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   2025/02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Archives
Today
Total
관리 메뉴

건빵이랑 놀자

종횡무진 서양사- 2부, 5장 문명의 통합을 낳은 원정 본문

역사&절기/세계사

종횡무진 서양사- 2부, 5장 문명의 통합을 낳은 원정

건방진방랑자 2022. 1. 1. 12:39
728x90
반응형

 5장 문명의 통합을 낳은 원정

 

 

폴리스 체제의 종말

 

 

아테네의 시대를 대체한 스파르타의 시대는 짧았다. 스파르타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승리해 무력에서는 그리스의 패자가 될 만한 자격을 보였으나 아테네의 권위를 대신할 수 없었다. 더구나 스파르타는 아테네가 그리스를 지배하던 시절보다 더욱 고압적인 자세를 취했다. 폴리스들에 군대와 감독관을 파견하고 공납금의 액수도 더 올린 것이다. 그리스 세계의 체질에 맞지 않는 군국주의에다 민족적인 이질성, 그리고 지나친 독재와 간섭에 폴리스들은 당연히 불만이 많았다.

 

그러던 차에 스파르타의 지배에 균열이 생기는 일이 터졌다. 기원전 394년 페르시아에서 제위 계승을 둘러싸고 내분이 생기자 스파르타는 그 참에 이오니아를 수복하기 위해 함대를 파견했다. 하지만 그것은 실수였다. 코린토스, 아테네, 테베, 아르고스 등은 재빨리 페르시아와 결탁하고 스파르타를 응징하기 위한 전쟁을 일으켰다. 어제의 적이 오늘의 동지가 된 셈인데, 그렇다면 오늘의 적이 내일의 동지가 되는 일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을 것이다. 스파르타는 응급조치로 페르시아와 평화조약을 맺고, 이오니아를 페르시아에 완전히 넘겨주는 조건으로 그리스 반도에서의 패권을 유지하고자 했다.

 

이 구상이 먹혀 일단 전쟁은 끝났으나 한 번 구겨진 스파르타의 위신은 좀처럼 회복되지 않았다. 그렇다고 아테네가 패권을 되찾은 것도 아니었다. 스파르타의 권위가 약화되자 아테네는 해상 동맹을 맺고 재기를 노렸지만, 그것은 아테네의 마지막 몸부림이 되고 말았다. 아테네는 지는 해였고, 테베가 새로 떠오르는 해였다. 보이오티아의 핵심 세력이었던 테베에는 펠로피다스가 주도하는 민주정이 들어선 데다 그의 친구인 에파미논다스라는 뛰어난 군사 영웅도 있었다.

 

테베를 잡아야 패권을 유지할 수 있다고 판단한 스파르타는 기원전 371년 테베를 공격했는데, 이번에는 스파르타의 마지막 몸부림이었다. 그리스 최강의 육군 스파르타군을 맞이하는 에파미논다스의 전술은 단순하면서도 탁월했다. 그저 적의 강한 곳으로 맞부딪히지 않는 것이었다. 그는 스파르타의 밀집대형에 맞서 사선으로 병력을 배치했다. 테베의 기병대는 스파르타군의 힘이 집중된 우측을 선회해 적의 좌측을 파고들었다. 여기서 대승을 거둔 테베군은 스파르타의 본진인 라코니아로 쳐들어갔고, 이내 스파르타 경제력의 토대인 메세니아까지 점령했다.

 

이로써 오랫동안 그리스 반도의 양대 기둥을 이루었던 아테네와 스파르타는 불과 수십 년 동안에 차례로 무너졌다. 그러나 테베는 떠오르는 기세였어도 그리스 전체가 이미 석양이었다. 테베가 스파르타를 대신한 기간은 스파르타가 아테네를 대신한 기간보다도 더 짧았다. 테베에는 아테네와 같은 전통도, 스파르타와 같은 물리력도 없었다. 그나마 테베의 유일한 믿음은 걸출한 리더십이었으나 기원전 362년에 에파미논다스가 아테네 스파르타 연합군과의 전투에서 전사한 것을 계기로 그 믿음마저 사라져버렸다.

