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아니마와 아니무스의 균형이 깨져버린 숲
한편 에보시의 군대는 지독한 냄새를 풍기는 연기를 피워 올려 멧돼지를 숲 밖으로 유인하여 함정에 빠뜨리려는 계책을 세운다. 모로는 멧돼지 부족의 최후를 예견한다. “옷코토누시는 다 알면서도 정면공격할 거야. 그게 멧돼지의 긍지라고. 마지막 한 마리까지 덤비고 쓰러지겠지.” 원령공주는 모로의 품에 안기며 눈물을 글썽인다. “엄마, 난 떠나야겠어. 옷코토누시의 눈이 되어줄래. 그는 연기 때문에 제대로 달릴 수도 없을 테니.”
모로는 사랑하는 딸 ‘산’과의 마지막 만남이 될 것만 같은 슬픈 예감을 뒤로 하고 딸을 위로해준다. “난 괜찮다. 넌 저 젊은이와 함께 살 수 있는 길도 있을 텐데…….” 원령공주는 단호하게 고개를 젓는다. “인간은 싫어.” 이때 아시타카가 원령공주에게 보낸 목걸이가 다른 들개를 통해 전해지고, 그토록 아름다운 ‘액세서리’를 처음 본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찬사를 뿜어낸다. “아시타카가 내게 이걸? 정말 예쁘다!” 목걸이를 바라보며 감탄하는 원령공주의 표정에서 들개가 아닌 인간 소녀의 달뜬 표정이 스쳐간다.
이제 전쟁은 피할 수 없는 현실이 된다. 인간들은 총포와 화약 뒤에서 자신의 몸을 안전하게 숨긴 채 멧돼지와 들개들의 목숨을 노리고 있고, 모로와 원령공주를 비롯한 들개들과 멧돼지 군대는 목숨을 걸고 총력전을 각오한 채 적진으로 달려간다. 에보시는 그녀의 재산과 땅을 노리는 사무라이들에게, 그리고 시시신의 목을 노리는 국왕에게 ‘이용’당하고 있는 것을 모르고 있다. 짐승보다 숲보다 더 큰 적은 인간이라는 것을, 그녀와 ‘비슷한’ 재화를 노리는 경쟁자들이라는 것을, 그녀는 아직 모른다. 그러나 안다 해도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의 목표는 ‘자연의 자원화’이기에.
아시타카는 ‘숲의 군대’와 ‘인간의 군대’ 사이를 목숨을 걸고 오가면서 최대한 전투와 피해를 막아보려고 한다. 그러나 양측으로부터 돌아오는 반응은 냉담하다. “역시 짐승과 한패로군!” “역시 인간들과 한패였어!” “저 녀석 도대체 어느 편이야?” 그는 이편도 저편도 아닌 존재로서 ‘주어’나 ‘목적어’가 아니라 ‘전치사’와 ‘접속사’처럼 존재와 존재를 이어주고 관계를 맺게 해주는 존재다.
더 이상 ‘사이의 존재’에 머무를 수 없게 되어버린 아시타카는 원령공주와 들개를 도와 죽음을 불사하는 길을 택한다. 그것이 최선의 균형감각임을 스스로 깨달은 것이다. 양편은 대등한 관계로서 갈등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일방적인 공격과 숲의 예정된 파멸로 치닫고 있기에. 한편 멧돼지들은 인간이 쏜 화약과 총탄으로 줄줄이 ‘바베큐’가 되어버리고, 크게 다친 옷코토누시와 원령공주는 시시신의 도움을 청하기 위해 이동한다. 사냥꾼의 무리들은 시시신을 죽이기 위해 죽은 멧돼지 가죽을 덮어 쓰고 멧돼지 떼로 위장한 채 원령공주를 미행한다. 죽은 멧돼지의 가죽을 덮어 쓴 인간 사냥꾼들을 알아보지 못한 옷코토누시는 죽어버린 멧돼지들이 돌아온 줄로 착각하고 기뻐한다.
“전사들! 돌아왔다! 황천 갔던 전사들이 돌아왔어! 나를 따르라! 시시신께 가자!” 분노에 치를 떨며 더 이상 제정신이 아닌 옷코토누시를 말리는 원령공주. “진정하세요! 죽은 게 살아날 리 없어요. 멧돼지들의 가죽을 덮어쓰고 피를 바른 인간사냥꾼들이예요. 제발 멈춰요! 우릴 미끼로 시시신에게 접근하려는 거예요.” 함께 동행하던 들개는 원령공주를 말린다. “옷코토누시는 곧 죽어! 버리고 가자!” 원령공주는 고개를 젓는다. “안 돼! 내가 그를 버리면 그는 재앙신이 될 거야.” 그러나 그녀가 옷코토누시를 버리기도 전에 그는 이미 재앙신이 되어 그녀의 몸까지 함께 재앙신으로 만들어버리려고 한다. 자신의 멧돼지 부족을 잃고 절망에 빠진 옷코토누시는 본래의 용맹스런 영혼을 잃고 ‘나고신’처럼 끔찍한 재앙신으로 변모해버린 것이다. 이제 원령공주조차 죽음의 문턱에 다다랐다. 숲이 지켜야 할 소중한 아니마 그 자체인 원령공주, 그녀의 죽음은 곧 숲의 죽음일 것이다. 아니마와 아니무스의 균형이 완전히 깨져버린 이 숲에는 과연 어떤 파국의 스펙터클이 기다리고 있을까.
현대의 모든 정신분석학 중에서, 칼 구스타프 융의 정신분석학은 가장 명확하게 인간의 심리상태는 그 원초적인 상태에서 쌍성(雙性)이라는 것을 입증해낸 바 있다. 융에 의하면, 무의식이란 억압된 의식이 아니며, 잊힌 추억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제1의 본성이다. 무의식은 그러므로 우리 속에서 남녀양성(男女兩性)의 힘을 유지한다. 남녀양성에 대해 말하는 자는, 이중의 안테나를 가지고, 자신의 무의식의 심층을 건드리고 있다.
-바슐라르, 김현 역, 『몽상의 시학』, 홍성사, 1986, 70~71쪽.
자연은 하나의 신전, 살아 있는 기둥들에서
때때로 뭔지 모를 웅얼거리는 말소리가 새어나온다.
인간이 상징의 숲을 가로지르며 자신의 길을 걷고 있을 때
상징의 숲은 친근한 시선으로 그를 바라본다.
-보들레르, 『조응』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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