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장 6. 위인지학이 아닌 위기지학으로
詩云: “予懷明德, 不大聲以色.” 子曰: “聲色之於以化民, 末也.” 詩云: “德輶如毛.” 毛猶有倫. “上天之載, 無聲無臭,” 至矣! 『시경(詩經)』에 이르기를, ‘나는 밝은 덕을 품었으니 음성과 얼굴빛을 대단치 않게 여긴다’고 하였는데, 이에 대해 공자가 말씀하시기를, ‘음성과 얼굴빛은 백성을 교화시키는 데 있어서는 말엽적인 것이다’라고 하셨다. 『시경(詩經)』에 ‘덕은 가볍기가 터럭과 같다’고 하였는데, 그 터럭도 비교할 만한 것이 있으니, ‘상천의 일은 소리도 없고 냄새도 없다’는데 이르러야 지극하다 할 것이다. |
‘시운 여회명덕 부대성이색(詩云 予懷明德 不大聲以色)’
이것은 『시경(詩經)』 「대아 황의(大雅 皇矣)」 편(篇)에서 나온 것으로 상제(上帝)가 문왕에게 고하는 말로 되어 있습니다. 여(予)는 상제를 말하니까, ‘여회명덕(予懷明德)’은 상제 자신이 ‘나는 명덕(明德)을 가슴에 품고 있다.’라고 말한 것이죠. ‘부대성이색(不大聲以色)’은 문자 그대로 말하면, ‘부대(不大)’는 ‘대단치 않게 생각한다’란 얘기고, ‘성이색(聲以色)’은 ‘음성과 얼굴빛’입니다. 이 성색(聲色)이라는 것은 내면적인 덕(德)이 아닌 ‘외면적으로 표현하는 것’을 뜻해요. “나는 밝은 덕을 가슴에 품었으니 음성(音聲)과 안색(顔色)을 대단치 않게 여긴다.”
주자 주를 보면, “성(聲)과 색(色)을 대단치 않게 여긴다는 말을 인용하여, 윗문장에서 말한 이른바 ‘불현지덕(不顯之德)’이라는 것의 의미를 명백히 한 것이다[引之 以明上文所謂不顯之德者 正其不大聲與色也].”라고 했습니다.
‘자왈 성색지어화민 말야(子曰 聲色之於化民 末也)’라고 했습니다.
‘시운 덕유여모 모유유륜(詩云 德輶如毛 毛猶有倫)’
그러니까, 중용(中庸)은 ‘덕(德)의 가볍기가 터럭과 같다’라고 『시경(詩經)』 「증민(烝民)」을 인용했는데, 그 다음에 ‘모유유륜(毛猶有倫)’라고 했습니다. 터럭[毛]이라는 건 아직도 ‘륜(倫)’, 그 비교될 짝이 있단 말입니다. 비교될 동아리가 있다는 거예요. 터럭이라고 표현한 것은, 아까 내가 그림을 가지고 얘기했듯이, 하늘의 광대함을 표현하려고 화가가 거대한 화면에 조그만 갈매기 하나가 날아가는 것을 그려 놓은 것과 같은 것입니다. 이처럼 인간의 덕이라는 것도 그 광대한 덕성의 세계에서는 이 조그만 갈매기와 같은 거란 말입니다. 그런데, 이 터럭만한 것이라 할지라도 여전히 비교할 만한 건덕지가 있어요.
‘상천지재 무성무취 지의(上天之載 無聲無臭 至矣)’
이 말은 『시경(詩經)』의 「대아 문왕(大雅 文王)」 편(篇)에서 나온 것으로서, ‘상천지재는 무성무취라는 데 이르러야 비로소 지극하다 할 것이다!’ 자! 이렇게 『시경(詩經)』의 구절로서 중용(中庸)이 끝나고 있는 겁니다. 이게 무슨 말인지 아시겠어요? 비록 중용(中庸)이 ‘천명지위성(天命之謂性)’으로부터 시작해서 중간에 수많은 프로세스를 거쳤지만, 결국 마지막에 결론은 뭘로 귀결되고 있습니까? 바로 신독(愼獨)이예요, 신독(愼獨)! “홀로 있을 때 삼가라!” 이 홀로 있다는 것은 인간의 내면적 세계를 말하는 것으로, 이것은 앞에서 말한 경(敬)의 세계요, ‘주일무적(主一無適)’하는 세계를 애기하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서 도달하고자 궁극적인 것은 뭡니까? 그 어떤 터럭과도 비교될 수가 없는 최후의 무성무취한, 소리도 없고 냄새도 없는 그런 아주 인비저블(Invisible, 눈에 보이지 않는)한 세계입니다. 이런 세계까지 가야만 중용(中庸)은 완성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요 조그만 갈매기가 날아가다가 이것마저 사라져 버리고 마는 바로 그런 데서 중용(中庸)은 이루어지는 거예요.
