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장 4. 도덕의 일용성
君子之道四, 丘未能一焉: 所求乎子, 以事父, 未能也; 所求乎臣, 以事君, 未能也; 所求乎弟, 以事兄, 未能也; 所求乎朋友, 先施之, 未能也. 庸德之行, 庸言之謹, 有所不足, 不敢不勉, 有餘不敢盡. 言顧行, 行顧言, 君子胡不慥慥爾!” 군자의 도(道)에는 네 가지가 있는데 나는 한 가지도 능하지 못하였다. 자식에게 구하는 바로써 부모를 섬김을 능히 하지 못하였고, 신하에게 구하는 바로써 임금을 섬김을 능히 하지 못하였고, 아우에게 구하는 바로써 형을 섬김을 능히 하지 못하였다. 붕우에게 바라는 바를 먼저 그에게 베푸는 데에 능히 하지 못하였다. 평범한 덕을 행하며 평범한 말을 삼가고, 부족함이 있으면 감히 힘쓰지 아니 할 수가 없고 남는 바가 있어도 그것을 다하지 않는다. 말은 행동을 돌보아야 하고 행동은 항상 말을 되돌아보아야 한다. 그러니 군자가 어찌 독실하지 아니할 수 있겠는가. 求, 猶責也. 道不遠人, 凡己之所以責人者, 皆道之所當然也. 故反之以自責而自修焉. 구(求)는 요구한다와 같다. 도가 사람에게서 멀리 있지 않으니, 무릇 내가 남에게 요구하는 것이 모두 도의 당연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도리어 스스로에게 요구함으로 닦을 수 있다. 庸, 平常也. 行者, 踐其實. 謹者, 擇其可. 용(庸)은 평상이다. 행(行)은 실제적인 것을 실천하는 것이다. 근(謹)은 할 수 있는 것을 고르는 것이다. 德不足而勉, 則行益力; 言有餘而訒, 則謹益至. 謹之至則言顧行矣, 行之力則行顧言矣. 덕이 부족한데도 부지런히 한다면 행동함에 더욱 힘을 받을 것이고, 말함에 남음이 있더라도 하지 않으면 삼감이 더욱 지극할 것이다. 삼감이 지극하면 말은 행동을 돌아보고, 행동함에 힘을 받으면 행동은 말을 돌아본다. 慥慥, 篤實貌. 言君子之言行如此, 豈不慥慥乎! 讚美之也. 凡此皆不遠人以爲道之事. 조조(慥慥)는 독실한 모양이다. 군자의 언행이 이와 같으니, 어찌 독실하지 않겠느냐는 말로 찬미한 것이다. 무릇 이것은 다 사람에게 도를 실천하는 일이 멀지 않다는 것이다. 張子所謂“以責人之心責己則盡道,” 是也. 장자가 말한 ‘사람에게 요구하는 마음으로 자기에게 요구하면 도를 극진히 한다.’라고 한 것이 이것이다. |
내 책 『절차탁마대기만성』에 보면, 구(丘)는 공자의 어렸을 적 이름이라는 설명이 나옵니다. 구(丘)처럼 평평하게 생긴 머리를 가진 짱구였단 말이죠. 그러니까 어렸을 때 공자의 이름은 ‘공짱구’였다는 겁니다. 보통은 ‘공자왈’ 하면서 시작하는데, 이 문장은 왜 ‘구’라는 이름으로 시작하느냐 하면, 자기가 자기 이야기를 할 때는 항상 자기 이름을 부르는 방식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즉, “나 짱구는”하면서 시작하는 거죠.
