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1820년 강진 문인의 작품
작품상에서 서정주체의 현재와 과거로 교차하는 상념은 기복이 일어난다. 자신은 처지가 임(정약용)과 너무도 달라서 “갈까마귀 봉황과 어울려 짝이 될 수 있으랴! / 미천한 몸 복이 넘쳐 재앙이 될 줄 알았지요[寒鴉配鳳元非偶, 菲薄心知過福災]”(제7수)라고 체념의 한숨을 쉬는 것이다. 이 대목에도 인간의 불평등에 대한 문제의식이 담겨 있다. 그리하여 자신과 임과의 사이를 “한번 깨진 거울은 다시 둥글게 될 가망 없다지만[破菱縱絶重圓望]” (제8수)이라고 이미 파경(破鏡)이 왔음을 인정하는데 그럼에도 끝내 승복할 수 없는 점이 있다. “부자간의 천륜마저 어찌 끊는단 말인가[忍斷君家父子親]?” 그 두 사람 사이의 사랑의 결실인 아이의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다. 작품은 제11수에서 정점에 이르는 것 같다.
幷刀三尺決心胸 | 석자 예리한 칼로 이 가슴 도려내면 |
胸裡分明見主公 | 그 속에 임의 자태 정녕코 그려져 있으리. |
縱有龍眠摹畵筆 | 용면거사 솜씨로도 따르지 못할 일 |
精誠自是奪天工 | 사무친 정성이 하늘의 재주를 훔친 건가. |
임을 향한 그리움이 얼마나 사무쳤는지, 자기 가슴속에는 임의 형상이 그야말로 각인(刻印)되었으리라는 것이다. 그 처절한 사실적 형상은 아무리 빼어난 화가의 재능으로도 따를 수 없는 경지여서 하늘의 재주를 훔쳤는가 싶다고 한다. 상념의 극한에서 자살의 위기감이 감도는데 이어지는 시편에서 “이 몸은 천만 번 죽어도 한이 끝내 남으리라. / 저 산마루 바위처럼 망부석이나 되고 지고[此身萬死猶餘恨 願作山頭一片頑]” (제12수)라고 사무친 원한은 죽음을 넘어서 저 임을 그리다가 마침내 돌로 변했다는 망부석 전설과 결합하고 있다.
제11, 12수를 넘어서면 상념의 곡선은 강하한다. 그리하여 조용히 결사로 넘어가게 되는데 서정주체의 죽음의 상념은 소멸 혹은 체념한 상태로 된 것이 아니어서 결사에 이르러서까지 “이 노래 마디마디 절명(絶命)의 소리[歌曲聲聲絶命詞]”라고 일깨운 다음, “남당의 노래 들어볼 것도 없이 / 저버린 마음이야 저버린 사람이 잘 알겠지[不待南塘歌曲奏, 負心人自負心知]”라고 끝을 맺는다. 임을 향해 오금 박는 소리로서 드디어 전편이 끝나고 있다.
다산은 강진시절에 「탐진촌요(耽津村謠)」 「탐진농가(耽津農歌)」 「탐진어가(耽津漁歌)」 3부작을 남겼다. 모두 이 지역민들의 삶의 정조를 7언절구 연작의 형식으로 다채롭게 포착한 악부 계열의 작품이다. 이 향토문학적인 시형식은 바로 강진 고을 출신 문인들에 의해 계승되었던바, 윤종억(尹鐘億)의 「남릉죽지사(南陵竹枝詞)」, 윤정기(尹廷璣)의 「금릉죽지사(金陵竹枝詞)」 등을 꼽을 수 있다. 윤종억은 다산초당에서 양성한 제자의 하나이며, 윤정기는 다산의 외손자로서 고향이 역시 강진이다. 지금 이 남당사 또한 강진 배경의 향토적 시문학을 계승한 것이다.
「남당사」의 경우 앞의 촌요어가나 죽지사 들처럼 서민의 삶의 정경을 카메라의 렌즈가 이동하며 포착하듯 한수 한수 개별적으로 노래한 방식과는 다르다. 전편이 서정적 일관성을 획득한 것이다. 이 특성은 서사적 바탕 위에서 성립되었다. 한문학의 풍부한 소양 위에 서구문학을 섭취해서 나름으로 하나의 문학세계를 이루었던 산강(山康) 변영만(卞榮晩, 1889~1954) 선생이 시조에 관해 했던 발언을 참고해보자. “시조는 서정시이고 서사시의 용기(容器)는 아니다. 부득이 사실을 들게 될 경우에는 이를 정서화해야 쓸 것이다.”(「復活하랴 하는 時調道」, 『色眼鏡』, 『동아일보』 1931, 4. 24) 시조와 유사한 단형시 형태인 절구라는 용기에 어떤 인물의 서사를 담자면 ‘서정화’는 불가피하고도 효과적인 방도일 수 있다.
「남당사」는 언제 누가 지은 것일까? 원자료에 ‘정다산 지음[丁茶山著]’이라는 글씨가 씌어 있는데 이는 그 필체로 보아 뒷사람이 멋대로 써넣은 것이다. 작품 내용으로 보아도 다산 자신이 지었을 이치는 만무하다. 달리 근거가 나오지 않는 한 작자 미상으로 처리할밖에 없다. 지은이는 아무래도 다산에게 직접 가르침을 받은 제자는 아닐 듯한데, 다산초당의 은밀한 일들까지 소상히 알고 있는 점으로 미루어 다산의 제자들과 기맥이 통하는 강진의 한 문인일 것이다. 그리고 창작연대는 다산이 강진을 떠난 이후로부터 오래지 않은 시점으로 추정된다. 요컨대 「남당사」는 1820년 무렵 강진 문인의 작이라고 보면 틀리지 않을 것이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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