詩, 大雅「皇矣」之篇. 引之以明上文所謂不顯之德者, 正以其不大聲與色也. 又引孔子之言, 以爲聲色乃化民之末務. 今但言不大之而已, 則猶有聲色者存, 是未足以形容不顯之妙. 不若「烝民」之詩所言德輶如毛, 則庶乎可以形容矣. 而又自以爲謂之毛, 則猶有可比者, 是亦未盡其妙. 不若「文王」之詩所言“上天之載, 無聲無臭,” 然後乃爲不顯之至耳. 蓋聲臭有氣無形, 在物最爲微妙, 而猶曰無之, 故惟此可以形容不顯ㆍ篤恭之妙. 非此德之外, 又別有是三等, 然後爲至也. 시는 「대아, 황의」편이니 이것을 인용하여 윗글의 이른바 ‘불현지덕’이라는 게 바로 음성과 얼굴빛을 대단치 않게 여기는 것임을 밝혔으며, 또다시 공자의 말씀을 인용하여 이르기를 “음성과 얼굴빛은 백성을 교화시키는 데에 있어 지엽적인 일이다”라고 했다. 그런데 이것은 다만 대단찮게 여긴다고 말했을 뿐이니, 그렇다면 이것은 오히려 음성과 얼굴빛이 남아 있는 것이어서 불현(不顯)의 묘(妙)함을 형용하기에는 충분하지 못하다. 이는 ‘증민(烝民)’ 시(詩)에서 말한 “덕은 가볍기가 터럭과 같다”고 한 것만 못하니, ‘덕유여모(德輶如毛)’라고 하면 거의 덕을 형용했다고 이를 만하다. 그렇지만, 스스로 이르기를 터럭이라고 말하면 오히려 비교할 만한 것이 있으니, 이 또한 그 오묘함을 다하지 못한 것이다. 이는 ‘문왕(文王)’ 시(詩)에서 말한 “상천(上天)의 일은 소리도 없고 냄새도 없다”고 한 것만 못하니, 이렇게 표현한 뒤에야 불현의 덕을 지극히 형용한 것이 되는 것이다. 대개 소리와 냄새는 기(氣)만 있고 형체가 없어, 물건에 있어 가장 미묘한 것인데도 오히려 없다고 말하였다. 이것은 소리와 냄새로도 불현(不顯), 독공(篤恭)의 묘함을 형용할 수 없다는 것이니, 이 덕 이외에 별도로 이 세 가지 등급이 있은 뒤에야 지극함이 된다고 말씀한 것은 아니다. |
내가 『중용(中庸)』을 가장 정열적으로(passionately) 해석한 데서 뭐라고 했습니까? 아주 시퍼런 칼날도 밟을 수 있지만, 중용(中庸)은 할 수 없다고 그랬어요(白刃, 可蹈也; 中庸, 不可能也. 9章) 그러니까 중용(中庸)의 세계가 궁극적으로 지향하고 있는 것은 인간 내면의 드러나지 아니하는 지극한 세계란 말입니다.
“개성취 유기무형 재물 최위미묘 이유왈무지(蓋聲臭, 有氣無形, 在物, 最爲微妙, 而猶曰無之).”
성취(聲臭)조차도 성취(聲臭)라 얘기하지 않고, 그 자체가 ‘유기무형(有氣無形)하여 재물(在物)에 미묘(微妙)하다’ 해서 성취의 미묘함을 강조했지만, 거기서 더 나아가 ‘무성무취(無聲無臭)’한 데까지 이르러야 한다는 것입니다.
