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장 7. 제왕지덕을 지닌 그대여 성실하라
성실하게 살라
사실 지금까지 『중용(中庸)』은 여러분들에게 엄청난 사회철학을 말했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분명히 내가 강의에서 여러 가지 사회철학적인 측면을 지적했잖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궁극에 가서는 위기(爲己)를 말합니다. 그런데 ‘나를 위한 것이지 남을 위한 게 아니라’는 이런 『중용(中庸)』의 결론은 현대사상이 유교를 비판하는 이유의 하나가 되고 있습니다. 근대사상은 이러한 사회적 규범과 인간의 어떤 내면적인 덕성을 분리해야 된다고 보는 거죠. 마루야마 마사오(丸山眞男)는 이런 마키아벨리즘적인 세계관을 가지고 근세적 작위(作爲)개념으로 오규우 소라이(荻生徂徠)의 ‘작위(作爲)’를 해석해 들어갔어요.
그러나 궁극적으로 『중용(中庸)』의 결론은 사회적 규범과 내면적 덕성이 분리될 수 없다는 겁니다. 내가 사회적으로 아무리 유명인이 됐고 아무리 훌륭한 행위를 했다고 하더라도, 결국은 그 보이지 않는 서북방의 깜깜한 구석에 앉아서도 부끄러움이 없는 자신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어야만 된다[尙不愧于屋漏]는 것이죠. 그리고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그러한 무성무취(無聲無臭)한 자기 내면적 세계에서까지 부끄러움이 없는 완벽성이 있어야만 비로소 중용(中庸)은 완성되는 것이라는 결론이예요. 근세사상은 이러한 중용(中庸)의 내면주의, 덕성주의를 폄하했으나, 우리는 한 번 곰곰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결국은 인간은 그 보이지 않는 내면세계(신독愼獨)가 중용(中庸)적으로 작동되어 아무런 부끄러움이 없어야 된다는 겁니다.
사실 유교에는 굉장한 아이러니가 있습니다. 사실 신독(愼獨)이라는 것은 우리에게 뭘 말해주고 있습니까? 인간이 아무리 왕천하(王天下)한다고 하지만 궁극적으로 자기에게로 돌아올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각인시키고 있습니다. 또한 문명 속에 있다고 하지만, 인간은 결국 외로운 존재입니다. 사실 나도 외롭고 여러분도 외로 와요. 이 문명을 이어가는 사람들은 그 캄캄한 방(무성무취한 세계)에서 홀로 있을 때 외로움에 당면합니다. 그러한 고독 속에서도 인간은 지성(至誠), 즉 지극히 성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아주 쉼이 없이 노력하는 이 천지의 운행과 같이 지성(至誠)하다! 그러면 이 지성(至誠)한 것은 무엇입니까?
내가 대학에 다닐 때 중용(中庸)을 읽으면서 내린 결론은 아주 간단해요. 이렇게 말하면 상당히 시시한 것 같지만, 결국 중용(中庸)이라는 것은 성실하게 사는 겁니다. 중용(中庸)은 인간은 고독한 존재라는 명제로 1장이 출발했습니다. 신독(愼獨)! 모든 것이 나의 내면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면서 중용(中庸)은 ‘천명지위성(天命之謂性)’에서 시작하여 도(道)와 교(敎)에까지 이 문제를 연결시키고, 문명과 자연의 세계를 왔다 갔다 하면서 그 이상론을 펼쳐갔지만, 결국 “인간은 성실할 수밖에 없다!”는 것으로 끝내고 있습니다.
여기 재미난 질문이 하나 있어요. 여기서 말하는 성인(聖人)들은 지금으로 말하면 통치자들이잖아요? 그러면 이 중용(中庸)도 통치자를 위한 철학이 아닙니까? 그런데, 쉽게 얘기해서, 과연 중용(中庸)은 김영삼을 위한 철학이냐? 이 말이예요. 중용(中庸) 전체를 놓고 생각해 볼 때, 이것은 성인(聖人)이라는 예악(禮樂)을 작(作)하는 사람을 대상으로 해서 설교하고 있는 거 아닙니까? “백세(百世)를 기다려서 성인이 다시 나와도 이 내 말은 변하게 하지 못할 거라는 생각이 들 때 작(作)을 해라!”라는, 그러한 어마어마한 ‘작예악(作禮樂)’의 사상을 말하고 있잖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용(中庸)은 모든 지성인들을 대상으로 해서 쓰여진 책입니다.
그러니까 유교는 사실 ‘제왕지학(帝王之學)’임에도 불구하고 모든 사람에게 ‘제왕지덕(帝王之德)’을 가질 것을 요구하는 철학이예요. 여기에 “유교는 엘리티즘(Elitism)의 제왕철학이다”라고만 말할 수 없는 보편주의가 있습니다. 중용(中庸)을 읽는 사람들은 모두 제왕의 덕(德)을 갖추게 되는 겁니다. 거기서 문제는 위(位)를 얻느냐 못 얻느냐의 차이입니다. 제왕의 자리(位)라는 것은 후에 어떻게 됐습니까. 나중에는 세습화되었는데 중용(中庸)의 유교이상론에는 세습화란 게 없거든요. 그러니까 여기서는 세습되는 왕위를 놓고 하는 얘기가 아닙니다. 이것은 모든 사람들이 추구할 수 있는 제왕지학(帝王之學)이면서 동시에 치자(治者)의 학문이고, 작예악(作禮樂)하는 사람들의 철학이란 말입니다. 오늘날 현대적인 맥락에서 본다면, 모든 지성인들이 이러한 제왕지덕(帝王之德)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서 위(位)를 얻게 되면 여러분들은 작(作)할 기회를 얻는 겁니다. 어떤 면에서는 오늘날 민주주의의 이상이나 기본적으로 다를 바 없어요. 이러한 확고한 리더쉽이 있어야만 인간세 뿐만 아니라 천지까지도 같이 올바로 경영이 된다는 겁니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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