이야말로 우리가 ‘잃어버린 시간’이 숨어 사는 공간이기 때문이 아닐까. 우리의 영혼이 시공간의 제약을 뚫고 자유롭게 비상하는 시간, 바로 신화가 시작되는 순간, 혹은 원시문명 속 야생의 사유가 꿈틀거리는 순간.
초현실주의는, 철저하게 ‘감각의 논리’에 충실하게 되면, 무의식의 영역에서 이루어지는 논리가 마치 자동기계처럼 진행된다는 점을 명백하게 한 바 있습니다. 신화에서 종종 유사한 일이 일어납니다. 뇌 속의 논리에 가해지는 시간적, 공간적 제약이 최대한 제거되면, 신화 특유의 논리가 자유롭게 작동하기 시작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화를 이야기하거나 듣고 있으면 엄청난 자유로 가득 차 있는 시공에 체재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갖게 됩니다.
-나카자와 신이치, 김옥희 역, 『신화, 인류 최고의 철학』, 동아시아, 2003, 2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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