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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올선생 중용강의 - 6장 본문

고전/대학&학기&중용

도올선생 중용강의 - 6장

건방진방랑자 2021. 9. 17. 07: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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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 묻길 즐기다

 

 

子曰: “舜其大知也與! 舜好問而好察邇言,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은 크게 지혜로운 자로다. ()은 묻기를 좋아하고 평소의 일상적인 가까운 말을 곰곰히 살피길 좋아한다.
 
舜之所以爲大知者, 以其不自用而取諸人也. 邇言者, 淺近之言, 猶必察焉, 其無遺善可知.
순임금이 크게 지혜로운 자가 된 까닭은 자기에게 있는 것을 쓰지 않고 남에게서 취하였기 때문이다. 이언(邇言)이란 일상적이고 지근한 말로 순임금은 오히려 살펴 버릴 선이 없었음을 알 수 있다.

 

공자가 말하기를 ()은 참으로 위대한 지성이다. ()은 묻는 걸 좋아하고 가까운 말을 살피기를 좋아했다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이라는 인물이 등장했는데, 공자는 ()와 순()이라는 성왕을 명백히 인식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요(()은 역사적인 인물로만 공자의 머리에 들어 있는 게 아니죠. 요ㆍ순은 공자에게 있어서 중국 문명의 이상적 덕목을 구현한 하나의 파라곤(Paragon, 화신), 즉 아이들 피규어(Ideal figure, 이상적인 인물)입니다.

 

원래는 본문처럼 우제사장(右第四章우제오장(右第五章)이란 말이 없이 문장들이 쭉 붙어 있었던 것인데 주자가 ()을 나눴다고 첫 시간에 설명했었죠. 만약 문장들이 주자 이전처럼 다 붙어 있을 때 어떻게 끊어 읽어야 할까 하는 것도 생각해 보세요. 본문의 지()는 지혜라는 뜻으로, 명사화되는 느낌이 있습니다. 그리고 여()는 감탄사로 동시에 의문의 어감이 있어요(かなお). ()와 같은 겁니다. 그러면 순()이 왜 대지(大知)? 그 대지(大知)의 내용이 호문(好問)과 호찰이언(好察邇言)이죠.

 

엊그제 어느 한의과 학생이 나랑 같이 점심을 하면서 내 강의가 재미있느냐 했더니, “선생님 강의는 다른 강의에 비해 다릅니다. 한의과대 선생님은 기존의 지식체계를 전달하는 데만 급급해서, 어제 저녁까지 부지런히 사전에서 베껴다가 그 지식을 학생에게 덮어 씌울려고 애를 쓰는 데 반해, 선생님은 비록 일방적으로 말씀하시고는 있지만 순간순간 끊임없는 질문이 저에게 생기기 때문에 재미있습니다라고 하더군요.

 

여러분, 물을 줄 아는 것이 학문하는데 중요한 것입니다. 흔히 학문(學問)을 중고생들이 학문(學文)으로 잘못 쓰는데, 학문은 사이언스(Science, 과학)를 배운다(learning)”라는 현대적 의미가 아니고 고전에서 그대로 따온 말입니다. 중용(中庸)에도 뒷부분에 많이 나와요. 보통 문학(問學)이라고 하는 데 학문이란 학()과 문(), 즉 문장을 짓고 그런 게 아니라 묻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하고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는 것이 바로 학문이지요. 질문이 없으면 지식이 생겨날 수 없습니다.

 

우리 대학 다닐 때는 지식 자체가 흔하지 않은 시절이었어요. 원서도 번역서도 없었고 사전도 제대로 없어서 궁금한 게 많았죠. 책방에도 책이 없었을 때니깐 지식 흡수가 쉽지 않았던 겁니다. 그래서 어떤 놈이 무슨 책을 하나 보고 구라를 치면 그게 그렇게 부러운 거야. 그래가지고 맨날 다방에 앉아서 그놈이 지가 읽은 책에 대해 구라치는 걸 들어주는 낭만이 있었어요. 요새는 책이 많이 보편화되었고, 또 함부로 뭐라고 떠들기도 위험해서 그런 낭만은 없을 거예요. 그래서 나도 그때 공부한 레토릭을 좀 써먹었는데, 레토릭을 사용해서 구라를 치면 좋은 게 뭐냐면 여학생 꼬시는데 유효하거든요. 덕분에 나에게도 여자들이 안 꼬이는 편은 아니었어요. 어쨌든 그런 식으로 얻은 지식은 별로 중요하지 않고, 결국 내 것이 되는 지식은 물어서 얻어야 하는 것입니다.

