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장 8. 역사의 지속성이 긴 것으로 역사를 개변하라
質諸鬼神而無疑, 知天也; 百世以俟聖而而不惑, 知人也. 귀신(鬼神)에게 질정해보아도 의심되는 바가 없으면 천을 아는 것이요, 백세의 성인(聖人)을 기다려서 의혹되는 바가 없으면 사람을 안다고 하는 것이다. 知天ㆍ知人, 知其理也. 하늘을 알고 사람을 아는 것은 그 이치를 아는 것이다. |
‘귀신(鬼神)에게 물어보아서 의심이 없으면 그것을 하늘을 안다고 하는 것이요, 백세(百世)로써 성인(聖人)을 기다려서 불혹하면 그것은 사람을 안다고 하는 것이다’ 지천(知天)·지인(知人)이라는 개념이 계속해서 나오고 있는데, 지천(知天)이라는 것은, 요새말로 억지로 한다면 자연과학적인 세계를 가리키는 것이고, 지인(知人)이라는 것은 인문과학과 사회과학적인 세계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대자연의 법칙으로서도 불변의 진리임을 과시해야 하고, 인간세의 법칙으로서도 불변의 진리임을 과시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지천(知天)·지인(知人)입니다.
여기서 『맹자(孟子)』 「이루(離婁)」에 나오는 말을 한번 살펴봅시다. 거기에는 “선성과 후성이 그 규(揆)가 하나다[先聖後聖其揆一也]”라는 말이 나오고 있는데 주자(朱子) 주를 보면 이 규(揆)는 탁(度)라고 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이 규(揆)라는 것은 절도나 법도인데, 먼저 존재했던 성인(聖人)에게나 나중에 나타나는 성인(聖人)에게나 그 법도가 하나라는 것이죠. ‘3천년 이후에 성인(聖人)이 나와도 의혹됨이 없다.’라는 말과 관련지어 볼 때, 이 말은 역사를 관통하여 변하지 않는 불변의 법칙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하나 집고 넘어 갈 것이 있습니다. 사실 중용(中庸)이나 몇몇 고전은 ‘백세이사성인이불혹(百世以俟聖人而不惑)’하는 그런 수준으로 갔습니다. 나나 여러분도 그런 수준을 만들 수 있을지 어쩔지는 모르겠지만, 아마도 그런 수준을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앞에서 군자의 도(道)는 백세(百世) 이후 성인(聖人)이 나와도 의심함이 없는 절대적 진리를 과시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했는데 여기서 여러분은 동시적 생각을 할 줄 알아야 해요. 항상 절대적인 측면과 상대적인 측면은 공유하는 것입니다. 한 면만 생각하면 진리가 완전해지지 않습니다. 우리가 불변의 진리를 생각한다 하면서 백세(百世)를 기다린다고 하거나, 선성(先聖)과 후성(後聖)이 그 규(揆)가 하나라고 하는 말들을 사용하곤 하는데, 여기서 이 말들은 정확한 의미에서의 불변을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맥락을 잘 살펴보면 이 구절들은 역사적 지속성(historical duration)을 말하는 것이라는 점을 알게 될 거예요. 그리고 내가 말하는 진리도 이런 지속성이 긴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서양 사람들은 진리라는 말을 매우 착각해서 수학적 진리 같은 것만을 진리라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1+1=2’, 이런 것을 만고불변이니까 절대적인 것으로 생각하고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테미스토클레스의 판단은 옳았다’ 이런 것은 상대적 진리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식으로 진리를 나눠서 과학적 진리는 절대적인 것이고 역사적인 진리는 상대적인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죠. 그런데 우리 동양인들은 시공을 초월한 진리라는 것을 생각한 적이 없습니다. 시공을 초월한 진리라는 것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진리는 내 몸에서 나온 것인데[本諸身]인데, 내 몸 자체가 시공의 제약 속에 있는 것입니다. 동양인들의 생각으로는 수학적 법칙이라 할지라도 절대로 시공을 벗어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절대적 진리와 상대적 진리는 무엇이겠습니까? 동양인의 생각처럼 모든 진리에 시공이 있다고 할 때, 결국 절대적 진리라는 것은 지속성(duration) 긴 것이고, 상대적 진리라는 것은 지속성이 짧은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불란서의 역사학자 페르낭 브로델(Fernand Braudel, 1902~1986)의 듀레이션(duration) 개념 같은 것이 이와 비슷한데 상당히 정확한 시각이라고 생각합니다. 역사라는 것을 볼 적에 이런 기나긴 지속이라는 개념은 상당히 중요합니다.