“미능일언(未能一焉)” 이건 겸손의 표현이죠. 우리가 공자를 떠올릴 때, 형식에 너무 치우친 사람 같아서, 혹시 위선자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겠지만, 나는 공자를 느끼면 느낄수록 참으로 인간적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따뜻하고 섬세해요. 나도 예전에는 공자를 굉장히 싫어하고 노자를 좋아했었는데, 노자는 아직도 좋지만 지금은 공자도 좋아집니다. 공자에 비하면 맹자(孟子)는 모가 좀 났어요. 공자보다 후대 사람으로서, 패기만만한 위상을 가진 사람이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하여튼 논쟁(argument)을 좋아하고 아주 공격적이에요. 그래서 아무래도 공자보다는 격이 하나 떨어지는 느낌이 강합니다. 그러나 맹자(孟子)도 좋지요. 맹자(孟子)가, 제후국들의 패도정치를 막고 이상적인 왕도정치를 펼칠 원대한 꿈을 가진, 불타는 ‘정열’의 사나이라면, 공자는 세상풍파를 다 겪고 인생의 본질을 꿰뚫은 ‘원숙’의 사나이입니다.
『논어(論語)』 「헌문(憲問)」을 보십시오. “子曰 君子道者三 無我能焉 仁者不憂 知者不惑 勇者不懼” 중용(中庸)에서는 군자의 도(道)가 네 가지였는데 『논어(論語)』에서는 세 가지로 나와 있습니다. 그러니까 『논어(論語)』의 지(知)ㆍ인(仁)ㆍ용(勇) 삼도(三道)와 중용(中庸)의 군자지도사(君子之道四)와는 같은 프라그먼트(Fragment, 파편)로 볼 수 있는 거죠.
13장 본문을 해석하면, “군자지도는 네 가지가 있는데, 나 짱구는 하나도 능하지 못하다. 자식에게서 구하는 바로써 부모를 섬기는 데에 아직 능하지 못하다.” 일반적인 용법으로는, 여기에서 ‘이(以)’자의 위치가 ‘소구호자(所求乎子)’ 앞으로 가야 하는데 뒤에 있습니다. 해석할 때 조심하십시오. ‘미(未)’를 ‘아직 ∼ 하지 못하였다’로 해석하는데, 그 ‘아직’이라는 의미가 ‘아직 시작조차 못했다’는 의미가 아니라, ‘아직 도달하지 못하였을 뿐이지 계속해서 능(能)하려고 노력한다’는 뉘앙스가 있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1장에서 중(中)이라는 것은 대본(大本)이고, 화(和)라는 것은 달도(達道)라고 했죠? 중용(中庸)이라는 것은 달도(達道)의 세계, 즉 도달하려고 끊임없이 노력하는 세계의 모습입니다.
“성자천지도야 성지자인지도야(誠者天之道也 誠之者人之道也)”라는 구절이 20장에 나오는데, 이 구절이 중용(中庸)의 이원론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구절입니다. 문법적으로 ‘지(之)’의 해석이 중요한데, 이것을 제대로 하는 사람 없는 것 같아요. 1장 ‘천명지위성(天命之謂性)’의 ‘지(之)’가 ‘명(命)’을 동사화시키는 기능을 갖고 있다고 했죠?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그것의 진행형을 말하는 겁니다. 끊임없이 그런 과정에 있는 것을 강조하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는 거죠. ‘성자(誠者)’는 하나의 대본(大本)의 세계이고, ‘성지자(誠之者)’는 대본(大本)을 향하여 나아가는 세계란 말이예요. 또한 ‘성자(誠者)’는 그 자체가 하늘의 도(道)이고, ‘성지자(誠之者)’ 성해지려고 노력하는 것이 사람의 도리(道理)라는 뜻입니다. 중용(中庸)에 대한 텍스트 크리틱(Text critic) 시간에 이야기 했지만, 20장이 1장과 통하는 연결고리가 바로 이 ‘성(誠)’의 개념에 있는 겁니다. 대본(大本)ㆍ달도(達道)의 이원론과 성자(誠者)ㆍ성지자(誠之者)의 이원론에는 능해지려고 노력하는 인간의 행위가 중요한 개념으로 깔려 있어요.
