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발굴자료 「남당사」에 대하여
- 다산초당으로 돌아온 여자를 위한 노래
1. 인간 정약용의 진솔함이 담긴 자료
지금 소개하는 「남당사」는 절구 16수로 엮인 한시 작품이다. 한문학의 분류 개념으로 말하면 노래 형식의 소악부(小樂府) 계열 내지 죽지사(竹枝詞) 류에 속하는 것이라 하겠다. 전편에 걸쳐 한 여성화자가 자신의 고독하고 애절한 사연을 서정적 방식으로 표현하고 있다. 테마 자체는 서사성이 풍부한데 서정화해서 특이한 감명을 주는 것이다.
이 신자료는 특히 서사와 서정의 결합양상에서, 그리고 여성성의 문제에서 주목할 작품으로 여겨진다. 그런데 작중의 주인공은 ‘다산 소실(小室)’로 밝혀져 있다. 다름 아닌 정약용丁若鏞(1762~1836)이 강진 유배지에서 만난 여자다. 이 자료는 정약용이라는 한 위대한 인간의 삶의 진솔한 일면을 감지할 수 있다는 점에서 각별한 관심이 가기도 한다. 문학이란 무엇을 쓸 것인가와 어떻게 쓸 것인가라는 문제를 생각해보는 사례로 읽을 수도 있겠다.
필자는 기왕에 「정약용의 강진 유배기의 교육활동과 그 성과」라는 제목의 논문을 발표한 바 있다. 지금 이 글은 그의 강진 유배기 생활의 일단을 알아본다는 점에서는 위 논문의 후속편이 되는 셈이다.

2. 다산에게 매년 차를 보낸 여인
필자는 이 자료를 접하기 전에 진작 다산의 여자에 관해 이야기 두편을 들었다. 하나는 벽사(碧史) 이우성(李佑成) 선생으로부터 전해들었는데, 이 이야기는 당초 강진의 귤동(橋洞) 윤재찬(尹在瓚) 옹에게서 나온 것이다.
귤동은 다산초당이 있는 만덕산 산자락의 바다에 면해 있는 윤씨 마을이다. 다산초당은 원래 귤동의 윤단(尹慱, 귤림처사橘林處士)이란 분의 산장이었다. 다산은 윤씨의 특별한 배려로 유배의 처소를 강진읍내에서 이곳으로 옮겼던 것이다. 다산이 이곳 초당에서 거주했던 기간은 1808~18년 귀양살이가 풀려 경기도 마현(馬峴) 본가로 돌아갈 때까지다.
강진읍에서 썰물 때면 갯벌이 되는 바다 옆길을 따라가다가 귤동에서 버스를 내린다. 동백ㆍ차나무 동청수 등 남방의 상록수에 파묻힌 다산초당을 올려다보며 몇발짝 옮기면 동구에 윤재찬 옹의 집이 있었다. 사립문을 들어서면 이초(異草)와 괴석으로 조촐한 정원 가운데 종려수 한그루가 우뚝하다. 그래서 사랑채를 비록 초옥이지만 종려관(棕櫚館)이라 일컬었는데 그 주인이 다름 아닌 윤재찬, 낙천(樂泉)으로 자호하는 분이었다. 윤옹은 혹 누가 다산을 알아보기 위해 찾아오면 자기 집에 온 손님으로 여겨 반갑게 맞아 다산에 관해 말하기를 무척이나 좋아했다(그 시절엔 다산초당을 찾는 사람이 지금처럼 많지 않았다).
필자도 지난 1977년 겨울 종려관에서 하룻밤을 묵은 적이 있었다. 윤옹은 당시 76세의 고령으로 밤이 깊어가는 줄도 모르고 이야기를 하는데 다산을 후세에 전하는 일에 사명감을 가진 듯싶었다.
성균관대 국문학과에서 호남지방으로 처음 답사를 가서 다산초당을 찾은 것은 1970년대 초였다 한다. 당시 벽사 선생과 시인 김구용(金九庸) 선생 등이 종려관에서 윤옹과 일숙을 하게 되었으니 다산 이야기로 꽃을 피웠을 것임은 물론이다. 그 자리에서 시인 구용이 문득 “다산 선생이 여기 계실 적에 혹시 가까이 모신 여자는 없었답니까”라고 물었다 한다. 윤옹은 말문을 닫고 구용의 얼굴을 한참이나 물끄러미 바라보다가는, “지금까지 숱하게 많은 사람들이 여기 와서 선생의 사적에 관해 묻습니다만 그런 질문은 처음 받아보요”하고 다시 망설이던 끝에 “이왕 물으셨으니 내 털어놓으리다”하며 이야기를 꺼냈다는 것이다. 시인 구용은 로렌스의 『채털리 부인의 사랑』을 인류 최고의 문학이라고 주장하는 지론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물음 자체가 가장 구용다운 관점에서 나왔고, 그래서 드디어 비화를 얻어들었다고 하겠다.