그런데 역사에서 지속성이 길다는 것은 무슨 말이겠습니까? 인간은 밥 먹고 똥을 눈다는 것, 이런 것은 사실 굉장히 중요한 지속입니다. 공자(孔子)나 이 김용옥이나 역사적으로 3천년의 시차를 둔 시대의 인물들이지만, 즉 백세(百世)를 기다려서 본다고 해도, 세끼 먹고 똥 눈다는 면은 동일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러한 것에 대한 진리는 지속성이 길 것입니다. 그러므로 식사는 이렇게 해라는 등의 식사 작법에 대한 예의를 작(作)한다면 그것은 지속성이 길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예를 들어 의상에 대한 것은 기호에 따라 자주 변하기 때문에 지속성이 짧을 것입니다. 따라서 역사학을 보든지 다른 진리를 보든지 이 지속성이라는 개념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다시 말해서 짧게 가는 변화와 길게 가는 변화, 이것을 구분해서 볼 줄 알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병(病)도 마찬가지입니다. 병(病) 중에서 가장 지속적인 것이 뭔 줄 아세요? 병(病) 중에 왕중왕(王中王)이 뭔 줄 아세요? 그것은 바로 감기입니다. 감기. 이 세상에서 만고불변의 무서운 질병이 바로 감기인 것이죠. 상한(傷寒)이고 뭐고 다 감기인 거예요. 현대인이나 고대인이나 다 이 감기에는 걸렸던 것입니다. 그러나 암(cancer)같은 것은 또 다릅니다. 이 암은 화학물질이 많이 나면서 생겨난 20세기의 질병입니다. 그러므로 질병에도 지속성이 긴 놈이 있고 짧은 놈이 있는 것입니다. 세균이고 바이러스고 의상처럼 전부 패션이 있는 것입니다. 어떤 때는 호열자(虎列刺, 콜레라)가 확 쓸었다가 없어지고 또 어떤 때는 소아마비가 유행했다가 지금은 드물어지는 등 질병도 계속 변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상대적이다’ ‘절대적이다’하는 이런 말을 혼동을 해서는 안 됩니다.
중용(中庸)적 진리관은 바로 시중(時中)입니다. 모든 것이 반드시 시간 속에, 다시 말해 역사 속에 들어있어야 합니다. 중용(中庸)적 진리관에서는 시중(時中)을 떠난 진리는 없어요. 무슨 절대적인 진리가 있는 것 같이 생각해선 안 된다는 이야깁니다. 헤겔이 말하는 절대정신(Absolute Geist), 이런 것은 있어본 적도 없고 있을 수도 없습니다. 이것은 헤겔이 아주 잘못 본 거예요. 서양인들의 논리적 허구(logical fiction)를 가지고 이야기한 환상에 불과합니다. 그러면 어떤 기독교 신자는 이렇게 질문할 지도 모릅니다. 갓(God)은 불변이 아닌가? 나 김용옥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도 그렇지 않다.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생각도 매번 변하는 것이다. 하나님도 그림을 보면 짜식이 자꾸 옷을 바꿔 입지 않는가? 패션이 변하는 것이 하나님인데 무슨 놈의 하나님이 불변인가?
그러면 그 논리적으로 치밀하기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기하학은? 유클리드 기하학이 절대적인 것 같았지만 또 변합니다. 삼각형 내각의 합이 180도라는 이야기는 이상적 평면을 전제로 한 특수한 경우에 불과한 것이고 공간의 모양이 달라지면 삼각형 내각의 합이 180도가 아니라는 것이 밝혀진 것이죠. 비유클리드 기하학이 등장한 것입니다. 이렇듯 절대적 진리라는 것은 있을 수 없는 거예요.
결국 ‘동양인들이 생각한 것이 맞다’는 말입니다. 문자 그대로의 절대적(絶對的) 진리(眞理)에 대한 추구는 매우 어리석은 것입니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결국 절대적 진리라는 것은 지속성이 긴 진리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결국 중용(中庸)이 하고자 하는 말은 역사의 지속성이 긴 것을 가지고 역사를 개변하라, 바로 이 말이 되는 것입니다. 역사의 지속성이 짧은 어떤 단편적인 진리 가지고 일어나서 “야 내가 왕천하(王天下) 하겠다” 한다면 참으로 웃기는 이야기가 아닐 수 없고, 해봤자 왕천하(王天下)가 될 리가 없습니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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