“所求乎子 以事父 未能也 所求乎臣 以事君 未能也 所求乎弟 以事兄 未能也 所求乎朋友 先施之 未能也”
반성이 많이 되죠, 다들? 그런데 이 모든 것이 도덕적인 자기성찰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게 유교 사회윤리의 대전제가 된다는 것 또한 아시겠습니까? 즉, 효도를 하는 이유가 ‘나는 이 정도로 부모에게 잘한다’는 것을 남에게 나타내려고 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나의 효도하는 행위가 빼~앵 한 바퀴 돌아서 결국에는 나에게로 다시 온다는 믿음 위에 있다는 것이 바로 엄청난 보편주의입니다. 나의 행위가 저 사람과 나와의 관계에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관계와 관계가 이어져서 한 바퀴 돌게 되면 결국 나에게 돌아온다는 거죠. 중용(中庸)적 세계관의 핵심이 바로 이 관계론적인 관점, 즉 모든 것이 관계상의 맥락과 그물망 안에 있다는 겁니다. 또한 그 관계라는 것도 수직이나 수평 한 쪽이 아니라 자식과 부모, 신하와 군주, 형제에서 친구에 이르기까지 상하좌우로 중첩되어 있다는 것도 간과해서는 안 될 부분입니다.
‘용덕지행(庸德之行)’ 이것을 ‘평범한 덕의 행동’으로도 해석할 수는 있지만, ‘지(之)’를 용덕(庸德)을 받는 지시대명사로 보고 ‘행(行)’을 동사로 본다면, “용덕, 그것을 행하고”라고 풀이되죠. 용덕(庸德)이라는 말은 우리가 행하고자 하는 모든 덕성으로, 용(庸)이라는 말의 뜻을 풀어서 다시 보면, 모든 평범한 것, 일상적인 것을 가리킵니다. 주자(朱子) 주(註) 제일 마지막을 보면, ‘장재(張載)가 말한 바, 남을 책망하는 마음으로 자기를 책하면 그 도리(道理)를 다하는 것이라고 한 말이 바로 이를 두고 한 말이다[張子所謂以責人之心 責己則盡道 是也].” 즉, 수기치인(修己治人)의 원리와 상통하는 말입니다. 궁극적으로 모든 도덕의 원리는 나를 책망함에 내재한다는 이 말은 유교의 도덕성이 맑스 베버가 말하는 대로 외면적 치레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내면화하는 데서 완성된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제마가 ‘수세보원’의 결론을 ‘책심책기(責心責氣)’로 내린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치인에 앞서서 반드시 수기가 반추되어야 하며 그것은 일상적 언행의 장(場)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 장에 두드러진 것은 도덕의 일용(日用)성(『주역(周易)』 「繫辭」의 말)이며, 비근성입니다. 이것이 바로 중용(中庸)의 추구하는 세계며 끝까지 양보될 수 없는 존재의 근거지요.
右第十三章. ‘道不遠人’者, 夫婦所能. ‘丘未能一’者, 聖人所不能. 皆費也而其所以然者, 則至隱存焉. 下章放此. 이상은 제13장이다. 도(道)가 사람에게서 멀지 않다는 것은 부부가 능히 할 수 있는 것을 말한 것이고, 나는 하나도 능하지 못하다는 것은 성인(聖人)도 능히 할 수 없다는 말이다. 이 세계는 아주 명백하지만 그 본질은 지극히 은미(隱微)로운 데 있다. 아래 章도 이와 같다. |
도(道)가 사람에게서 멀지 않다는 말은 부부, 즉 평범한 사람 누구나가 능히 할 수 있는 것을 이른 것이고, 공자께서 “나, 짱구는 하나도 능하지 못하다”고 말씀하신 바는 성인(聖人)도 능하지 못하다는 경지에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세계는 전부 아주 명백하고도 흔한 세계이지만, 그 費(명백함)한 것을 費하게 만드는 본질은 지극히 은미(隱微)로운 데 있다[皆費也而其所以然者 則至隱存焉].”
‘하장방차(下章放此)’ 이 다음의 장(章)들은 여기에 따라서 풀어헤쳐 간 것이라는 말입니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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