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   2025/02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Archives
Today
Total
관리 메뉴

건빵이랑 놀자

종횡무진 서양사 - 7부, 3장 제국 없는 제국주의 본문

역사&절기/세계사

종횡무진 서양사 - 7부, 3장 제국 없는 제국주의

건방진방랑자 2022. 1. 2. 10:52
728x90
반응형

 3장 제국 없는 제국주의

 

 

폭풍 전야의 유럽

 

 

독일과 이탈리아가 통일을 이룸으로써 유럽의 판도는 다 짜였다. 이는 다시 말해 유럽 내에서는 이제 영토 분쟁의 여지가 완전히 사라졌다는 뜻이다. 그럼 1870년대의 시점에서 유럽 각국의 위상을 간단히 정리해두는 게 좋겠다. 이 무렵이면 이미 오늘날 유럽의 구도가 거의 다 드러나 있다.

 

우선 영국은 경제적으로나 군사적으로나 명실상부한 유럽 최강국이자 세계 최강국이 되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리더의 지위에 올랐으면서도 영국은 유럽의 국제 질서에 대한 조정자의 역할을 하지 않으려 했다는 점이다. 영국은 19세기 후반 대륙에서 어지러이 펼쳐지는 외교전 - 비스마르크가 항상 그 중심에 있었기에 이것을 비스마르크 체제라고 부른다 - 에 전혀 개입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영국은 일인자의 고유한 장점을 마음껏 누리고 있었다. 이합집산, 합종연횡 따위는 남의 도움이 절실한 처지에 있는 나라에나 필요한 것이지 영국으로서는 필요가 없었다. 영국의 그런 도도한 위치를 영광의 고립(splendid isolation)’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영국은 유럽 어느 나라와도 맺지 않은 동맹을 1902년 아시아의 신흥 제국주의 국가인 일본과 맺었다. 일본과의 동맹이 필요했다기보다는 일본을 파트너로 정해 유럽의 이해관계에서 먼 동아시아를 맡긴다는 의도였을 것이다.

 

독일과 이탈리아, 에스파냐에서 공화정을 수립하려는 시도가 모조리 실패로 돌아가면서 프랑스는 유럽에서 유일한 공화국으로 남게 되었다전통의 프랑스가 공화국이라는 것은 유럽의 지식인들에게도 아주 흥미로운 사실이었다. 예를 들어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 논리실증주의라는 철학 사조를 이룬 철학자들은 프랑스 왕은 대머리다.”라는 문장을 예문으로 삼아 논리를 따지기도 했다. 프랑스에는 왕이 없다. 따라서 이 문장은 전제부터 잘못이므로 틀린 문장이라는 이야기다. 프랑스가 전통의 강국이 아니었다면, 혹은 공화국이 아니었다면, 혹은 프랑스 외에 공화정을 택한 나라가 또 있었다면 이런 예문은 생기지 않았을 터이다. 대륙 전통의 대명사인 프랑스가 유일한 공화국이라는 사실은 역사의 아이러니라 할 수 있겠지만, 거꾸로 보면 역사적으로나 지리적으로나 유럽 문명의 중심이라는 위치에 있었기에 그런 결과가 생겨났을 것이다(그만큼 외국의 간섭을 많이 받았고, 또 그만큼 변동이 잦을 수밖에 없었으니까). 어쨌든 프랑스는 20세기 초까지 공화정에 따르는 여러 가지 문제로 계속 몸살을 앓아야 했다. 당시 프랑스는 가장 보수적인 가톨릭에서부터 가장 진보적인 사회주의에 이르기까지 각종 이념의 홍수 속에서 좀처럼 안정을 이루지 못했다. 하지만 프랑스가 공화국이라는 사실은 20세기 들어 유럽 여러 나라가 공화정을 택하는 전례가 된다.

 

 

박람회의 계절 산업혁명의 성과는 박람회로 대중 앞에 나타났다. 위쪽은 1851년 세계 최초로 열린 런던 박람회의 모습이고, 아래쪽은 그에 뒤질세라 4년 뒤에 프랑스가 개최한 파리 박람회의 모습이다. 당시로서는 최첨단의 공업 제품들, 오늘날 자동차 전시회에 비견되는 각종 마차, 심지어 카누까지 전시된 것이 보인다.

 

 

독일과 이탈리아는 프랑스와 더불어 역사적으로 유럽 문명의 심장이었으면서도 뒤늦게 통일 국가를 이룸으로써 장차 커다란 문제로 자라날 씨앗을 품게 되었다. 곧이어 보겠지만, 19세기 초부터 영국과 프랑스는 물론 네덜란드와 신흥국인 미국까지 해외 식민지 개척에 열을 올리고 있는 상황에서 뒤늦게 이 부문의 경쟁에 뛰어든 독일과 이탈리아는 자연히 판을 깨려는 시도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시도는 20세기 들어 대규모 전쟁으로 터져 나오게 된다. 게다가 두 나라는 다른 나라들에 비해 시민사회의 전통과 역사가 짧기 때문에 쉽게 군국주의화할 가능성이 있었는데, 이는 20세기에 파시즘이라는 형태로 표출된다.