“고 유차가이형용불현독공지묘 비차덕지외 우별유시삼등연후위지야(故 惟此可以形容不顯篤恭之妙 非此德之外 又別有是三等然後爲至也)”
여기서 ‘삼등(三等)’이라는 것은, ‘성색(聲色)·모(毛)·무성무취(無聲無臭)’의 3단계를 말하는 겁니다. 그러나 이 3단계가 있음으로 해서 지극하게 된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니까, 결국 이 『중용(中庸)』의 거대한 파노라마는 제일 마지막에서 ‘인간이 홀로 삼가하는 내면의 성찰(신독愼獨)’이 거의 완벽하게 무(無)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 ‘무(無)’라는 것은 노자가 말하는 현묘(玄妙)함도 아니요, 불교의 허무공멸(虛無空寂)한 세계를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이것은 바로 인간의 도덕적 덕성이 다이내믹 이퀼리브리엄(Dynamic Equilibrium, 역동적 평형), 즉 호미오스타시스(Homeostasis) 과정에서 시중(時中), 완전히 자유자재로 형체가 없이 움직이는 그러한 미묘한 덕성의 세계(無聲無臭의 세계)를 말하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중용(中庸)』은 다시 내면으로 수렴하는 것으로써, 33개의 장, 그 대단원의 막을 내리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이 33장에 대한 주자의 해설을 보겠습니다:
右第三十三章. 子思引前章極至之言, 反求其本, 復自下學ㆍ爲己ㆍ謹獨之事推而言之. 以馴致乎篤恭而天下平之盛. 又贊其妙, 至於無聲無臭而後已焉, 蓋擧一篇之要而約言之. 其反復丁寧示人之意, 至深切矣, 學者其可不盡心乎! 이 글은 제33장이다. 자사께서 앞 장의 극치를 다한 말씀에 근거하여 그 근본을 돌이켜 찾고, 다시, 배우는 사람이 자신을 위한 학문을 하고 홀로 삼가는 일로부터 미루어 말씀하셨는데, 공손함을 돈독히 함에 천하가 평해지는 성대함에 이르고, 또 그 오묘함을 찬하여 소리도 없고 냄새도 없음에 이른 뒤에야 그만두셨으니, 이는 이 한 편의 요점을 들어 요약하여 말씀하신 것이다. 반복하여 공손하게 사람들에게 보여주신 뜻이 지극히 깊고 간절하니, 배우는 자가 마음을 다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
“우제삼십삼장 자사인전장극치지언 반구기본 부자하학위기근독지사 추이언지(右第三十三章 子思因前章極致之言 反求其本 復自下學爲己謹獨之事 推以言之)”
여기서 ‘위기근독지사(爲己謹獨之事)’, 다시 말하면, ‘위기(爲己)’라는 말이 중요한 말입니다. 『논어(論語)』 「헌문(憲問)」에 ‘자왈 고지학자 위기 금지학자 위인(子曰 古之學者 爲己 今之學者 爲人)’이라고 했는데, 여기에서 말하는 ‘위기지학(爲己之學)’과 ‘위인지학(爲人之學)’이라는 두 개념은 유교에서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사실 현재 교육을 받고 있는 여러분들은 ‘위인지학(爲人之學)’만 하고 있는 겁니다. 우리가 여태까지 중용(中庸)에서 ‘왕천하(王天下)하고 운명을 경영하는 자’로서의 작(作)할 수 있는 ‘군자지상(君子之像)’을 그려왔지만, 그 결론에서는 ‘위기지학(爲己之學, 타인을 위한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한 배움)’을 말하고 있습니다. 어떠한 사회적 규범을 다스리는 것, 즉 작예악(作禮樂)하고 왕천하(王天下)하는 그런 ‘도문학(道問學)’의 세계에 대해서, 이 ‘위기(爲己)’는 그 인간됨의 내면적 덕성의 문제인 ‘존덕성(尊德性)’의 세계를 얘기하고 있는 겁니다.
聖人之道 | |
Grand Scale 至大無外 |
Minute Scale 至小無間 |
至德 | 至道 |
尊德性 | 道問學 |
致廣大 | 盡精微 |
極高明 | 道中庸 |
溫故 | 知新 |
敦厚 | 崇禮 |
인간의 내면적 주관세계 | 인간의 외면적 객관세계 |
실천이성의 세계 | 순수이성의 세계 |
涵養 | 進學 |
用敬 | 致知 |
存心 | |
道體之大 | 道體之小 |
修德 | 凝道 |
인격의 길 | 학문의 길 |
21장 핵심 내용 |
천도 (天道) |
22장 | 24장 | 26장 | 30장 | 31장 | 32장 | 33장 전편 요약 |
||
인도 (人道) |
23장 | 25장 | 27장 | 28장 | 29장 |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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