윤옹이 들려준 이야기의 요지인즉, 다산 선생이 초당에서 지내실 적에 의복 음식을 수발하며 모신 여자가 하나 있었다는 것이다. 다산 선생과의 사이에서 딸이 하나 있었는데 이름이 홍임(紅任)이어서 그녀를 ‘홍임이 모(母)’라고 불렀다 한다. 다산 선생이 해배되어 돌아가신 뒤에도 홍임이 모는 초당에 남아 있으면서 해마다 찻잎이 새로 돋아나면 따서 정성스럽게 차를 제조해서 경기도 마현으로(강진의 경주인 편을 이용해서) 보내드리곤 했다 한다. 다산 선생이 그 차를 받아보시고 지은 시구가 전해온다면서 윤옹은 읊었다.
| 雁斷魚沈千里外 | 기러기 끊기고 잉어 잠긴 천리 밖에 |
| 每年肖息一封茶 | 매년 오는 소식 한봉지 차로구나. |
요즘처럼 통신수단이 개발되기 전의 옛 세상에는 머나먼 길에 소식을 전해줄 메신저로 기러기를 떠올렸고 혹은 물고기까지 상상했다. 하늘나라에서 죄를 짓고 이별한 견우와 직녀도 1년에 한번은 만난다는데 이들 경우는 재회의 길이 현실적으로 단절된 상태였다. 다만 매년 잊지 않고 올라오는 한봉지 차를 대하게 되는 그 심경이 위의 시구에 함축되어 있는 것이다.

3. 우여곡절 끝에 다산초당에 돌아온 여자
다른 한편은 필자가 우전(雨田) 신호열(辛鎬烈) 선생께 들은 에피소드다. 전라도 장성읍 월평리에 김좌랑(金左郞) 집이 있었다. 울산 김씨 하서(河西) 선생의 후예로 전라도에서 손꼽히는 명족이다. 다산의 소실이 있었는데 무슨 사정으로 월평 김좌랑 집에 맡겨지게 되었다 한다(그 경위는 모호하다), 김좌랑 집의 남자가 그녀를 탐내어 범하려 하자 그녀는 “내 비록 천한 몸이지만 조관을 지낸 분의 첩실이다. 어찌 감히 이럴 수 있느냐?”하고 준절히 항의를 했다는 것이다.
우전 선생님은 향리가 장성과 인근인 함평군 나산면 송암(松巖)마을이었기에 직접 전문(傳聞)하셨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 에피소드에는 특히 불평등한 제도의 모순 때문에 성적 모독을 당하는 여성의 인격에 대한 주장이 부각되어 있다.
위의 두 이야기는 서로 달라서 연결을 지어보기 어려웠다. 강진 땅 귤동의 초당에 있던 여자가 어떻게 장성의 김씨 댁에 맡겨져서 그런 사건이 일어났을까? 이해되지 않아서 필자는 각기 다른 이야기처럼 머릿속에 넣어둔 채로 있었다. 그러다가 「남당사」란 제목의 이 자료를 우연히 발견하게 된 것이다.
「남당사」 첫머리의 산문으로 설명을 붙인 대목에서 “다산의 소실이 내침을 당했는데 양근(楊根) 사람 박생이 가는 편에 안동해 보내서, 강진의 남당 본가로 돌아가게 되었다”라는 말이 자세하지는 않지만 저간의 사정을 대략 짐작게 한다. 홍임이 모는 다산이 해배되어 돌아간 이후 어느 시점인지 경기도로 올라왔으나 받아들여지질 못해 결국 친정으로 돌아가야 하는 신세가 된 것이다. 그리하여 강진까지 먼 길을 여자 혼자 가게 할 수 없어 양근 박생이 가는 편에 딸려 보냈던바 “(박생이) 그녀를 데리고 호남의 장성읍내에 당도해서는 그곳 부자 김씨와 밀모하여 훼절을 시키고자 했다[朴生到湖南之長城府, 與富金陰議奪志]”는 데서 필자의 머리에 담겨 있었던 두 편의 동이 닿지 않았던 이야기가 비로소 하나로 연결될 수 있었다. 홍임이 모가 비극적 주인공으로 전해지게 된 사실이 무엇보다 주목되는 점이다.