 

스칸디나비아 3(덴마크·스웨덴·노르웨이)은 어떤 의미에서 유럽의 오지이기 때문에 행복했던 나라들이다. 17세기 이후 이 나라들은 서유럽 역사에서 한몫을 담당하기 위해 애써왔으나 힘이 부쳐 계속 실패했다. 하지만 그들로서는 오히려 그게 다행이었다. 서유럽 국가들의 별다른 간섭을 받지 않으면서 그들에게서 선진 문명을 수입하고 독자적인 역사를 전개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비록 18세기부터 러시아에 발트 해의 제해권을 빼앗기고 나폴레옹 전쟁 때는 프랑스에 점령당하는 등 약소국의 아픔은 있었으나, 서유럽이 시민혁명의 몸살을 앓던 19세기에 스칸디나비아 3국은 착실히 국력을 키워 장차 20세기에 복지국가의 모델로 떠오를 준비를 갖추었다. 다만 노르웨이는 그중에서도 더 약소국이어서 18세기까지는 덴마크, 19세기에는 스웨덴의 지배를 받다가 1905년에야 독립을 이루게 된다.

 

네덜란드와 벨기에는 영토의 규모에 비해 세계사적인 족적을 많이 남긴 나라들이다. 강대국들의 틈에 끼어 있어 유럽 무대에서는 별다른 역할을 하지 못한 이 나리들은 19세기 중반부터 영국과 더불어 해외 식민지 경쟁을 주도했다. 네덜란드야 원래 해외 진출에서 영국보다도 선배였으나, 1830년 프랑스 7월 혁명의 영향으로 뒤늦게 독립을 이룬 벨기에는 네덜란드와 나누어가진 플랑드르 전통의 저력에다 중립국의 신분을 십분 활용해 단기간에 식민지 개척에서 빛나는 성과를 올리게 된다. 오늘날 두 나라와 함께 베네룩스 3국을 이루는 룩셈부르크는 빈 회의에서 대공국으로 격상되었으나 독일 연방에 속하다가 19세기 중반에 독립을 이루었고, 프랑스와 프로이센의 완충지대인 탓으로 중립을 보장받았다.

 

 

자유주의와 그 적들 문예사조로 볼 때 낭만주의와 사실주의는 자유주의와 밀접한 진보적인 사조였다. 그림은 프랑스의 사실주의 화가 쿠르베의 작품 화가의 아틀리에>. 한가운데 화폭 앞에 앉아 있는 쿠르베 자신을 기준으로 오른쪽의 인물들은 그의 사상적 친구들이고, 왼쪽은 그의 적이자 시대의 적 들이다. 오른쪽 끝에서 책을 읽는 사람은 시인 보들레르, 의자에 앉아 있는 사람은 소설가 샹플뢰리이며, 서 있는 사람들 중에는 사회주의자 프루동이 있다. 왼쪽 끝의 의자에 앉은 사람은 나폴레옹 3세를 상징하는 인물이다.

 

 

19세기 중반 자유주의의 물결은 가톨릭의 총본산인 에스파나도 뒤흔들었다. 에스파냐의 여왕 이사벨 2(1830~1904, 재위 1833~1868)는 자유주의를 탄압하는 반동적인 정책으로 일관하다가 1868년에 혁명으로 쫓겨났다(앞에서 본 것처럼 이 왕위 계승 문제가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의 계기가 되었다). 권력을 장악한 자유주의자들이 이듬해 공화국 헌법을 제정함으로써 에스파냐에도 역사상 최초의 공화정이 들어섰다. 그러나 군대가 실력자로 대두되면서 1874년에는 다시 왕정복고가 이루어졌고, 이후 정정 불안으로 에스파냐는 내내 유럽의 후진국 신세를 면하지 못하게 된다.

 

1866년 프로이센에 패배한 오스트리아는 즉각 그 후유증에 시달려야 했다. 오스트리아에 복속되어 있던 헝가리에서 거센 독립운동이 일어난 것이다(유럽 각국이 국민국가 체제를 갖춘 마당에서 다민족 국가의 엉성한 체제를 유지했으니 당연한 일이다). 다급해진 오스트리아는 타협안을 내놓았다. 헝가리의 독립을 인정하되 서로 헤어질 게 아니라 동등한 자격으로 제국을 이루자는 것이다. 그 결과 1867년 오스트리아-헝가리라는 이중제국이 탄생했는데, 이 기묘한 제국은 20세기 초 제1차 세계대전의 도화선에 불을 붙이게 된다.

