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멋대로 기준 정하기
이것이 외부로 드러나기는 천(擅), 즉 제멋대로 하는 모습으로 드러나게 된다. 출발은 분리해야 할 것을 분리하지 않는 것이다. 자신의 명성, 당파의 이익과 같은 것은 소음인의 본성을 잃지 않으면 명백히 판단의 기준에 넣지 않았을 부분이다. 이를 판단 기준으로 사용하면서 문제가 커진다. 그렇게 잘못 들어간 부분들은 논리적 모순을 낳고, 그 모순 때문에 공격당하게 된다. 이제는 당연히 고려해야 할 내용을 고려 대상에서 빼는 식으로 방어한다. 정보 왜곡에서 말했던 정리 과정에서의 왜곡을 시작하는 것이다. 지금 논란거리가 되는 문제를 따지기 위해서는 무엇이 고려되어야 하며, 무엇을 고려 대상에서 제외해야 하는가의 기준을 그때그때 바꾼다.
태양인이 주장하는 모습을 언뜻 보면 그런 면이 보인다. 그러나 태양인의 주장은 상당 부분 주관적, 직관적 내용이다. 현재의 기준으로 따지는 것이 불가능한 내용을 새롭게 주장하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따져야 할 기준도 그때 새로 정해지는 것이다. 기존의 사고방식이 천시(天時)에 어긋나게 된 부분을 지적할 때는, 현재의 관행을 기준으로 삼아서 따질 수가 없다. 따라서 태양인의 자의적 기준 설정은, 자의적이라는 것만으로는 비난할 일이 아니다. 반면 천심(擅心), 탈심(奪心)이 발동될 때 소음인이 하는 행동은 기존의 기준으로 따져야 하는 부분에 제멋대로 새로운 기준을 설정하는 것이다.
종교 계율의 준수 문제를 예로 들면 이해가 쉬울 것 같다. 불교 쪽의 예를 보자. 고승 대덕의 일화를 소개하는 내용을 보면 기행에 관한 이야기들이 많이 나온다. 수련하는 일반 스님이 저질렀다면 당연히 파계 행위로 비난받고 절에서 쫓겨날 짓을, 고승, 대덕이라고 하는 큰스님들이 태연히 저지르는 경우가 있다. 또 일반 대중이나 제자 스님들은 큰 스님이 하신 일이니 그럴 연유가 있을 것이라고 넘어간다. 불교는 ‘잘못된 집착에서 다 벗어나는 것이 불교 수행자가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바’라고 가르친다. 계율이란 그 과정에서 필요한 것이지, 어느 수준에 가면 계율에 대한 집착에서도 벗어나야 된다고 보는 것이다.
그런데 서산대사께서 쓰신 『선가귀감(禪家龜鑑)』이라는 책에 보면, 수행자의 계율 준수에 대해 굉장히 엄하게 강조한다. ‘차라리 수행자가 되는 것을 포기하는 편이 안전하지, 수행자가 되어서 계율을 어길 때는 정말 끝장나겠구나’라는 생각이 절로 들게 만든다. 경고의 수준이 보통이 아니다. 이게 꼭 하급의 수행자만의 문제인가? 그렇지도 않은 것 같다. 고은 선생이 북한 문화유산 답사를 떠나는 유홍준 선생에게 써주어서 더 유명해진 서산대사의 답설야중거(踏雪野中去, 밤에 눈길을 밟으며 갈 때)」라는 시를 보면, 남의 앞에 서게 되면 행동거지를 더욱 조심하라고 강하게 강조한다.
결국 기준은 이렇다. 배란 물을 건너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며, 물을 건너고 나면 다시 놓아두고 가야할 것이다[捨筏登岸]. 그러나 늘 잊지 말아야 할 것이, 물을 건너는 중에 배를 버리면 물에 빠진다는 것이다. 내가 규율을 버릴 수 있는 수준이 되었는지 안 되었는지를 알아야 하고, 또 나의 그런 행동이 배에서 내리지 말아야 할 사람들이 물에 뛰어드는 짓을 부추기지는 않을지를 고려해야 한다.
시장 점유율 1위인 『조선일보』가 왜곡 보도를 많이 하는 것이 우리 사회의 아주 큰 문제점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른바 안티조선 운동가들이다. 그런데 안티조선 운동가로 널리 알려진 사람이 『조선일보』 기자와 술을 마시고 친교를 나누는 일은 문제가 있을까, 없을까? 더군다나 그 기자가 사회적 물의를 크게 일으킨 왜곡 보도의 주범이었다면 어떨까? 사회운동가 대 기자로서 만나는 것이 아니라 같이 철학하는 학자로서 만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면 허용되어야 할까? 바로 이런 것이 문제다. 원론적으로 허용되어야 한다는 것과 지금 나에게 허용되는가는 별개의 문제라는 것이다. 내 수양의 정도, 내가 가지고 있는 위치 등이 고려되지 않고 원론을 쫓아가면, 물에 빠진다.
앞에서 법과 질서의 준수에 대해 이야기할 때, 대체로 법을 가장 잘 지키는 사람이 소음인이라고 했다. 그러나 터무니없는 짓을 가장 잘하는 것도 소음인이다. 천심이 발동하면 터무니없는 짓을 저지른다. 게다가 그러고도 당당하다.
소음인의 장점은 잘 듣고 잘 정리하고, 그 정리된 것을 규율 삼아 규율을 꾸준히 지키려고 노력하는 것에서 나온다. 그러나 명성을 탐내고 자신의 주장을 조금도 공격받지 않게 지켜내려고 조바심을 내기 시작하면, 모든 장점은 사라지고 단점만 부각된다. 없던 단점도 새로이 생겨난다. 자기 멋대로 이상한 기준을 만들고, 그 기준이 옳다고 주장한다.
세상의 모든 이치란, 빌려 쓰고 돌려주면 그만인 공공재일 뿐이다. 이치 하나를 내가 밝혔느니 네가 밝혔느니 하고 다툰다든지, 자신의 의견을 자신의 소유물로 여기고 조금도 훼손되면 안 된다고 안달한다면, 인성만 파괴될 뿐 좋을 일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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