 

스파르타와 테베가 아테네의 공백을 메우지 못했다는 것은 곧 그리스의 폴리스 체제가 수명을 다했음을 보여주는 증거였다. 결국 그리스의 폴리스 체제는 페르시아 전쟁에서 승리한 이후 아테네가 지배한 약 50년의 기간 동안 전성기를 맞았다가 곧이어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발발한 때부터는 내내 내리막길을 걸은 셈이다(어찌 보면 소크라테스-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로 이어지는 초기 철학의 계보는 그런 그리스의 혼란상을 반영한다. 문제가 없는 곳에서는 학문이 일어날 수 없으니까).

 

문명이 쇠퇴하면 경제력과 군사력이라도 갖추어야 생존을 유지하면서 차후를 기약할 수 있다. 하지만 그 두 가지 부문에서 그리스는 명백히 쇠퇴하고 있었다. 원래 그리스의 젖줄이던 해상무역은 식민 활동이 끝나면서 한계에 부딪혔다. 시장이 포화된 데다 해외 식민시들이 지중해 무역에 뛰어들면서 그리스의 무역 활동이 심각하게 잠식당했다.

 

경제의 뒷받침이 없으니 군사력도 무뎌졌다. 경기 침체로 실업자가 된 사람들은 앞다투어 직업 용병의 길을 걸었다. 애국심으로 페르시아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던 용맹스런 중장보병은 사라지고 이제 경무장의 용병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오늘날의 직업 운동선수가 그렇듯이 용병은 생리상 돈을 많이 주는 쪽으로 갈 수밖에 없다. 그리스의 떠오르는 유망 직종인 용병이 막강했던 그리스 군대를 완전히 대체하자 그리스의 방어망은 뻥 뚫려버렸다. 하긴, 이제 그리스에는 방어해야 할 문명도, 민주주의도 거의 남아있지 않았다.

 

 

슬퍼하는 아테나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아테네가 패배한 것은 결국 그리스 전체의 쇠퇴를 가져왔다. 사진은 기원전 460년 무렵의 작품으로, 아테나 여신이 마치 자신의 이름을 딴 도시의 몰락을 슬퍼하기라도 하듯이 비탄에 잠겨 있는 모습을 담고 있다. 여신이 진정 슬퍼한 것은 그리스 민주정의 몰락이 아니었을까?

 

 

 왕국에 접수된 폴리스 체제

 

 

쇠락해가던 그리스의 폴리스 체제에 종지부를 찍은 힘은 외부에서 닥쳐왔다. 중심이 약해지면 주변이 강해지게 마련이다. 그리스의 전성기 때는 오지나 다름없었던 그리스 북부에 새로운 구심점이 생겨났다. 이 일대에는 오래전부터 그리스인들이 바르바로이(앞서 말했듯이, 다른 언어를 사용한다는 뜻이지 야만인이라는 의미는 크지 않다)라고 부르던 여러 부족이 살고 있었다. 그리스의 폴리스 체제가 약화되는 것에 때맞추어 드디어 이곳에서는 통일의 기운이 감돌기 시작했다. 그 한복판에 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Philoppos, 기원전 382~336)가 있었다.

 

사실 페르시아 전쟁 때 정작으로 큰 피해를 본 곳은 마케도니아였다. 고래 싸움판의 새우처럼, 마케도니아는 페르시아군의 원정 도상에 있었던 탓에 심하게 유린당했다. 비록 페르시아는 그리스에 패하고 다시 유럽 원정의 야망을 꾀할 처지가 못 되었지만, 그래도 페르시아가 존속하는 한 언제고 그런 비극과 불명예를 겪을 가능성은 있었다. 귀족 가문들을 통합해 마케도니아를 강력한 통일 국가로 만든 필리포스는 페르시아에 대한 공포를 완전히 극복하려면 페르시아를 지도에서 지워버리는 것밖에 없다고 믿었다. 하지만 먼 동방 원정을 떠나려면 먼저 후방을 다지는 게 급선무다. 따라서 그리스를 복속시키는 게 무엇보다 중요했다.