 

러시아는 크림 전쟁에서 패함으로써 유럽 지역에서 해외 진출의 창구를 찾으려는 노력을 완전히 포기하게 되었다. 그래서 이후 러시아는 유럽의 정정에 계속 관심을 기울이는 한편 동북아시아 지역으로 시선을 돌리게 된다. 원래 러시아는 18세기 말부터 이 지역으로 진출하려고 다각도로 모색해왔는데(일본의 개항을 처음 시도한 나라는 미국이 아니라 러시아다), 이제는 사활이 걸린 문제가 되어버렸다. 이 무렵 중국과 한반도의 근대사에 러시아가 중요한 역할로 등장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러나 차르 정부가 해외 사업에 한창 열을 올리고 있는 동안 러시아 내에서는 급진적 사회주의 운동이 점점 커지고 있었다.

 

어느 정도 안정을 찾은 서유럽에 비해 동유럽 발칸 지역의 정세는 대단히 복잡했다. 그리스가 독립한 이후 오스만 제국은 계속 세력이 약화되었고, 그에 따라 발칸에는 여러 개의 작은 나라들이 생겨났다. 원래부터 발칸 지역에는 민족적 구성이 다양했는데(로마 제국 후기 게르만의 여러 민족이 발흥하던 무렵부터니까 무척 오랜 역사다), 수백 년간 힘의 중심이던 오스만이 소아시아로 물러가면서 저마다 제 몫 찾기에 나선 것이다. 1875년 이들은 힘을 합쳐 아직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 오스만을 쫓아버리기로 결정했다. 여기에 보스로 추대된 러시아가 참전하면서 러시아-튀르크 전쟁이 벌어졌다. 이 전쟁에서 패한 오스만은 산스테파노 조약을 맺고 유럽에서 아예 짐을 싸게 되었으며, 발칸의 여러 민족은 오랜 이교도 지배를 끝내고 독립을 쟁취했다.

 

 

애국적 만화 1870년 무렵 프랑스의 어느 만화가가 그린 시사만평이다. 유럽의 지도를 이용해 당시의 국제 정세를 풍자하고 있다. 프로이센이 프랑스를 향해 탐욕스럽게 돌진하는데, 영국과 에스파냐, 이탈리아 등 서유럽 국가들은 못 본 체 외면하고 있다. 그 밖에 전통적인 곰으로 묘사되어 있는 러시아, 클레오파트라로 그려진 이집트, 이교도의 티가 물씬 풍기는 오스만 제국 등의 모습이 흥미롭다.

 

 

그래도 좁은 지역에 여러 나라가 들어선 만큼 발칸의 정세는 여전히 혼란스러웠다. 19세기 후반 서유럽 세계에서 독립국으로 승인한 나라는 그리스·루마니아·불가리아·세르비아 몬테네그로였으나 그 밖에도 발칸에는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크로아티아 등이 사실상 독립국을 이루고 있었다. 흥미로운 것은 오스트리아-헝가리가 이 지역에 계속 영향력을 행사하려고 노력했다는 점이다. 오스트리아는 프로이센이 독일을 통일하기 이전부터 늘 동쪽에 관심이 컸는데, 독일제국이 성립한 뒤부터는 더욱 이곳에 매달렸다. 그러나 오스트리아 헝가리의 개입 때문에 가뜩이나 복잡한 이 지역의 정세는 더욱 복잡해졌고, 결국에는 20세기 초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는 무대가 된다.

 

미국은 서유럽 문명권이면서도 지리적으로 떨어져 있어 큰 혜택을 누렸다. 영국이 섬이라는 조건을 이용하여 최강국으로 부상할 수 있었다면, 미국은 그런 조건에다 영국이라는 문명의 창문도 있었으므로 더욱 독자적인 발전을 이루기가 수월했다. 남북전쟁으로 내실을 다지기 이전부터 미국은 태평양 쪽으로 해외 진출을 서둘렀는데, 그 성과가 바로 1854년 일본의 개항이다(하지만 미국보다 일본에 득이 되었다). 이후에도 미국은 하와이를 포함해 태평양 지역의 조그만 섬들을 하나씩 접수했고, 한반도에도 여러 차례 손을 내밀었다. 미국에 가장 큰 타격을 받은 나라는 에스파냐다. 19세기 초반 라틴아메리카 식민지를 몽땅 잃은 데다 유럽에서도 강국들에 밀려나면서 몰락해가던 에스파냐는 1895년과 1896년 쿠바와 필리핀에서 독립전쟁이 일어나자 이를 막기 위해 군대를 파견했다가 독립을 지원하고 나선 미국에 참패했다쿠바와 필리핀은 독립전쟁에서 큰 대조를 보였다. 쿠바군은 미군과 함께 열심히 싸워 적지 않은 전과를 올린 데 반해, 필리핀군은 전쟁에 별로 공헌한 게 없었다. 그 탓일까? 쿠바는 미국의 텃밭에 있으면서도 전후 독립국이 되었고, 필리핀은 에스파냐의 식민지에서 미국의 식민지로 바뀌었다. 식민지인들의 주체적 독립 투쟁은 그래서 중요하다. 이 미국-에스파냐 전쟁은 유럽 문명의 신세대가 구세대와 힘겨루기를 벌여 승리함으로써 시대가 바뀌었음을 확실히 보여주는 상징적인 의미가 있다.

