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생활에서의 유의점
사회적, 정치적인 경우만이 아니다. 일반 생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사회나 조직에 대해 특수성을 존중하라고 지나치게 요구해서는 안 된다. 위에서 전형적 태음 논리라고 길게 쓴 파병 반대 논리에서 보듯이, 특수를 일반에게 이해시키는 과정은 그리 만만하지 않다. 따라서 각각이 느끼는 모든 특수를 사회 구성원들이 공유하고 무엇을 결정한다는 것은 대부분의 경우에 그 사회가 감당하기 어려운 비용을 요구한다. 결국 사회는 일반론을 어느 정도는 보편으로 인정하고, 이를 기준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부분이 있다. 사회가 감당할 수 있는 시간, 자원 등의 한계 때문이다.
가정 내의 문제에서는 반대다. 사망률 1%인 병에 걸리면 사람이 99%의 기능은 돌아가고, 1%의 기능은 정지된 채로 있게 될까? 아니다. 살아나는 사람은 완전히 다 살아나는 것이고, 재수 없이 1%에 속한 사람은 완전히 다 죽는 것이다. 1%밖에 안 죽는다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사회적 대책을 세우는 사람의 태도이지, 환자의 가족이 취할 태도는 아니다. 이것이 거처(居處)에 속하는 일에 지나치게 보편적 논리를 들이대면 안 되는 이유다. 1%의 사망률은, 모든 환자와 보호자가 자칫 잘못하면 죽을 수 있는 병이라 여겨 기를 쓰고 최선을 다한 결과로 나타나는 것이다. 환자나 보호자도 1%의 환상을 믿는 순간, 사망률은 5%로, 10%로 올라갈 것이다.
아이들이 가장 상처를 입는 경우가 어떤 경우일까? 아이가 아픈데 부모가 부모의 입장이 아니라 의료인의 입장 비슷하게 대할 때, 몸은 빨리 나을지 몰라도 마음의 상처는 오래간다. 상당히 오래간다. 아이가 심각한 고민에 빠져 있는데, 부모가 부모 노릇보다는 선생님 노릇을 하려 할 때, 아이는 좌절에 빠진다. 심한 외로움을 경험한다.
일반화에서 또 하나 주의할 것은 내가 일반적이라 느끼는 것은 내가 속한 소집단에서만 일반적일 수 있다는 것이다. 남자의 일반론은 여자의 일반론이 아니며, 비장애인의 일반론은 장애인의 일반론이 아니다. 중산층의 일반론은 부자나 빈곤층에는 절대 일반론일 수 없다. 특히 우리나라처럼 급격한 변동을 겪은 나라는 세대간 문제가 주로 여기에서 생겨난다. 아이가 살아갈 세상이 부모가 살아온 세상과 다르다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것이다. 부모의 일반론은 절대 아이들 세대의 일반론이 아니다. 부모의 일반론을 아이에게도 적용되는 보편이라고 주장할 때, 아이는 그 아이가 살아갈 세상에 맞춰서 키워지지 않고 과거에 맞춰서 키워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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