 

때마침 상황도 좋았다. 아테네가 이끌던 당시의 그리스는 마케도니아에 감히 갈 수 없는 곳이었지만 이제는 따뜻한 남쪽에 불과했다. 더구나 필리포스는 젊은 시절 테베에 볼모로 잡혀 있었을 당시에 명장 에파미논다스에게서 정치와 군사 전술에 관해 많은 것을 배웠고, 그리스 반도의 사정에 관해 잘 알고 있었다. 기원전 338, 드디어 그는 원대한 정복전의 서전에 나섰다. 북방에서 들려오는 소식에 급박해진 테베와 아테네는 연합군을 편성해 맞섰으나 이미 대세는 기울었다.

 

손쉽게 그리스를 장악한 필리포스는 코린토스 의회에 각 폴리스의 정치가들을 모아놓고 페르시아를 정복해야만 그리스도, 마케도니아도 살 수 있다고 선언했다. 하지만 꿈에 그리던 페르시아 원정을 조직하던 도중 그는 불행히 암살되고 만다. 이리하여 필리포스의 꿈은 자신이 일군 왕국과 함께 아들 알렉산드로스에게 상속되었다그는 기원전 337년에 아버지 필리포스가 새 왕비를 얻자 어머니와 국외로 도망쳤다가 필리포스가 죽은 뒤에 돌아와 왕위를 계승했는데, 필리포스의 암살에 알렉산드로스 모자가 개입했다는 설도 있다.

 

 

겨우 스무 살로 왕위에 오른 알렉산드로스는 먼저 아직도 마케도니아에 저항하는 테베와 아테네를 응징했다. 테베는 완전히 파괴하고 시민들을 노예로 팔아버렸으며, 아테네는 함대가 필요하다는 이유에서 명맥만 유지하게 놔두었다. 이렇게 후방을 완전히 다진 다음, 기원전 334년에 그는 드디어 역사적인 페르시아 원정에 나섰다. 아직 어린 나이였지만 그는 벌써 숱한 전투 경험을 쌓은 약관의 백전노장인 데다 아버지 필리포스가 정성껏 조련한 군대 조직을 물려받았다(필리포스는 뛰어난 전략가로서 조직적인 군대 편성으로 상당한 전과를 올렸으며, 그리스 군대에 최초로 장교 계급을 도입한 인물이다).

 

그리스를 떠날 당시 알렉산드로스가 이끄는 마케도니아와 그리스 연합군은 보병 3만 명, 기병 5000, 함대 160척이었다. 멀고 긴 페르시아 원정을 감당하기에는 결코 대군이라 할 수 없었다. 게다가 당시 그리스군은 폴리스들끼리 작은 전투를 벌인 것 이외에는 방어전만 경험했을 뿐 장거리 원정이라고는 해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약관의 혈기는 일단 소아시아를 정복하고 나서 그다음 일을 구상하면 된다는 패기를 주었고, 아버지 밑에서 기병대를 지휘했던 백전노장의 경험은 기동력에 대한 자신감을 주었다.

 

현실의 진행은 그의 의지를 앞질렀다. 최초의 전투는 헬레스폰토스 해협을 건넌 마케도니아군이 그라니코스 강에 닿았을 때 벌어졌다. 이 전투에서 알렉산드로스는 페르시아군을 너무도 손쉽게 무찔렀다. 기록에 따르면, 마케도니아군은 34명이 전사한 반면 페르시아군은 무려 2만 명이 넘게 전사했다고 한다. 이 믿기 어려울 정도의 대승은 예상치 않은 부수 효과를 가져왔다. 페르시아가 대패했다는 소문이 널리 퍼지자, 이오니아와 프리지아를 관통하며 소아시아를 횡단하는 동안 마케도니아군은 거의 아무런 전투도 치르지 않고 무풍 행진을 계속했던 것이다.

