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장 2. 주어진 상황에서 자득하다
素富貴, 行乎富貴; 素貧賤, 行乎貧賤; 素夷狄, 行乎夷狄; 素患難, 行乎患難, 君子, 無入而不自得焉. 부귀에 처해서 부귀한 바를 행하며, 빈천에 처해서는 빈천한 대로 행하며, 이적(夷狄)에 있을 때에는 이적(夷狄)의 법칙에 따라 행하며, 환난에 있을 때에는 환난한 대로 행하니, 군자는 들어가서 스스로 얻지 못할 바가 없다. 此言素其位而行也. 여기선 그 지위에 처하여 행동한다는 것을 말했다. |
소부귀 행호부귀(素富貴 行乎富貴)
이 말은 부귀가 부귀한 것으로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부귀한 위치에 걸맞는 행동양식과 덕성이 있다 이겁니다. 이것은 부귀가 그 나름대로의 절대적 가치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서, 그에 맞는 덕성을 길러 위(位)와 조화를 이루어야지, ‘부자는 좋은 것이니까 절대로 그 자리를 떠나지 말아라. 유지하기 위해서 이러저러한 방법들을 취해라’라는 식의 이야기는 아닙니다. 그런 부정적이고 현실고착적인 이야기만은 아니고, 부귀에 있는 사람은 부귀의 자리에서 부귀한 사람다운 행동을 하란 거예요. 왜냐하면, 그 사람 나름대로 부귀한 이유가 있으니까.
소이적 행호이적(素夷狄 行乎夷狄)
이적(夷狄)은 풍속이 다른 문화로 ‘로마에 가면 로마법에 따르라(Do in Rome as Romans do)!’라는 속담과 통할 수 있겠죠.
좀 쉽게 예를 들자면, 서로 다른 문화적 상황의 사람들이 만났을 때 일어날 수 있는 미묘한 양상들을 훌륭하게 잡아낸 영화가 있는데, 안소니 퀸이 주연한 「Barren」이라는 영화. 여러분 알아요? 에스키모인들에 대한 내용인데, 그쪽은 우리랑 풍습이 아주 달라요. 먹는 것만 봐도 거기는 구더기를 먹거든요. 단백질 섭취를 위해서라고 하긴 하던데. 잘은 모르겠지만. 나도 그 경지까지 가봐야 하는데. (일동 웃음) 어쨌든, 그렇게 풍습이 다른 사람들에게 선교사가 복음을 전한다고 찾아갑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게 그 사람들은 방문객에 대한 최고의 대접으로 자기의 부인과의 동침을 허락하는 풍습이 있었나 봅니다. 우리 관점으로는 쉽게 이해가 안 가는 부분이지만, 효용가치 측면에서 생긴 차이인 것 같아요. 안소니 퀸의 이야기가, 총이나 탄약은 생명과 관련되니까 빌려줄 수 없지만 부인은 상관없다는 겁니다. 그런데, 선교사가 놀래서 거절을 하니까 에스키모인이 자기의 성의를 무시한다고 모욕을 느껴서 선교사를 죽여 버리죠. 대충의 줄거리는 이런데, 좀 과장되기는 했어요. 에스키모 풍습에 관해서 나중에 들어보니까, 평소에 ‘내 부인이랑 자라!’ 이런 것은 아니더라고. 에스키모인들 생활의 근거가 사냥이잖아요. 그런데, 멀리 사냥을 나가게 되면 몇 달씩 집을 비워 놓게 되니, 그럴 경우에 이웃 사람들에게 “내가 없을 동안에 내 처자식을 잘 맡아달라”고 부탁하면서 집을 비운다니까, 그 말 속에는 ‘내 부인이랑 동침하는 것(sex)도 가능하다, 그래도 좋다’는 뜻도 포함이 되는 거라. 사냥 나가면 죽을 지도 모르는, 생명이 걸려 있는 상황에서, 그들로서는 그건 합리적인(reasonabale) 선택이거든요. 죽고 못 돌아올 가능성까지 전제하고 부탁하면서 “섹스(sex)는 하지 말아라~” 이게 더 웃기는 짓 아닙니까?
그런데, 이런 상황이 우리에게도 적용된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할 겁니까? ‘이적에서 이적을 행하라’라고 했는데. 해야죠. 부인이랑 같이 자야죠! 왜 그걸 거절합니까? 개인적으로 그 영화가 던지는 문제의식 때문에 20년을 고민해 왔지만, 결국은 그런 문제로 그 선교사가 맞아 죽을 이유는 없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복음은 그런 데 있는 게 아니니까요.
