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더 커다란 두려움 때문에 자신의 두려움을 잊다
멈출 수 없는 총알이 관통할 수 없는 벽에 가닿을 때, 우리는 종교적인 체험을 하게 된다. 정확히 바로 이 지점에서 성장이 일어난다. 융은 “상담자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을 찾아라. 그의 다음 성장은 바로 그곳에서 일어난다”라고 말했다. 자아(ego)란 망치와 모루 사이에 있는 금속 같은 것이다.
-로버트 존슨, 고혜경 역, 『당신의 그림자가 울고 있다』, 에코의 서재, 2008, 117쪽.
아시타카에게 ‘관통할 수 없는 벽’은 바로 인간도 들개도 아닌 원령공주였다. 그러나 아시타카도 원령공주의 강철 방어벽 못지않은 힘으로 돌진하는, ‘멈출 수 없는 총알’이었다. 아시타카는 그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에 맞섬으로써 통과의례의 마지막 장벽을, 이제껏 그를 가로막고 있던 영혼의 문턱을 넘어서게 된다. 그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부족의 멸망’이었고 ‘자신의 죽음’이었지만, 이제 아시타카는 원령공주가 맞닥뜨린 더 커다란 두려움을 목격함으로써 자신의 두려움조차 잊어버렸다. 이제 아시타카에게는 최후의 선택이 남았다.
높다란 절벽 위에서 장엄한 숲의 정경을 내려다보며 고뇌에 잠겨 있는 아시타카에게, 모로는 말한다. “고통스럽나? 거기서 뛰어내리면 간단히 끝날 게야. 몸이 회복되면 네 몸의 상처도 함께 날뛸 테니까.” 아시타카는 이미 자신의 ‘작은 상처’ 따윈 잊은 말투로 말한다. “아름다운 숲이군요.” 이제야 몽상의 여유가 생긴 아시타카는 이 숲이 잃어버리기엔 너무 아름답다는 것을, 전쟁터로 초토화해버리기엔 너무도 아름답다는 것을 깨닫는다. 목숨을 건 통과의례를 겪고 있는 아시타카는 자기 부족의 삶만 걱정해도 충분히 바쁜 삶을 살다가, 처음으로 타자의 삶, 다른 동물과 다른 숲과 다른 세계의 삶을 사유하게 된다.
자신의 몸에 총탄을 박은 에보시를, 숲을 초토화시킨 원흉인 에보시를 죽이기 위해 그녀를 기다리고 있다는 모로에게 아시타카는 애원하듯이 말한다. “모로, ‘산(원령공주)’을 놓아줘요. 그 애는 인간이잖아요.” 모로는 그제야 자신이 어떻게 인간 소녀를 키우게 되었는지를 이야기해준다. “그 애는 우리 일족의 딸이다. 숲이 살면 ‘산’도 살고 숲이 죽으면 ‘산’도 같이 죽는 거다. ‘산’은 숲을 침범한 인간들이 내 이빨을 피하려고 내던진 갓난애였어. ‘산’은 인간도 들개도 될 수 없는 가엾고 사랑스런 내 딸이다.”
인간에게 버림받은 소녀를 들개의 딸로 키워낸 모로의 모정이 절절히 묻어난다. 원령공주에 대한 아시타카의 마음을 눈치 챈 모로는 시험하듯 아시타카에게 질문한다. “네가 ‘산’을 구원해줄 테냐?” 아시타카는 말한다. “그건 모르겠지만 그녀와 함께 살아갈 순 있어요.” 그러나 모로는 아시타카의 팔뚝에서 점점 번져가는 선연한 상처를 보고도 원령을 맡길 순 없다. “네가 할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어. 넌 곧 상처로 죽게 될 테니. 날이 밝으면 바로 여길 떠나거라.”
자신이 곧 죽을 운명이라는 사실을 피할 수 없는 아시타카는 숲을 떠나려 하지만, 거대한 멧돼지 군대와 에보시 일족의 혈투가 벌어지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알고 차마 발걸음을 떼지 못한다. 이제 ‘나의 목숨’을 위해서가 아니라, ‘부족의 영광과 번영’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녀가 지키려던 것을 지키기 위해, 그녀의 운명을 ‘함께’ 견뎌내기 위해 아시타카는 목숨을 건다. “네가 ‘산’을 구원해줄 테냐?”라는 모로의 질문은 아시타카의 새로운 미션으로 자리 잡는다. 자신에게 주어진 미션을 처리하러 떠난 여행에서 오히려 또 다른, 더 거대한 미션을 떠안게 된 아시타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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