 

이로써 알렉산드로스는 거의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순식간에 소아시아의 서쪽 절반을 손에 넣었다. 하지만 아직 안심하기는 일렀다. 그가 이긴 페르시아군은 적의 주력이 아니라 현지 부족과 그리스 용병을 꿰맞춘 임시 군대였을 뿐 아니라, 마케도니아는 아직 지중해의 해상권을 빼앗지 못해 언제라도 반격을 당할 위험성이 있었다.

 

이듬해인 기원전 333, 드디어 페르시아의 대군이 원정군을 막아섰다. 다리우스 3세가 직접 군대를 이끌고 이소스에서 알렉산드로스에 맞선 것이다. 하지만 적의 사기를 잔뜩 올려주고 나서 뒤늦게 정면 대결을 펼친 것은 전보다 더 중대한 패배를 불렀다. 이소스 전투에서 참패한 뒤 다리우스는 알렉산드로스에게 화의를 요청했으나 이미 승세를 확인한 알렉산드로스는 단번에 일축해버렸다. 이제 제해권만 확보한다면 페르시아는 끝장이다.

 

신중한 알렉산드로스는 곧바로 제국의 명맥을 끊으러 동쪽으로 행군하지 않고, 군대를 남하시켜 지중해에 면한 도시들을 차례로 정복했다. 그의 의도는 두 가지였다. 페르시아의 물자 보급로를 차단하고, 지중해의 페르시아 함대를 격리시키려는 것이다. 제국이 상처를 핥으며 웅크리고 있는 동안 페니키아와 이집트, 특히 페르시아의 주요 자금 창고인 다마스쿠스가 마케도니아의 손에 들어갔다. 육군으로 해군을 차단한다는 알렉산드로스의 구도는 전통적으로 해군이 강하고 육군이 약한 그리스였다면 생각하기 어려운 전략이었으며, 그리스가 페르시아를 잘 막아내고서도 제국의 정복을 꿈꾸지 못한 이유이기도 했다.

 

 

두 영웅 페르시아 전쟁에 이어 알렉산드로스의 동방 원정은 이제 문명의 중심이 오리엔트에서 유럽으로 서진했음을 분명히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왼쪽의 폼페이에서 출토된 이 모자이크 벽화는 이소스에서 맞선 마케도니아군과 페르시아군을 그리고 있다(가로 폭이 5미터가 넘는 큰 벽화다), 위쪽은 알렉산드로스와 다리우스 3세를 확대한 부분이다.

 

 

 세상의 동쪽 끝까지 간 알렉산드로스

 

 

기원전 332년에 이집트까지 정복해 페르시아의 수족을 모조리 자른 뒤, 이듬해 여름 알렉산드로스는 유프라테스 강을 건너 메소포타미아의 심장부로 진출했다. 이제는 페르시아로서도 더 이상 물러난다면 죽음을 의미하는 상황이 되었다. 어차피 싸우다 죽거나 굶어 죽거나 마찬가지라면 싸워야 했다. 페르시아는 가우가멜라 평원에 배수의 진을 치고 최후의 결전을 준비했다. 어찌 보면 지금까지의 접전은 예고편에 불과했고, 이번의 전투가 전쟁 전체의 향방을 가늠하게 될 터였다. 전투를 하루 앞둔 날 밤, 알렉산드로스는 부하들에게 이 전투가 아시아의 운명을 결정할 것이라고 말했다.

 

과연 그랬다. 우선 양측 군대의 구성부터 국제적이었다. 알렉산드로스는 여러 차례 전투를 치르면서 수천 킬로미터를 진군하는 동안 그때그때 현지의 병사들을 징발해 군대를 보강했다. 또한 아직 오리엔트의 패자로 군림하는 페르시아도 남북으로 이집트부터 중앙아시아까지, 동서로 인도부터 소아시아까지 이르는 광대한 영토 내의 온갖 민족으로 군대를 조직해 맞서고 있었다. 페르시아 전쟁 이래 200여 년 만에 그리스와 페르시아가 공격과 수비를 바꾸고 또다시 대회전을 벌이게 된 것이다. 어쨌거나 이번이 마지막일 게 확실했다.