이 남당사의 서문에 해당하는 글은 워낙 간결해서 이런저런 사연들이 풀리지 않는다. 악역으로 설정된 양근 박생은 어떤 사람이고 무슨 일로 호남행을 했는지 알 수 없지만 그건 몰라도 그만이다. 그녀가 다산의 본가에서 왜 받아들여지지 못했던가는 아무래도 지나칠 수 없는 의문이다. ‘조축(遭逐)’으로 표현된 그 구체적 경위는 무엇이었을까? 그의 가정 내부에 어떤 사정이 있었던지 이 부분은 전혀 알아볼 길이 없다. 외부의 객관적 정황은 미루어 짐작되는 바가 있는데 당시 다산의 처지는 비록 해배되었다지만 정적들의 눈초리를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정약용이란 존재는 중용될 가능성이 없지 않았던 까닭에 당초 질시ㆍ음해했던 무리들이 그때까지도 남아서 계속 주의하는 시선을 거두지 않고 견제를 가하곤 했던 사실이 다산연보나 자찬묘지명(自撰墓誌銘) 등에 보인다. 홍임이 모녀를 집에 그냥 두기 곤란한 사정이 다산 앞에 있었을 것이다.
윤옹은 홍임이 모 이야기를 들려주고 나서 귤동 윤씨에게 보낸 다산의 편지들을 적어놓은 적바림을 꺼내 보였는데, 그 가운데 홍임이 모를 잘 보살펴달라고 당부하는 말도 들어 있었다 한다.
어쨌건 그녀는 결국 버림받은 신세가 되어 돌아왔지만 임을 향한 뜻은 마음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강진으로 내려와서도 친정집으로 가지 않고 다산이 머물던 초당으로 와서 “날마다 연못과 누대, 초목 사이를 서성거리며 서럽고 원망스런 마음을 달랬”다는 것이다. 이에 다산초당으로 돌아온 여자를 위한 노래 「남당사」가 지어지게 되었다.

4. 서정주체의 의식의 흐름에 따라
「남당사」의 작자는 그 여자의 인생이 너무나도 슬프고 안타깝게 느껴져서 16수를 지었다고 밝혔다. “이 노래는 한결같이 여심을 파악해서 표출한 것이요, 하나도 부풀린 말은 없다[詞皆道得女心出, 無一羨語].” 그야말로 ‘연정(緣情)의 작(作)’이라 하겠는데 시인은 작중 인물을 정확히 대변했음을 특히 강조했다. 16수 모두 진술방식이 예외없이 ‘비극적 주인공’의 독백으로 되어 있다. 시인은 작중인물 속으로 잠적한 모양이다.
문예학에서 서정시는 대개 시인의 자설(自說)이기에 1인칭 화법을 쓰는 것으로 규정한다. 「남당사」의 경우 서정시의 일반적 진술방법과는 다른 형식이다. 그렇다고 서사시라 규정할 수 있을까. 자못 풍부한 서사성을 내포하고 있긴 하지만, 시인과 작중인물이 등치되어서 작중인물의 한숨과 노랫소리만 들릴 뿐이다. “드라마에서는 시인이 자기 인물들의 뒤로 사라져버린다” (R. Wellek & A. Warren, Theory of Literature)는 논리에 의하면 남당사는 다분히 극적인 성격을 보인다 하겠다. 필자는 지금 장르론을 펼치려는 것이 아니다. 다만 「남당사」는 원천적으로 서사성을 내장하고 있으면서 극적인 진술방식을 원용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자 한 것이다. 딱히 구분을 짓자면 서사시라고 하겠거니와, 방금 지적한 두 가지 특징으로 인해 서정성이 고양되는 효과를 초래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남당사」에는 여주인공이 존재하므로 그녀가 위치하는 공간이 있게 마련이다. “남당 물가에 우리 집이 있거늘 / 무슨 까닭으로 다산초당에 머무는고[南塘江上是儂家, 底事歸依舊住茶]?” 남당 여자가 남당으로 돌아가지 않고 다산초당으로 와서 거주하는 사정을 문제적 상황으로 제기한 것이다. 작중의 의미있는 공간으로 남당과 다산초당이 설정된바, 다산초당은 서정주체의 현재적 공간인데 남당을 제목으로 표출했다. 남당이란 곳은 그녀의 친정 고장으로 당시엔 제법 번화한 항구였다 한다. 제2수에서 “남당의 부녀자들 뱃노래 좋아해서[南塘兒女解舟歌]” 그네들의 노랫말을 들어보면 “상인은 먼 길 떠나길 가볍게 여긴다지만 / 상인들은 오히려 가고 오고 잘도 하네요[縱道商人輕遠別 商人猶見往來多]”라는 탄식에, 왜 자기의 임은 오도 가도 않느냐는 원성이 터져나오도록 되어 있다. 제1, 2수는 서사(序詞)에 해당하고, 제3수에서부터 자연스럽게 본장으로 들어간다. 그리하여 제15수에 이르면 “남당 봄물에 안개가 자욱한데 / 늘어진 버들가지 갓 핀 꽃향기가 여객선을 덮네[南塘春水自生煙 渚柳汀花覆客船]”라고 다시 남당으로 돌아와, “여기서 곧바로 하늘가로 길이 통해 / 배에 우리 아이 실으면 소내(정약용의 본가가 있는 지명)로 닿을 텐데[直到天涯通一路 載兒行便達牛川]”라는 이루어질 수 없는 소망으로 전편이 종결에 이른다. 남당을 표제로 삼은 뜻이 서사와 결사에서 선명하다.