 

 

 

 

62. 이언을 들을 수 있으려면

 

 

매스컴, 테레비 지식의 한계가 바로 그 수동성입니다. 여러분들이 학문을 출발할 때는 항상 목표가 먼 곳에 있는 것처럼 보이죠. 뭐가 뭔지 모르니깐. “어딘가에 엄청난 뭔가 있을 것이다!” 근데 결론적으로는 중용(中庸)에서 강조하는 데로 돌아오게 되죠. 즉 호찰이언(好察邇言), 가까운 데에 있는 평소의 일상적인 말을 살피기를 좋아한다는 데로 귀결됩니다. 그러나 너무 쉽게 가까운 곳으로 돌아오면 안 되죠. 일단 먼 데로 탐험을 떠나란 말이야. 그리고 진지하고 면밀하게 탐험을 하세요. 그러한 기나긴 여정 끝에 결국 가까운 데로 돌아오게 됩니다. 내 인생을 회고해 볼 때, 나는 무한히 먼 여행을 많이 했어요. 나도 상당한 모험가란 말입니다. 이제 나도 나이가 오십이 되어가니까 기우는 시기로 접어들고 있는데, 요즘 들어 이언(邇言)’이라는 게 이해가 가요. 가깝게 느낀다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이제야 좀 알겠습니다.

 

난 대학 때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이번에 출간된 사람의 과학서문 나의 큰형 김용준에서 나의 어린 시절에 대해서도 썼는데, 난 중··대학 시절을 상당한 열등의식 속에서 보냈습니다. 형에 대한 것도 그렇지만 큰형의 애들이 5남매인데 거기서 딸 하나만 빼고 아들 넷이 전부 경기중·고등학교를 들어갔거든요. 큰형도 경기였고, 그래서 5부자가 모두 경기 출신이예요. 그 당시는 그게 쉬운 게 아니죠. 영국의 이튼스쿨보다 더 어려운 거였으니까. 집안에는 조카들의 찬란한 경기 빳지가 우르르르난 그때 큰 형집에서 살았는데, 나 혼자만 보성 출신에다가 서울대 빳지를 못 달았습니다. 그러니깐 내가 이런 환경 속에서 주눅 들어 살 수 밖에 없었죠. 안 그렇겠습니까? 그 중에 큰 조카 한 둘은 나와 나이가 비슷해서 지금도 나를 깔본다고. 저 새끼는 보성에서도 공부 못한 새낀데 지금은 폼을 잡고 다닌다 이거지. 그래서 지금도 걔들은 내 실체를 못 봐요. 참 불행한 일이지만 정말이라구. 컴플렉스가 있다는 것이 반드시 좋은 것은 아닌데, 내 인생에는 그런 환경 속에서 크면서 그 컴플렉스를 극복하지 않으면 안 될 상황이 있었어요.

 

그런데 대학 시절에 배움에 대한 갈망도 생기고 나름대로 깨달음이 생길 때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 “내가 진정으로 인정받는 것은 서울 대학가는 걸로 인정받는 게 아니라 가까운 사람들에게서 먼저 인정을 받는 것이다. 형수, 어머니, 조카들이 나를 무시하지 않고 존경해주는 삶이 이뤄진다면 나의 삶은 위대한 삶일 것이다.” 그래서 그때 나는 방 하나 치우는 것부터 생활을 아주 모범적으로 해나갔습니다. 그렇게 하니깐, 가족들이 나를 대하는 태도가 바뀌어 갔어요. 지금도 전주 하숙방에서 살면서 아침에 이불 개고 먼지 하나 없이 치우는 걸 걸러본 날이 없거든요. 여러분 중에 그런 사람 있어? 어떤 재생은 몇 년 동안 하루도 안 빼놓고 조깅을 했다고 자기소개서에 썼는데, 나도 아침에 조깅하는 것은 물론이고 거기다가 뿌라스해서 청소를 합니다그 학생 매일 방 치웠나? 그게 어려운 거야. 쉬운 일이 아니라고. 난 대학 때부터 일기를 썼는데 지금도 하루도 빠지지 않고 쓰고 있습니다. 그게 피눈물 나는 노력이요. 난 완벽하진 않지만 확실히 보통사람 수준은 넘어요. 이런 게 대학 때부터 들였던 습관 때문이에요.

 

성철(性徹, 1912~1993) 같은 사람들과 비교해 볼 때 최소한 현실적인 김용옥은 그들에게 조금도 부끄럽지 않습니다. “그 사람들이 닦은 도()나 내가 닦는 도()나 비교해서 말할 수 없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자부심이 있습니다. 학문의 용맹정진은 참으로 무서운 데가 있어요. 다음 구절을 봅시다.