소환란 행호환란(素患難 行乎患難)
그래서 말하기를, ‘군자무입이불자득언(君子無入而不自得焉)’ 군자에게도 이런 상황이 자기에게 도래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어. 부귀했던 사람이 빈천해질 수도 있고, 엉뚱하게 에스키모 사회로 갈 수도 있는 것처럼 말이야. 즉, 인생의 모든 변이는 끊임없이 온다는 겁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에서 군자로서 행할 바는 상황 자체를 기피하는 게 아니고 또한 그 상황의 변화에서 하나를 고집하는 것도 아니야. 정답은 없어요. 아까 문제도 에스키모 부인하고 그냥 자면 된다고 말했지만, 그렇게 간단한 문제는 아닙니다. 그러나 선교사는 문화적 상황이 다른 측면에서 일어나는 문제를 윤리적으로만 파악해서 죄악시했기 때문에 그 행동이 옳은 것도 아니예요.
‘군자무입이불자득언(君子無入而不自得焉)’에서 ‘입(入)’자의 의미가 굉장히 중요한데, 그냥 들어가는 것만이 아니고, 그런 상황에 내가 능동적으로 들어간다는 뜻이 강합니다. ‘자득(自得)’의 의미가 강해요. 이 시점에서 군자라면 이런 상황에서도 입이자득(入而自得)하지 않는 바가 없다! 즉, 능동적으로 내가 주체로서 들어가서 거기에서 스스로 얻어내는 것, 부귀하면 부귀한 대로, 빈천하면 빈천한 대로, 환난하면 환난한 대로 거기서 무엇인가를 스스로 깨달아서 얻어내는 그것이 바로 중용(中庸)이라는 말이지. 왜냐하면, 인생은 끊임없이 변하는 것이지, ‘부귀(富貴)면 부귀(富貴), 빈천(貧賤)이면 빈천(貧賤)’이라는 식으로 항상 그렇게 스테이블(stable, 안정적) 고정된 게 아니니까. 어쩌면 자득(自得)을 나처럼 깊게 새기는 사람이 없어서 그런 오해의 소지를 많이 불러 일으켰는지도 모르지만, 이 구절이 단지 현상고착적인 발언으로 받아들여 버리지 않으려면 자득(自得)의 개념이 중요합니다. ‘능동적으로 구체적으로 깨달아서 얻어낸다’는 말이나 ‘현재의 위치에서 그 처지에 맞게 행한다’는 말이나 같은 뜻이라고 새겨야 해요. 계속 반복되는 이야기지만, 인간의 상황이란 건 항상 변하기 마련이니까, 그 상황에 맞게 살 줄을 알아야 하는 것이죠. 내가 여러분과 함께 있을 때는 선생이지만, 원광대학교에 있을 때에는 학생이거든. 그러니까 강의자일 때는 강의자로서의 자세를 갖추어야만 하겠으나, 학생일 때는 또한 학생으로서의 모든 덕성을 지켜야지. 그렇지 않습니까? ‘어떠한 상황이 오더라도 그 상황에서 자득(自得)해 낼 수 있는 사람이야말로 군자다’라는 것이 중용(中庸)의 군자론의 핵심입니다.
在上位, 不陵下, 在下位, 不援上. 正己而不求於人, 則無怨, 上不怨天, 下不尤人. 윗자리에 있어서는 아랫사람을 능멸하지 않으며, 아랫자리에 있으면서 윗사람을 끌어 내리려 하지 않고, 자기 몸을 바르게 하고 남에게 요구하지 않으면, 원망하는 이가 없을 것이니, 위로는 하늘을 원망하지 않으며, 아래로는 사람을 허물치 않는다. 此言不願乎其外也. 여기선 그 지위 바깥의 일을 도모하길 원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했다. |
우리 사회는 기본적으로 아래ㆍ위가 모두 자기역할을 제대로 못하는 게 문제입니다. 위에 있는 사람은 아랫사람을 능멸하려 하고, 아랫사람은 윗사람을 끌어 내리려고 해. 그게 인간평등인 줄 알아요. 민주사회의 인간평등이라는 게 기회의 균등을 의미하는 거지, 일률적으로 똑같다는 건 아닙니다. 또, 기회가 균등하게 주어진다는 것이 모두가 다 똑같다, 동등하다는 의미로 통하는 것도 아니예요. 어쨌든, 민주주의가 역사적으로 이룩한 위대한 업적 중의 하나가 인간의 기회균등을 보장했다는 것이기는 한데, 앞에서도 말했지만 민주주의의 인간평등이란 게 사회적으로 인정되는 인간의 위(位)가 상실되고, 부자지간ㆍ사제지간 같은 기본적인 인간관계의 질서가 허물어지는 상태를 말한 것은 아니지 않느냔 말이야. 도대체, 어떻게 아버지와 아들이 평등해질 수 있으며, 선생과 학생이 평등해질 수가 있겠습니까? 인간세상에서 그런 평등은 영원히 없어요! 있을 수 없는 일이야. 그런 것이 자꾸 혼동되고 제 자리를 못 잡는 것이 바로 우리 사회에서 중용(中庸)의 정신이 상실되고 있다는 징조지. 자유의지, 기회균등과 자기자리에 철저함의 모랄은 절대로 혼동될 수가 없는 것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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