제16수의 남당사는 방금 살펴보았듯 플롯으로 볼 수는 없지만 나름으로 짜임새를 갖추고 있다. 서사와 결사를 앞뒤로 두고 가운데 펼쳐진 제3~14수는 본사에 해당하는 것이다. 서사와 결사가 여주인공의 현재 심경이었던 대로 본사에 있어서도 고독과 번뇌를 되새기는 그녀의 심경을 따라서 현재와 과거로 상념이 교차하고 있다. 일종의 의식의 흐름이다.
| 思歸公子我心悲 | 돌아갈 날만 생각하는 임 내 마음은 슬퍼요. |
| 每夜心香上格之 | 매일 밤 피운 향불, 뜻이 하늘에 닿았으리. |
| 那知擧室歡迎日 | 어찌 알았으랴! 모두들 기뻐하는 그날이 |
| 反作兒家薄命時 | 아이의 집에는 기구한 운명이 지어진 때일 줄, |
이처럼 서정주체의 마음은 이별하던 과거로 올라가서 회상하는데 모두들 환희하던 그날이 자기 모녀 앞에는 불행의 시작이 될 줄 어찌 알았으랴고 통탄하는 것이다. 여기서 서정주체의 대자(對者)인 임이 나오며, 또 임과 나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가 나온다. “어린아이 총명도 해라. 그 아비 닮았는가. / 아빠를 부르고 울먹이며 ‘언제 와요?’[幼女聰明乃父如, 喚爺嚌問盍歸歟]” (제4수)라고, 그 아이의 목소리까지 들리는 것이다. 작중 인물 둘이 더 출현한 꼴이지만 임은 서정주체의 상념 속에서만 나오며, 아이는 서정주체의 분신이므로 이 둘은 작중에서 독자적 인물로 등장하고 있다고 간주하기 어렵다.

5. 1820년 강진 문인의 작품
작품상에서 서정주체의 현재와 과거로 교차하는 상념은 기복이 일어난다. 자신은 처지가 임(정약용)과 너무도 달라서 “갈까마귀 봉황과 어울려 짝이 될 수 있으랴! / 미천한 몸 복이 넘쳐 재앙이 될 줄 알았지요[寒鴉配鳳元非偶, 菲薄心知過福災]”(제7수)라고 체념의 한숨을 쉬는 것이다. 이 대목에도 인간의 불평등에 대한 문제의식이 담겨 있다. 그리하여 자신과 임과의 사이를 “한번 깨진 거울은 다시 둥글게 될 가망 없다지만[破菱縱絶重圓望]” (제8수)이라고 이미 파경(破鏡)이 왔음을 인정하는데 그럼에도 끝내 승복할 수 없는 점이 있다. “부자간의 천륜마저 어찌 끊는단 말인가[忍斷君家父子親]?” 그 두 사람 사이의 사랑의 결실인 아이의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다. 작품은 제11수에서 정점에 이르는 것 같다.