 

 

좋았던 옛날 비잔티움 제국을 정복한 15세기에 오스만튀르크는 세계 최강이었다. 그러나 고인물이 썩듯이 제국은 변화하는 시대에 적응하지 못했다. 19세기 초에 동유럽을 잃고 그 뒤에는 아프리카마저 잃어 20세기 초에 이르면 지금의 터키와 비슷해진 모습을 보여준다.

 

 

 세계 지배에 나선 제국주의

 

 

유럽의 판도가 정해지고 유럽에서 더 이상 영토 분쟁의 여지가 없어졌다는 것은, 바꾸어 말하면 이제부터 유럽 국가들이 유럽 이외의 다른 지역에서 영토를 놓고 다투리라는 것을 예고한다. 아닌 게 아니라 이미 그전부터 해외 식민지 개척에 분주했던 유럽 각국은 유럽의 국제 질서가 잡히자 1870년대부터 곧바로 식민지 쟁탈전에 돌입했다. 그러나 이 새로운 전쟁에 유럽의 모든 나라가 참여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우선 오스트리아-헝가리는 항구가 없는 지리적 여건상 해외 진출이 불가능할뿐더러 전통적으로 공을 들인 곳이 동유럽이었으므로 해외 진출에 나설 의지도 약했다. 또 러시아는 유럽에서 항구를 얻겠다는 생각을 포기했고, 스칸디나비아와 에스파냐 역시 해외 진출에 나설 힘이 부족했다. 그렇다면 자연히 서유럽 국가들만 남게 되는데, 이들이 제국주의 열강의 핵심을 이루었다.

 

바깥으로 시선을 돌리게 된 열강의 눈에 가장 먼저 띈 곳은 아프리카였다. 대항해시대의 항로 개척으로 아프리카를 처음 알게 된 이후 유럽은 아프리카를 노예 공급처로만 이용해왔다노예무역이 절정에 달했던 18세기에는 아프리카의 노예가 신대륙으로 가서 면화를 생산하면, 그 면화(원료)를 영국이 수입해 면직물(완제품)을 만든 다음, 그것을 아프리카에 수출해 다시 노예와 교환하는 방식이 성행했다. 사람을 무역 상품으로 포함시키는 이런 행위를 무역이라 할 수 있는지 의심스럽지만 어쨌든 그것을 삼각무역이라 부르는데, 노예무역 가운데 가장 악질인 형태다. 콜럼버스의 시대 이후 수백 년간 노예무역으로 아프리카에서 신대륙에 팔려간 노예의 수는 1500~4000만 명에 달한다. 편차가 큰 이유는 정확한 조사가 어려울 정도로 마구잡이였기 때문이다. 노예무역의 거점인 앙골라는 16세기부터 포르투갈의 식민지였으나 그 당시에도, 또 이후에도 포르투갈은 더 이상 식민지를 확대하려 하지 않았다. 아프리카를 영토적인 관점에서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토의 중요성이 명백해진 19세기 중반부터 아프리카는 무역의 대상이 아니라 지배와 정복의 대상으로 바뀌었다. 게다가 이슬람권의 맹주로서 북아프리카를 관할하고 있던 오스만 제국이 약화된 것은 유럽 열강의 아프리카 진출에 좋은 조건이 되었다.