 

 

 

 

 

 

 

 

63. 이 아닌

 

 

隱惡而揚善, 執其兩端, 用其中於民, 其斯以爲舜乎!”
()를 숨기고 선()을 드러낸다. 그 양쪽 끝을 잡아서 그 가운데를 백성에게 쓰니, 이것이 바로 순()이 순()이 될 수 있었던 까닭이다
 
然於其言之未善者, 則隱而不宣; 其善者, 則播而不匿. 其廣大光明, 又如此, 則人孰不樂告以善哉?
그러나 그 말이 선이 아닌 것에 있어서는 감춰주고 드러나지 않게 했으며, 선한 것이면 전파하여 숨기지 않았다. 또한 이와 같다면 사람이 누가 기꺼이 선으로 알려주지 않으랴?
 
兩端, 謂衆論不同之極致. 蓋凡物皆有兩端, 如小大厚薄之類. 於善之中又執其兩端而量度以取中, 然後用之, 則其擇之審而行之至矣. 然非在我之權度精切不差, 何以與此? 此知之所以無過不及, 而道之所以行也. 右第六章.
양단이란 여러 논리 중에 같지 않은 극단적인 지극함으로 대개 모든 사물이 다 양단이 있으니, 크고 작음과 두터움과 얇음의 종류가 그것이다. 선한 것 가운데서도 또한 그 양단을 잡아 가운데를 취하여 헤아린 후에 그것을 사용하면 가린 것들이 살펴지며 행실이 지극하여진다. 그러나 나의 저울의 추가 정밀하고 적절하여 어긋남이 없는 게 아니라면 어찌 이에 함께 할 수 있으랴? 이것은 앎이 과함이나 불급함이 없는 까닭이고 도가 행해진 까닭이다. 오른쪽은 제6장이다.

 

여기서 악()은 여러분들이 생각하는 악이 아니에요. 싫은 것, , ‘예요. 악은 모든 사람들이 싫어하기 때문에 악이라고 하는 것이지, 악이라고 따로 규정된 어떤 것이 있는 건 아닙니다. 따라서 모든 로 환원될 수 있지만 으로 환원되는 것은 아니죠. 이렇게 보면 모든 보다 본질적인 개념인데 서양은 이걸 모르고 악()을 실체화시키고 절대화시켰습니다. 악마니 마귀니 하는 식으로 악()이란 것을 명사화시킨 게 서양의 잘못된 윤리관에서 비롯된 거예요.

 

이 문장은 다른 사람에게 있어서 감정적으로 싫을 수 있는 측면들을 숨겨주고 아름다운 측면을 드러내준다. 또 자기에게 있어서도 나쁜 측면은 숨기고 좋은 측면을 드러낸다는 의미로 풀 수 있겠죠. 이것은 여러분들이 인간세상을 살아가는 데 명심해야할 중요한 처세술이며 동시에 포지티브(positive)한 인간학의 측면이에요.

 

 

 

 

64. 양극단을 포괄하다

 

 

극단적인 논리에 갇히지 않고 양극단을 포괄한 후에 말하다

 

그 다음에 집기양단(執其兩端)’ 한다고 했는데 논어(論語) 자한(子罕)편에 子曰 吾有知乎哉 無知也 有鄙夫問於我 空空如也 我叩其兩端而竭焉라고 되어 있죠. “오유지호재 무지야(吾有知乎哉 無知也).” 이것은 두 가지 해석이 있을 수 있어요. 하나는 내가 정말 인텔리라 할 수 있느냐. 나는 사실 무지(無知)한 놈이다라는 겸손의 뜻으로 볼 수 있고, 다른 하나는 사람들이 나를 자꾸만 아는 체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으로 오해를 한다. 내가 그렇게 현학적인 인간이겠는가?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라는 자기를 변호하는 말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둘 중에서 대부분이 후자의 해석을 취하고 있어요.

 

그러면서 무지(無知)의 내용을 그 뒤에 해설하고 있습니다. ‘비부문어아(鄙夫問於我)’ , 항간의 보통사람들이 나에게 질문을 잘 던지는데. 공자를 읽을 때 나 같은 입장에 있는 사람은 공자가 이해가 가능합니다. 나도 제자를 거느리고 사회적으로도 어느 정도는 유명한 사람이어서, 어디를 가든지 사람이 내게 달려와서 질문을 해. “, 김 선생님 아니십니까? 오랜만입니다.”로 시작하면서 나를 자주 만났던 것처럼 말을 건다고.