 

페르시아는 병력의 규모에서도 앞섰지만 전차가 믿는 도끼였다. 그리스에서 벌인 침략전에서는 그리스의 지형적 여건상 전차를 제대로 사용하지 못했지만 평원에서는 전차가 최고 아닌가? 그 반면 알렉산드로스의 장기는 기병 전술인데, 기병으로 전차를 당할 수 있을까? 그러나 불행히도 페르시아의 믿는 도끼는 다리우스 3세의 발등을 찍었다.

 

기병 전술에 능하다는 것은 적재적소에 기병을 잘 활용한다는 것이다. 알렉산드로스는 기병을 전면에 내세우지 않고 보병으로 페르시아의 전차 부대에 맞섰다. 원래 그의 기병 전술은 기병이 전면에 나서는 게 아니라 밀집대형의 보병들이 적을 막고 있는 동안 적의 약점이나 측면을 겨냥해 기병을 투입하는 것이었다. 이게 바로 필리포스에게서 배운 전군 공조 전술인데, 탁월한 조직력이 없으면 불가능한 작전이기도 했다. 다리우스 3세는 알렉산드로스가 기병을 잘 구사한다는 것만 알았지 어떻게 구사하는지는 알지 못했다.

 

가우가멜라 전투에서 대패한 페르시아는 결국 멸망했다(오늘날의 이란이 그 후예지만 역사상 가장 위명을 떨쳤던 때는 2000여 년 전 페르시아 시대였다). 마케도니아군은 찬란한 오리엔트 문명의 중심지였던 바빌론과 수사, 페르세폴리스 같은 도시들을 마음껏 유린했다. 특히 페르세폴리스의 엄청난 황금은 마케도니아가 헬레니즘 시대를 열 수 있었던 귀중한 밑천이었다.

 

 

알렉산드로스의 예언대로 과연 가우가멜라 전투는 아시아의 운명을 결정했다. 200년 동안 오리엔트의 주인이었던 페르시아가 멸망했다는 점에서도 그렇지만, 알렉산드로스는 내친 김에 세상의 동쪽 끝까지 가보리라는 마음을 먹었기 때문이다(이미 그는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1세가 이루지 못한 천하 통일의 꿈을 실현했으니 남은 정복 과제는 그것뿐이었다).

 

숙원이었던 페르시아 정복을 이루자 알렉산드로스는 목표를 더욱 넓혔다. 동쪽으로 계속 가면 무엇이 있을까? 원정을 출발할 때의 목표를 이룬 뒤에도 그의 군대는 행군과 전투를 계속해 힌두쿠시를 넘고, 기원전 327년에는 인도 서북부의 펀자브에 이르렀다. 여기서도 마케도니아는 현지의 소국들인 탁실라와 제름을 간단히 제압했고, 라비 강변에서는 10만 명에 이르는 인도 연합군마저 격파했다. 그러나 남쪽의 인도 내부를 향해 진군을 계속하려던 차에 문제가 터졌다.

 

고향을 떠난 지 벌써 7, 알렉산드로스의 용감한 병사들도 지쳤다. 더구나 이제부터는 인도 소국들과의 전쟁만이 아니라 무더위, 정글과도 싸워야 했다. 병사들의 거듭된 탄원에 알렉산드로스는 마침내 철군을 결정하고 기원전 324년에 페르시아의 수사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 이듬해 그는 서른셋의 젊은 나이로 병사하고 말았다. 결국 그가 본 세상의 동쪽 끝은 인도였다. 그런 그의 세계관은 훗날 유럽이 중국의 존재를 확인하게 될 때까지 내내 유럽인들의 세계관으로 자리 잡게 된다.

 

인류의 고대사상 최대 규모의 원정이 남긴 영향력은 엄청났다. 우선 정치적으로는 페르시아라는 대제국이 완전히 사라졌고, 페르시아의 넓은 강역은 세 개로 분할되어 알렉산드로스의 부관들이 하나씩 꿰찼다. 또 인도에는 알렉산드로스 군대가 물러간 힘의 공백에 힘입어 최초의 통일 국가인 마우리아 제국이 생겨났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리스 문명의 고향에 해당하는 오리엔트가 그리스와 더불어 하나의 문화권을 이루게 되었다는 점이다. 그 결과가 바로 헬레니즘 문화다.