 

아프리카의 새 용도에 가장 먼저 눈을 뜬 것은 영국이었다. 영국은 19세기 초부터 아프리카의 내륙 탐험에 착수한 덕분에 이미 아프리카에 관한 상당한 지식을 축적하고 있었다. 그러나 19세기 중반까지는 영토적 욕심보다 그저 호기심 정도에 불과했으며, 그런 탓에 아프리카에 관한 연구도 주로 민간의 차원에서 종교적 목적으로 진행된 것이 대부분이었다(아프리카 탐험으로 유명한 영국 선교사 리빙스턴이 그 예다). 오히려 아프리카에 전진기지를 먼저 구축한 나라는 프랑스였다. 1830년 프랑스는 지중해의 해적을 소탕해 마르세유를 통한 지중해 무역을 활성화할 목적으로 알제리를 점령했다. 북아프리카는 8세기 이래로 이슬람 문명권이었으므로아프리카는 사하라 사막 이북(북아프리카)과 이남(·남아프리카)으로 나뉜다. 사하라가 있어 지리적으로도 확연히 구분되지만 북아프리카는 역사적으로나 인종과 문화적으로나 나머지 아프리카 지역과 크게 다르다. 북아프리카는 고대 오리엔트 시대에 페니키아인들이 여러 식민시를 세웠고(카르타고가 그 예다). 로마 시대에는 로마 제국의 정식 영토였으며, 이후에는 이슬람 문명권이 들어섰다. 15세기부터 북아프리카 동부는 오스만 제국의 영향권이었으나 대체로 거의 독립적인 여러 왕국으로 나뉘어 있었다프랑스로서는 이 지역에 오랜만에 그리스도교 문명권을 수복한 셈이다(나폴레옹이 이집트를 정복한 적이 있었지만 그 기간은 불과 3년 동안이었다.

 

 

전쟁 또는 살육 본격적인 제국주의 시대를 맞아 유럽 열강은 아프리카를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아프리카는 단순한 노예 공급지를 넘어 방대한 자본주의 시장이 될 수 있었다. 그림은 남아프리카에서 자행된 제국주의 학살의 장면이다. 유럽의 아프리카 정복이 대부분 이런 식이었다.

 

 

프랑스 역시 영국처럼 아프리카를 영토화하겠다는 생각은 없었다. 그러나 지중해 무역에 대한 프랑스의 욕심은 한 가지 기발한 발상을 낳았다. 1832년 이집트에 근무하던 프랑스 외교관 레스는 지중해와 인도양을 있는 수에즈 운하를 구상했다. 20여 년 뒤 그는 외교관을 그만둔 다음 1858년 수에즈 운하 회사를 설립하고 자신의 꿈을 실현하는 작업에 들어가 마침내 1869년 운하를 완공하게 된다.

 

그와 비슷한 무렵 아프리카의 남쪽 끝에서 아프리카의 새로운 가치가 발견되었다. 대항해시대에 발견된 남아프리카 지역에는 17세기부터 네덜란드가 건설한 케이프 식민지가 있었다. 당시 네덜란드의 신교도들은 종교 분쟁을 피해 이곳으로 이주해왔다. 이들을 보어(Boer)인이라 부르는데, 말하자면 이슬람이 북아프리카를 지배하기 시작한 8세기 이후 최초로 아프리카에 살기 시작한 백인들인 셈이다. 비록 네덜란드의 식민지이긴 했으나 이들은 농사를 짓고 살았으므로 본국과 지속적인 연관을 유지하려 하지 않았다. 따라서 19세기 초 영국이 인도 무역을 위해 케이프 식민지를 접수하겠다고 나섰을 때 동포라는 의식이 별로 없었던 보어인들은 내륙으로 더 들어가 트란스발 공화국과 오렌지 자유국이라는 두 개의 나라를 세우고 살았다.

 

그러나 1870년대에 이곳은 갑자기 말 그대로 귀해졌다.’ 귀금속과 보석, 즉 금과 다이아몬드가 발견된 것이다. 그렇잖아도 아프리카를 새로운 눈으로 보기 시작하던 영국은 즉각 케이프 식민지의 주둔 병력을 증강시켰다. 머잖아 원주민 백인과의 충돌이 불가피해졌다. 이리하여 발발한 보어 전쟁에서 보어인들은 1880년의 1차전에서는 그럭저럭 영국의 공격을 막아냈으나 1899년에 재개된 2차전에서 패배했다. 3년 뒤에는 보어인의 국가가 영국에 합병되어 남아프리카 공화국이 수립되었다. 아프리카에서 비빌 언덕을 잃은 네덜란드는 아프리카를 포기하고 동남아시아 식민지 경영에만 주력했다.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구분 수에즈 운하가 건설된 결과 서유럽에서 인도까지 이르는 뱃길은 무려 1만 킬로미터 이상 단축되었고, 아라비아 상인들의 대상 무역이 위축되었으며, 아시아와 아프리카를 지도상으로 분명히 구분할 수 있게 되었다. 이 그림은 18691117일 세계 각국의 국가 원수들이 참석한 가운데 치러진 수에즈 운하의 개통식 장면이다.

