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붙이기
소음인이 탈심(奪心)이 앞서서 창조에 집착하면, 함부로 이름 붙이기를 한다. 일상용어 하나를 불쑥 끌고 와서는, 그것이 상당한 뜻을 품고 있는 철학적 단어라고 주장한다. 거기까지는 좋다. 사람들이 가볍게 생각했던 내용에 깊은 뜻이 숨어 있음을 환기시켜서 한 번 더 생각해보게 만드는 것이야 좋은 일이다. 하지만 그것이 세상을 보는 사람들의 시각을 완전히 바꾸는 것이고, 철학의 가장 기본이며, 인류가 앞으로 나아갈 바라고 주장하기 시작하면 문제가 되기 시작한다.
똥 철학, 밥 철학, 숟가락 철학, 젓가락 철학, 몸 철학, 손가락 철학, 발가락 철학 등등, 하나하나가 으리으리하고 대단한 것들인데, 어느 것이 진짜고 어느 것이 과장인지 알 길이 없다. 그런데 막상 그 내용을 들어보면 굳이 새 이름이 필요했는지 의심되는 경우가 훨씬 더 많다. 대부분이 기존 사상의 부분적인 변형에 불과한 것들이기 때문이다. 결국 새 이름이 의미하는 것은 ‘나 무언가 창조했어요. 내게 명성을 주세요’라는 아우성일 뿐이다. 그 새 이름 아래 묶인 옛 내용들의 명성을 빼앗는 짓에 불과하다.
이름 붙이기의 기본은 사람들이 이미 알고 있는 이름에서 골라 쓰는 것이다. 정 마땅한 이름이 없으면 약간 바꾸어 쓰는 것이다. 사람들 귀에 낯설 만한 이름은 함부로 붙이는 것이 아니다. 예를 하나 들어보자. 원불교의 교리는 상당 부분 독창적인 면이 있다. 그러나 그 이름은 아주 겸손하다. 근원적으로 불교와 겹치는 부분이 많다고 해서, 불교의 ‘불(佛)’ 자를 따다 이름에 넣었다. 원불교를 폄하하려는 사람은 신흥 종교가 불교의 권위에 기대기 위해 그런 이름을 붙였다고 말할지도 모르겠지만, 그 이름은 사람들이 원불교의 가르침을 조금이라도 쉽게 접근하고 이해하게 만들기 위한 배려가 들어간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름이란 그렇게 붙이는 것이다.
이름을 잘 짓고 잘 붙이기로는 태양인이 으뜸이다. 이 책의 내용만 하더라도 태양인이 본다면 그럴듯한 새 이름을 붙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태양인의 이름 붙이기를 놓고 명리를 탐내는 탈심(奪心)이라고 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태양인의 이름 붙이기는 진행형이기 때문이다. 즉 연구 중이고, 정리 중이고, 발전 중이며, 보편성을 획득하기 위해 투쟁 중인 사상이라는 의미가 이름에 들어가 있다. 그러나 소음인의 이름 붙이기는 확정된 것이며, 정리된 것이며, 보편성을 획득하여 마땅한 것이라는 단정이 들어가 있다.
태양인의 이름 붙이기는 시작하는 것에 이름을 붙이는 것이다. ‘나 이제부터 이런 것을 하려고 해’라는 선언이다. 명성이니 표절이니를 따질 단계가 아니다. 그러나 소음인의 이름 붙이기는 정리가 된 것에 이름을 붙이는 것이다. 즉 ‘나 이런 것을 완성했어’라는 선언이다. 과연 새 이름을 붙일 만한 독창성이 있는가가 마땅히 검토되어야 한다. 그리고 새 이름을 붙일 만한 독창성이 없었다면 탈심(奪心)의 발로라고 야단을 맞게 될 것이다.
‘익준이’ ‘지원이’하는 이름은 태어나면서 붙인다. 부모의 바람을 이름에 담는다. 자라면서 자신의 지향점을 담아 자(字)니, 호(號)니 하는 것들을 만든다. 시호(諡號)라는 것이 있다. 죽은 뒤에 그 사람의 행적을 평가하여 붙이는 이름이다. 이걸 자기가 짓는 사람은 없다. “내 호는 충무공이야.” “내 자는 충정공일세.” 얼마나 웃기는 일인가? 마찬가지다. 철학이나 사상은 정리가 다 되었다면 그냥 세상에 내놓는 것이고, 이름은 세상이 붙이는 것이다.
원래 소음인의 탐구는 세상과 나누고자 하는 욕망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다. 소음인은 자기중심적(egocentric)인 면이 있다. 소음인은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라는 의문의 답을 얻고 싶어서, 자기가 사는 방식에 대한 확실한 기준을 세워서 ‘안정’되게 살고 싶어서 탐구하는 것이다. 자기 본성의 장점을 잘 지켜나가는 소음인은, 탐구 과정에서 이를 발표하거나 명성을 다투거나 하는 일을 아주 귀찮아한다. 그 시간을 아껴 자신의 의문을 조금이라도 더 해결하고 싶어한다.
그래서 정리가 되고 결론이 얻어지면, 그에 따라 흔들림 없이 살아간다. 그 언행이 일치되고 흔들림 없는 모습이 주변을 감복시키면, 한 입 두 입 걸러 수양이 깊은 사람이라는 명성이 퍼진다. 우리 옛 선비들이 명성을 얻게 되는 과정이 이러했다. 명성이 사람을 모으고 사람들이 깨달은 바를 나누기를 부탁하면 비로소 입을 열어 자신이 깨달은 바를 말한다. 세상이 이를 일컬어 ‘대인의 식견(識見)’이라 부른다.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