 

 

전쟁 혹은 살육 마케도니아와 페르시아의 전투 장면을 담은 조각으로, 시돈(지금의 시리아)에서 출토되었다. 투구와 무장을 갖춘 마케도니아 병사들이 비무장 상태인 페르시아인들을 살육하고 있으니, 전투 장면이라기보다는 살육 장면에 더 가깝다.

 

 

 그리스+오리엔트=헬레니즘

 

 

필리포스의 마케도니아 왕국은 알렉산드로스의 동방 원정 덕분에 제국으로 도약했으나 다시 왕국으로 격하되는 기간도 그에 못지않게 짧았다. 그가 죽자 그의 부관(디아도코이)들은 50년간 피비린내 나는 암살과 치열한 전쟁(디아도코이 전쟁)을 벌인 끝에 세 개의 왕국으로 분립했다. 각국의 강역은 그때까지 존재했던 문명권들과 일치한다. 그리스와 소아시아에는 카산드로스 왕조의 마케도니아가 들어섰고, 메소포타미아는 셀레우코스 왕조의 시리아가 차지했으며, 이집트는 프톨레마이오스 왕조가 지배하게 되었다. 로마가 지중해 세계를 통일하는 기원전 1세기 무렵까지 존속한 이 왕국들을 헬레니즘 왕국이라고 부른다. 헬레니즘 시대라는 말에서 나온 명칭이다.

 

그런데 헬레니즘이라니? 헬레네는 그리스를 가리키는 말이니까(87쪽의 주 참조) 헬레니즘이라면 그리스 정신이라는 뜻이다. 오리엔트와 이집트가 포함된 세계를 왜 헬레니즘이라고 부를까? 헬레니즘이라는 말은 19세기 독일의 역사학자인 드로이젠(Johanm Gustav Droysen)헬레니즘의 역사(Geschichte des Hellenismu)라는 책에서 처음 사용한 용어로, 서구적인 시각이 짙게 배어 있는 말이다. 그 덕분에 헬레니즘 문화를 그리스 문화에 바탕을 둔 것으로 보는 견해가 우세해졌지만, 그것은 잘못이다. 비록 전쟁에서 승리한 것은 그리스 측이었으나 문화의 중심은 오리엔트였다. 단적인 예로, 헬레니즘 세 왕국 가운데 가장 번영한 것은 이집트였고 마케도니아는 가장 국력이 약했다.

 

헬레니즘 시대의 이집트는 처음부터 강력한 전제정치를 확립하고, 산업과 무역의 중심지가 되어 신왕국 시대 이래 중흥기를 구가했다. 알렉산드로스의 이름을 딴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는 헬레니즘 시대에 인구 50만 명에 이르는 세계 최대의 도시이자 국제적 무역항으로 발돋움했다(알렉산드로스는 제국의 변방에 신도시를 건설해 퇴역 병사들을 주둔시키고 알렉산드리아라고 불렀다. 당시에는 중앙아시아 일대까지 수십 군데의 알렉산드리아가 있었는데, 지금까지 남은 것은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뿐이다). 여기에 수십만 권의 장서를 자랑하는 세계 최대의 도서관과 박물관이자 학술 연구소의 기능을 한 무세이온(Mouseion, ‘뮤즈의 집;이라는 뜻인데, 여기서 박물관museum이라는 말이 나왔다)까지 갖추고 있어 당시 알렉산드리아에서는 없는 것은 눈[]뿐이었다고 한다(그러나 그 유명한 고대의 도서관은 4세기에 그리스도교의 이교 문화 배척으로 불타 없어지고 만다. 당시 그리스도교는 이교도를 야만인 취급했으나 지금 생각해보면 어느 것이 야만적인 행위였는지 모를 일이다).

 

 

교류를 낳은 전쟁 페르시아 전쟁은 유럽이 오리엔트의 공격을 방어한 것이었지만, 알렉산드로스의 동방 원정은 역사상 처음으로 유럽 세계가 문명의 고향인 오리엔트를 공격한 사건이었다. 사진은 베르길리우스의 아에네이드에 나오는 장면을 표현한 <라오콘 군상>으로 헬레니즘의 대표적 조각품이다.