 

 

한편 영국의 아프리카 진출에 긴장한 프랑스는 알제리 기지의 영토화를 서둘렀다. 알제리 남쪽은 사하라 사막이므로 프랑스가 아프리카 영토를 개척하려면 동서 방향밖에 없었다. 1883년 알제리 동쪽의 튀니지가 프랑스령이 되었고, 뒤이어 알제리 서남부에는 방대한 프랑스령 서아프리카가 들어섰다. 이에 맞서 영국은 나이지리아를 점령하고 중부 아프리카에서 프랑스의 남하를 막았다. 서로의 식민지가 가까워지자 양측은 어떤 식으로든 부딪힐 수밖에 없었다.

 

먼저 시비를 건 쪽은 영국이었다. 영국은 1875년 이집트 왕실이 재정난으로 수에즈 운하의 주식을 내놓자 이를 재빨리 사들였다. 어차피 운하를 가장 많이 이용하는 나라는 영국이었으므로 여기까지는 프랑스도 별로 불만이 없었다. 그러나 그 사건을 계기로 이집트에서 외세 배척 운동이 일어나고 영국이 이를 진압한다는 구실로 이집트를 식민지로 만들어버리자, 이윽고 프랑스도 더 이상 가만히 있을 수 없게 되었다.

 

서쪽에서 동쪽으로 북아프리카를 관통해온 프랑스의 횡단 정책과 남쪽에서 북쪽으로 진출해온 영국의 종단 정책이 충돌했다. 1898년 군대를 동원한 양측은 이집트 남부의 파쇼다에서 맞섰다. 자칫하면 100여 년 전 북아메리카 대회전이 재현될 판이었다. 그러나 전쟁에 부담을 느낀 프랑스는 결정적인 순간에 꼬리를 내리고 물러났다(급박한 사태가 전쟁으로 비화하지 않은 이유는 유럽 대륙에서의 마찰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어차피 식민지는 아직도 쌔고 쌨으니까).

 

문제는 독일과 이탈리아였다. 두 나라는 남보다 한참 늦게 통일을 이룬 것도 문제지만 통일을 이룬 뒤에야 비로소 본격적인 자본주의 발전기에 접어들었다는 게 더 큰 문제였다. 비스마르크는 아직도 해외 식민지의 필요성을 실감하지 못하고 있었다. 열강의 일원이라는 체면상 아프리카 진출에 참여해 동아프리카의 일부를 차지했지만, 식민지 확장에 그다지 적극적이지는 않았다. 또한 이탈리아는 프랑스에 밀려 북아프리카를 포기하고 1896년 에티오피아를 침략했다가 전투에 능한 에티오피아 전사들에 무참히 패배해 열강의 체면을 구겼다. 열강의 땅따먹기 게임이 숨 막히게 진행된 결과, 1910년 무렵까지 아프리카는 미국에서 해방된 노예들이 세운 라이베리아와 에티오피아를 제외하고는 모든 지역이 열강에 의해 분할되기에 이르렀다그 밖에 열강은 아시아에서도 치열한 경합을 벌였다. 인도는 18세기부터 영국의 식민지였고, 인도차이나는 프랑스, 인도네시아의 섬들은 네덜란드, 필리핀은 미국이 차지했다. 이에 비해 그전에 상당한 정도의 문명이 존재했던 동아시아는 외세의 침탈을 당했을지언정 식민지로 전락하지는 않았다. 아시아에서 유일하게 열강의 침략을 받지 않은 곳은 서아시아인데, 이는 물론 오스만 제국의 영토였기 때문이다.

 

 

제국주의자의 전형 남아프리카 케이프 식민지의 총독을 지낸 세실 로즈다. 그는 열일곱 살의 어린 나이에 대학에 가는 대신 남아프리카로 가서 다이아몬드 광산으로 큰돈을 벌었고, 그 재력을 바탕으로 식민지 정계에 진출해 총리까지 지냈다. 여러모로 제국주의 시대의 전형적인 제국주의자였다.

 

 

 태풍의 눈이 된 독일

 

 

제국주의 열강의 아프리카 쟁탈전을 보면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의문이 있다. 그들은 어떻게 정복지를 식민지로 만들었을까? 유럽이 해외 진출을 처음 시작했던 15세기에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은 토르데시야스 조약을 맺어 타협을 이루었고 그 타협을 주재한 사람은 로마 교황이었다(28~29쪽 참조). 이제 그런 주재자가 사라진 상황에서 열강은 어떻게 서로의 식민지를 승인하고 타협을 이루었을까? 더구나 유럽 열강은 아프리카에서는 전쟁을 불사했으면서도 묘하게도 그 다툼을 유럽으로 연장하지는 않았다. 다시 말해 모처럼 짜놓은 유럽의 판도를 깨지는 않은 것이다. 전쟁과 타협이 어우러지는 이런 고도의 국제 질서를 유지하는 축은 무엇이었을까?