| 幷刀三尺決心胸 | 석자 예리한 칼로 이 가슴 도려내면 |
| 胸裡分明見主公 | 그 속에 임의 자태 정녕코 그려져 있으리. |
| 縱有龍眠摹畵筆 | 용면거사 솜씨로도 따르지 못할 일 |
| 精誠自是奪天工 | 사무친 정성이 하늘의 재주를 훔친 건가. |
임을 향한 그리움이 얼마나 사무쳤는지, 자기 가슴속에는 임의 형상이 그야말로 각인(刻印)되었으리라는 것이다. 그 처절한 사실적 형상은 아무리 빼어난 화가의 재능으로도 따를 수 없는 경지여서 하늘의 재주를 훔쳤는가 싶다고 한다. 상념의 극한에서 자살의 위기감이 감도는데 이어지는 시편에서 “이 몸은 천만 번 죽어도 한이 끝내 남으리라. / 저 산마루 바위처럼 망부석이나 되고 지고[此身萬死猶餘恨 願作山頭一片頑]” (제12수)라고 사무친 원한은 죽음을 넘어서 저 임을 그리다가 마침내 돌로 변했다는 망부석 전설과 결합하고 있다.
제11, 12수를 넘어서면 상념의 곡선은 강하한다. 그리하여 조용히 결사로 넘어가게 되는데 서정주체의 죽음의 상념은 소멸 혹은 체념한 상태로 된 것이 아니어서 결사에 이르러서까지 “이 노래 마디마디 절명(絶命)의 소리[歌曲聲聲絶命詞]”라고 일깨운 다음, “남당의 노래 들어볼 것도 없이 / 저버린 마음이야 저버린 사람이 잘 알겠지[不待南塘歌曲奏, 負心人自負心知]”라고 끝을 맺는다. 임을 향해 오금 박는 소리로서 드디어 전편이 끝나고 있다.
다산은 강진시절에 「탐진촌요(耽津村謠)」 「탐진농가(耽津農歌)」 「탐진어가(耽津漁歌)」 3부작을 남겼다. 모두 이 지역민들의 삶의 정조를 7언절구 연작의 형식으로 다채롭게 포착한 악부 계열의 작품이다. 이 향토문학적인 시형식은 바로 강진 고을 출신 문인들에 의해 계승되었던바, 윤종억(尹鐘億)의 「남릉죽지사(南陵竹枝詞)」, 윤정기(尹廷璣)의 「금릉죽지사(金陵竹枝詞)」 등을 꼽을 수 있다. 윤종억은 다산초당에서 양성한 제자의 하나이며, 윤정기는 다산의 외손자로서 고향이 역시 강진이다. 지금 이 남당사 또한 강진 배경의 향토적 시문학을 계승한 것이다.
「남당사」의 경우 앞의 촌요어가나 죽지사 들처럼 서민의 삶의 정경을 카메라의 렌즈가 이동하며 포착하듯 한수 한수 개별적으로 노래한 방식과는 다르다. 전편이 서정적 일관성을 획득한 것이다. 이 특성은 서사적 바탕 위에서 성립되었다. 한문학의 풍부한 소양 위에 서구문학을 섭취해서 나름으로 하나의 문학세계를 이루었던 산강(山康) 변영만(卞榮晩, 1889~1954) 선생이 시조에 관해 했던 발언을 참고해보자. “시조는 서정시이고 서사시의 용기(容器)는 아니다. 부득이 사실을 들게 될 경우에는 이를 정서화해야 쓸 것이다.”(「復活하랴 하는 時調道」, 『色眼鏡』, 『동아일보』 1931, 4. 24) 시조와 유사한 단형시 형태인 절구라는 용기에 어떤 인물의 서사를 담자면 ‘서정화’는 불가피하고도 효과적인 방도일 수 있다.
「남당사」는 언제 누가 지은 것일까? 원자료에 ‘정다산 지음[丁茶山著]’이라는 글씨가 씌어 있는데 이는 그 필체로 보아 뒷사람이 멋대로 써넣은 것이다. 작품 내용으로 보아도 다산 자신이 지었을 이치는 만무하다. 달리 근거가 나오지 않는 한 작자 미상으로 처리할밖에 없다. 지은이는 아무래도 다산에게 직접 가르침을 받은 제자는 아닐 듯한데, 다산초당의 은밀한 일들까지 소상히 알고 있는 점으로 미루어 다산의 제자들과 기맥이 통하는 강진의 한 문인일 것이다. 그리고 창작연대는 다산이 강진을 떠난 이후로부터 오래지 않은 시점으로 추정된다. 요컨대 「남당사」는 1820년 무렵 강진 문인의 작이라고 보면 틀리지 않을 것이다.