 

 

그러나 오리엔트적 요소만 두드러졌다면 굳이 헬레니즘 시대라는 말을 쓸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알렉산드로스는 오리엔트식 전제군주의 의례를 도입했을 뿐 아니라 페르시아 귀족들을 친위대로 임명하고 휘하 병사 1만 명을 페르시아 여성과 결혼하게 하는 등 그리스적 요소와 오리엔트적 요소를 통합하려 애썼다. ‘땅끝까지 가본 그로서는 자신의 제국이 곧 전 세계였으므로 영토적 통합만이 아니라 문물과 제도의 통합도 이루고 싶었을 것이다. 오늘날 남유럽과 아라비아권 민족들의 외모가 비슷해진 데는 그런 통합의 영향이 크다. 뿐만 아니라 헬레니즘 세계에서는 그리스어가 공용어헬레니즘 시대의 고대 그리스어를 코이네(Koine)라고 부르는데, 공용어라는 뜻이다. 원래 그리스에서는 폴리스마다 방언의 차이가 심했으므로 그리스를 정복한 마케도니아는 아티카 방언과 이오니아 방언을 합쳐 표준어로 정했다. 이렇게 형성된 코이네는 알렉산드로스의 동방 원정으로 페르시아와 이집트는 물론 인도 서부에 이르기까지 널리 사용되었다. 당시 전 세계가 사용한 언어였으니 만국 공용어의 자격이 충분하다 하겠다로 사용되었으며, 그리스식 폴리스들이 곳곳에 세워졌다. 또한 알렉산드로스의 동방 원정로는 그대로 동서양의 교통로가 되었다. 특히 마케도니아군이 인도에서 퇴각할 때 개척한 인더스 강에서 페르시아 만까지의 해로는 이후 로마 시대에 인도와 지중해 세계를 잇는 중요한 무역로가 된다.

 

더 중요한 통합은 하드웨어가 아니라 소프트웨어에 있다. 그리스와 오리엔트는 학문과 예술 등 문화의 모든 면에서도 한 몸이 되었다. 그리스 철학은 스토아학파, 에피쿠로스학파, 키니코스학파(견유학파), 키레네학파 등으로 확대 발전되면서 헬레니즘 철학의 문을 열었다(스토아학파를 정립한 제논이 키프로스의 셈족 출신이고, 견유학파를 연 디오게네스가 흑해 연안 출신이라는 점은 당시 학문의 국제화가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케 한다). 과학에서도 수학은 그리스의 것이 확산되었는가 하면 천문학은 바빌로니아의 것이 널리 채택되었다.

 

16세기에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이 나올 때까지 서구 천문학을 지배한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동설, 19세기에 비유클리드기하학이 성립할 때까지 불변의 진리였던 유클리드의 기하학, 그리고 오늘날까지 통용되는 부력의 원리를 발명한 아르키메데스 등이 모두 헬레니즘 시대의 산물이다.

 

알렉산드로스의 동방 원정은 하나의 역사를 닫고 다른 하나의 역사를 연 중요한 계기였다. 그는 그리스의 폴리스 체제와 오리엔트의 전제군주 체제를 멸망시킨 대신 두 문명을 한데 아울러 세계 문명으로 일구어냈다. 이렇게 해서 열린 또 다른 역사의 문은 로마로 이어졌다. 헬레니즘으로 하나가 된 그리스와 오리엔트, 여기에 서부 지중해 세계(로마)가 편입되면서 서양의 고대는 완성된다.

 

 

그리스의 세계화 헬레니즘 문화가 유라시아 전역으로 확산되는 과정을 보여주는 지도다. 알렉산드로스의 동방 원정 덕분에 그리스 문화는 서아시아와 인도는 물론 멀리 신라의 불상에까지 자취를 남겼다.

 

 

인용

목차

한국사 / 동양사

728x90
반응형
그리드형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