 

사실 비스마르크가 식민지 개척에 열성을 보이지 않은 이유는 또 한 가지가 있었다. 그것은 그가 몹시 바빴다는 점이다. 그는 프랑스를 고립시키기 위한 외교에 마치 정신병자처럼 매달렸다. 심지어 그는 프랑스가 얌전히 북아프리카에 몰두하는 게 고마워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아프리카 분할이 진행되면서 열강이 서로 큰 충돌을 벌이지 않고 타협을 이룰 수 있었던 배경에는 각국의 이해관계를 절충하는 복잡한 외교 활동이 있었으며, 그것의 총지휘가는 비스마르크였다.

 

당시 프랑스와 독일, 두 나라의 관계는 마치 복수전을 꿈꾸는 패자와 더 이상 싸우기 싫다며 버티는 승자의 관계와 비슷했다. 1871년 프로이센에 패하고 본의 아니게 프로이센 왕국을 독일제국으로 만들어주는 데 일등공신이 된 프랑스는 이후 여러 차례 독일에 대한 복수를 꿈꾸었으나 비스마르크는 좀처럼 도전을 받아주지 않았다. 전쟁을 부를 만한 상황에서 전쟁을 피하려면 피흘리지 않는 다른 전쟁으로 대체할 수밖에 없다. 요즘 같으면 스포츠가 대신하겠지만, 19세기 후반의 비스마르크는 유럽 전체를 무대로 스포츠에 못지않은 흥미로운 대체 전쟁을 벌였다. 그것은 바로 외교전이었다.

 

비스마르크가 가장 두려워한 것은 프랑스였다. 비록 전쟁에서는 이겼으나 영원한 승자는 없는 법, 게다가 프랑스는 전통에 빛나는 강국이었다. 그래서 비스마르크는 1873년에 오스트리아, 러시아와 함께 동맹을 맺어 프랑스를 고립시키려 했다(마침 세 나라는 모두 제국이었으므로 그것을 삼제동맹이라 부른다). 그러나 오스트리아는 태생(민족과 언어)도 같았고 이해관계를 같이할 수 있었지만 러시아는 프랑스가 접근하려는 것을 차단하기 위해 동맹에 끌어들인 것이었으므로 분란의 여지가 있었다. 과연 1878년 산스테파노 조약의 후속 조치로 체결된 베를린 조약에서 러시아는 불만을 품고 동맹을 탈퇴하려 했다(전쟁에서 피 흘린 것은 러시아였는데 팔짱끼고 있던 오스트리아가 발칸을 지배하려 들었으니 당연한 일이다).

 

비스마르크의 활약이 펼쳐지는 것은 이때부터다. 그는 혼자 동분서주하면서 러시아와 오스트리아를 어르고 달래, 만약 어느 지역에서든 전쟁이 벌어질 경우 세 나라끼리는 최소한 중립을 유지하자는 약속을 성사시켰다. 게다가 아프리카에서 프랑스에 밀려난 이탈리아가 볼멘 목소리로 호소해오자 비스마르크는 1882년 오스트리아, 이탈리아와 함께 삼국동맹을 새로 맺었다. 프랑스의 적은 독일의 친구, 이 간단한 원칙을 그는 최대의 철칙으로 삼았던 것이다.

 

 

강경에 밀린 철혈 19세기 후반 유럽 국제 정세의 열쇠는 독일제국이 쥐고 있었고, 독일제국의 열쇠는 빌헬름 2(왼쪽)와 비스마르크(오른쪽)가 쥐고 있었다. 신생 독일제국의 국력을 증진시키려는 의도는 두 사람이 똑같았으나, 그 방법은 정반대였다. 비스마르크는 전쟁을 피하고 외교에 주력한 반면, 빌헬름은 해외 식민지 분할에 독일이 적극 참여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결국 노회한 철혈재상이 패기의 강경 황제에게 밀려났고, 이것으로 유럽의 판도는 서서히 전쟁의 조짐을 품게 된

. 그 결과는 바로 제1차 세계대전이다.

 

 

어쨌든 1871년 이후 20년 동안 아프리카에서 유럽 각국이 치열한 경쟁을 벌이면서도 유럽에서는 작은 전쟁 한 번 일어나지 않았던 것은 거의 전적으로 비스마르크의 덕분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노력하고 그렇게 노련했던 그도 젊은 패기를 당해낼 수는 없었다. 1888년 스물아홉 살에 독일 황제가 된 빌헬름 2(1859~1941, 재위 1888~1918)는 할아버지인 빌헬름 1세와 달리 비스마르크에 의지하려 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비스마르크처럼 프랑스 공포증에 걸리지도 않은 데다 독일을 강대국으로 키우려면 해외 식민지 경쟁에 적극 뛰어들어야 한다고 믿었던 것이다.