 

그러면 그때 그런 사람들은 대부분 어떻겠어요? ‘공공여야(空空如也)’, 무기탄(無忌彈)하게 달려드는 소인배들이 많고 심지어는 골빈 새끼들뿐이다 이거야. 그런데 보통 골빈 얘기라는 것은 얘기가 극단적이예요. 양면을 이것저것 계산하지 않고 그냥 돌격해 와버려! “선생님, 책에 이렇게 쓰셨는데 말이 됩니까?” “전에 테레비에 나와서 이렇게 말씀하셨는데 그럴 수가 있습니까?” 어때, 옛날이나 요새나 다 똑같지? “그럴적에는 그 양극단적인 면을 잡아서 확 조져버린[我叩其兩端而竭焉]”다는 거야. 중용(中庸)의 자리에 서서 걔들의 여러 측면을 파악해가지고 단박에 끝내버린다는 겁니다. 니가 이런 말을 해? 그럼 나는 저런 말로 탁 받아쳐 가지고 다시는 두 말할 수 없게 콱 조져준다 이거야. 이게 중용(中庸)의 파워예요. 공자도 그런 상황의 다이내믹스를 누구보다도 강렬하게 체험한 사람일 겁니다.

 

원래 논어(論語)의 이 구절은 공공여(空空如)를 공공여(悾悾如)로 대치하여(劉寶楠說) ‘성실하고 간절한 모습[誠懇貌]’라 해석하고 있습니다. 항간의 보통사람들이 나에게 묻는 모습이 순박하고 간절하다라는 식으로요. 그런데 이렇게 되면 비부(鄙夫)’라는 의미가 잘 전달 안 될 뿐아니라 특별히 이런 명제를 구성하게 된 다이내믹한 내재적 맥락이 사라져 버려요. 이 구절을 나처럼 해석한 사람은 2천여 년 동안 단 한 명도 없어요. 그만큼 인간의 상상력은 빈곤하고 주석이 한번 성립되면 고착되어 버리고 맙니다. 허나 여러분들이 내 해석을 들어보면 알겠지만 분명 내 해석이 더 설득력이 있고 이 말이 발출되게 된 이유가 설명됩니다.

 

 

 

 

 

양극단에 대해

 

집기양단(執其兩端)’이란 말을 보세요. 좌익이니 우익이니 하는 식으로 모든 인간세의 역사는 극단적 아규먼테이션에 의해 흘러가는 경우가 파다합니다. 80년대 PDNL이니 하는 논쟁도 전부 이런 거예요. 게다가 같은 좌에서도 민민투니 자민투니 또 나뉘고, 같은 우에서도 극보수니 진보적 보수니 어쩌고모든 게 양단이란 말이에요. 역사에 대죄를 지은 쾨쾨 묵은 추저분한 퇴물들이 여태 살아 가지고 일선에서 정치를 운운하고 있는데, 그런 사람들은 역사 앞에서 빨리 영예스럽게 자결해야 할 사람들이에요. 신문에 그런 부끄러운 얼굴들이 나와 설치는 것을 보면 참 우리역사가 불행한 역사라는 생각만 들어요.

 

하여튼 여기에서 집기양단(執其兩端)은 천하를 다스리는 방식에서의 양단(兩端)입니다. 앞에서도 얘기했듯이 요·순 같은 사람들이 천하를 진실로 그 가운데를 잡아라[允執厥中]’는 계약 위에서 수수 받고 전수한 거 아닙니까?

 

그래서 치자(治者)는 천하에서 제기되는 모든 양단을 잡아서 거기에 맞는 중()을 백성에게 적용한다 이 말이에요. 이건 단순히 편파적이지 않고 한가운데서 무게나 잡는다는 얘기가 아니라 양극단면까지도 다 포괄한 굉장한 다이내미즘이 있는 말이라 이거죠. 요새 정치라는 게 한가운데서 무게 잡는다고 요리저리 인선이나 하고 앉았고 쓰잘 데 없는 이견들의 조정이나 하고 앉어 있는 건데 그런 건 중용(中庸)의 정치가 아녜요. 중용(中庸)의 정치란 모든 과격한 양단을 포괄하면서도 그것을 뛰어넘는 권위를 가지고 역사의 정의를 구현해나가는 거예요.

 

그 다음에, ‘기사이위순호(其斯以爲舜乎)’ 그렇기 때문에 순()이 바로 지금 우리가 아는 순()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천하 다스리는 치자(治者)는 중용(中庸)적 능력이 없이는 절대 천하를 다스릴 수 없다 이거야. 다양한 양단들이 치고 들어올 때 항상 신출귀몰하게 그것에 대응할 수 있어야 됩니다. 다 치고 받아서 끝내줄 수 있어야 된다는 것이죠. 그런 능력이 있어야 그게 진짜 대통령깜(治者)인데, 이건 원 참 창피한 수준의 인간들만 정치를 한다고 까불고 있으니…… 쯧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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