6. 마현으로 찾아온 강진 제자에게 써준 글
끝으로 다산의 친필로 전하는 산문 한편을 인용해둔다. 강진 다산초당의 제자 윤종삼(尹鐘參, 자 기숙旗叔, 1798~1878)과 윤종진(尹鐘軫, 자 금계琴季, 1803~79) 형제가 경기도 마현으로 선생을 찾아가 뵈었을 때 직접 써서 준 글이다.
다산초당의 제생(諸生, 제자를 이르는 말)이 열상(洌上, 한강가란 뜻으로 다산의 고향을 일컬음)으로 나를 찾아와서 인사말을 나눈 다음에 나는 물었다.
“금년에 동암(東菴)은 이엉을 새로 했는가?”
“이었습니다.”
“홍도(紅桃)는 아울러 이울지 않았는가?”
“생생하고 곱습디다.”
“우물 축대의 돌들은 무너진 것이 없는가?”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못 속의 잉어 두마리는 더 자랐는가?”
“두자나 됩니다.”
“백련사로 가는 길 옆에 심은 선춘화(先春花, 동백)들은 모두 다 번성하는가?”
“그렇습니다.”
“올 적에 일찍 핀 찻잎을 따서 말리도록 했는가?”
“때가 일러 아직 못 했습니다.”
“다신계(茶信契)의 전곡(錢穀)은 결손이 없는가?”
“없습니다.”
“옛사람 말에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와도 능히 마음에 부끄럼이 없어야 한다’고 하였다. 나는 다시 다산초당에 갈 수 없는 몸이니 죽은 사람과 마찬가지다. 그러나 내가 혹시 다시 가게 되는 때 모름지기 부끄러운 빛이 생기지 않도록 힘써야 할 것이다.”
茶山諸生, 訪余于洌上, 敍事畢, 問之, 曰: “今年葺東菴否?” 曰: “葺.” “紅桃竝無槁否?” 曰: “蕃鮮.” “井甃諸石, 無崩否?” 曰: “不崩.” “池中二鯉益大否?” 曰: “二尺” “東寺路側種先春花, 竝皆榮茂否?” 曰: “然.” “來時摘早茶, 付曬否?” 曰: “未及.” “茶社錢穀, 無哺否?” 曰: “古人有言云, 死者復生, 能無愧心. 吾之不能復至茶山, 亦如死者同. 然倘或復至, 須無愧色焉可也.” 癸未 首夏 道光三年 洌上老人 贈旗叔琴季二君.
다산 선생이 이 글을 쓴 시점은 1823년의 첫여름이다. 자신이 유배기를 보낸 귤동의 다산초당으로 그의 마음이 얼마나 가 있는지 곡진하게 그려지고 있다. 그는 다산초당을 떠나면서 여러 제자들을 위해 결성했던 다신계(茶信契)에 각별한 관심을 표명한다. 자신은 앞으로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처지지만 내가 혹 가게 된다 하더라도 한점의 부끄럼이 없도록 해야 할 것이라는 당부는 실로 비장하고도 엄숙하다. 그에 앞서 자신이 머물렀던 다산초당의 돌 하나, 꽃 하나, 나무 하나까지 빠뜨리지 않고 애정이 닿아 있다. 심지어는 연못의 잉어까지 안부를 물어보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홍임이 모녀에 대해서는 한마디 말도 비치지 않는다. 필시 표면으로 드러내지 못했을 성싶다. “홍도는 아울러 이울지 않았는가?”라는 이 물음 속에 혹시 홍임이 모녀에 대한 마음이 실려 있지는 않을까.
「남당사」의 원문은 표제도 없이 이것저것 필사해놓은 적바림에 들어 있었던 것이다. 거기에는 다산의 저술의 하나인 『아언각비(雅言覺非)」의 일부분이 함께 씌어 있다. 필자는 이 책자를 지난 1999년 서울 인사동의 문우서림에서 얻어보았다. 문우서림의 김영복(金榮福) 사장께 사의를 표한다.
자료상에는 원래 결손된 글자가 더러 있었다. 이런 부분을 벽사 선생의 교시를 받아 보충했으며, 함께 번역문도 선생의 검토를 거쳤다. 강석(江石) 박석무(朴錫武) 형 또한 윤재찬 옹으로부터 홍임이 모에 관한 이야기를 들은 바 있었다 한다(여기까지가 「남당사」를 발굴해서 민족문학사연구 20호(2002)에 소개하면서 붙인 논문이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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