 

빌헬름의 생각은 기본적으로 옳았으나 문제는 역시 프랑스였다. 황제의 신임을 잃은 비스마르크가 실각하자 프랑스는 러시아에 접근했고, 비스마르크만 믿은 러시아도 프랑스에 접근했다. 결국 젊은 빌헬름의 장점은 늙은 비스마르크의 단점이었고, 빌헬름의 단점은 비스마르크의 장점이었던 셈이다.

 

독일의 급작스런 태도 변화는 유럽 세계에 큰 파문을 던졌다. 프랑스에 이어 그동안 고립을 유지해오던 영국마저도 자극을 받았을 정도다. 사실 영국은 세계 분할에서 프랑스까지는 파트너로 인정해도 독일에 대해서는 경계심을 품고 있었다. 두 나라가 누비기에도 아프리카는 이미 비좁아진 판인데 여기에 독일까지 뛰어든다면 입이 너무 많아질 가능성이 있었다. 더욱이 아프리카는 이미 분할이 완료되어 있었으므로 더 이상의 분할은 곧 재분할이 될 것이고, 재분할은 곧 전쟁을 뜻할 터였다.

 

파쇼다 사건으로 관계를 호전시킨 영국과 프랑스는 1904년 영국-프랑스 협상을 타결함으로써 더욱 가까워졌다. 협상의 내용은 영국의 이집트 지배를 허락하는 대신 프랑스는 모로코를 차지한다는 것이었는데, 누가 봐도 독일을 배제하려는 의도가 분명했다. (마침 빌헬름은 당시 모로코를 노리고 있었다). 게다가 영국은 3년 뒤 러시아와도 협상을 성립 시켜 계속 독일을 따돌렸다. 10여 년에 걸쳐 프랑스와 러시아, 영국과 프랑스, 영국과 러시아의 동맹이 차례로 맺어짐으로써, 원래는 서로 앙숙이던 영국과 프랑스, 러시아가 역사상 처음으로 삼국협상이라는 동맹 체제를 구축하게 되었다영국-러시아의 우호는 나폴레옹 전쟁 이후 처음이고, 프랑스-러시아의 동맹은 18세기 중반 7년 전쟁 이후 처음이다. 심지어 영국과 프랑스가 공식적으로 우호 관계를 맺은 것은 역사상 처음이다. 사실 영국은 백년전쟁 이래 프랑스와 계속 크고 작은 다툼을 벌였지만, 경쟁 관계였을 뿐 근본적으로 적대적인 관계는 아니었다. 역사적으로 영국은 앙주 왕조시대, 더 멀리는 정복왕 윌리엄 시대부터 프랑스와 불가분한 관계를 이루어왔다(실제로 16세기까지 영국 왕실에서는 프랑스어를 사용했다. 그 시대에 셰익스피어가 유명해진 것은 그가 영어의 발전에 크게 공헌했기 때문이다), 영국에 있어 프랑스는 미워도 낯익은 나라였다. 그러나 영국에 있어 독일은 이질적이었고, 또 그만큼 위협적인 상대였다. 목표는 바로 얼마 전에 형성된 독일-오스트리아-이탈리아의 삼국동맹에 대항하려는 것이었다.

 

유럽에 특별한 강대국을 두지 말자는 빈 체제의 구도는 19세기 내내 대체로 지켜졌으며, 비스마르크 체제는 그 가장 탁월한 계승이었다. 그러나 20세기 초반이 되면서 그 구도는 절반만 유지된다. 절대적인 강국은 없었으나 이제는 유럽 전체가 두 편으로 갈리게 된 것이다. 한편은 시민혁명을 통해 시민사회의 전통을 쌓은 선진 제국주의 국가들이 주도하고, 다른 한편은 그런 역사와 전통이 부족하고 식민지 분할에서 불만이 많은 후발 제국주의 국가들이다. 조만간 이 이질적인 두 집단이 불협화음을 낼 것은 뻔했다. 결국 전쟁이 없었던 비스마르크 체제는 폭풍 전야의 침묵이었던 것이다.

 

 

삼두 체제 균형을 위한 최소한의 정족수는 셋이다. 솥의 발이 세 개여야 설 수 있다는 정립(鼎立)의 원리는 동양의 역사적 경험만이 아니라 보편적인 진리다. 그림은 비스마르크의 작품인 삼국동맹의 삼두, 즉 독일, 오스트리아, 이탈리아의 세 황제를 보여준다. 제국의 시대가 역사의 뒤안길로 물러나는 시기에 세 황제가 모였으니 수구의 대명사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인용

목차

한국사 / 동양사

728x90
반응형
그리드형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