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부 열매②
유럽 세계는 영토 분할이 끝나자 자연히 시선을 바깥으로 향한다. 영국을 비롯해 갓 태어난 유럽의 국민국가들은 활발히 세계 정복에 나선다.
그러나 빵은 제한되어 있고 입은 많다. 뒤늦게 국민국가를 이루고 식민지 경쟁에 뛰어든 독일은 자신의 몫이 거의 남아 있지 않음을 깨닫게 된다. 그렇다면 남의 것을 빼앗는 수밖에 없다. 아프리카 분할이 완료된 20세기 초반에 독일은 영토 재편을 획책하는데, 그것은 인류 역사상 최대 규모의 전쟁인 제1차 세계대전이다. 전쟁의 와중에 또 하나의 구체제인 러시아가 제국의 명패를 버리고 최초의 사회주의 국가로 탈바꿈한다. 제1차 세계대전은 전혀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
시민 사회의 역사가 짧은 독일과 이탈리아는 파시즘이라는 신무기로 무장하고 다시 유럽의 질서에 도전한다. 이렇게 해서 벌어진 제2차 세계대전은 17세기 초 30년 전쟁으로 시작된 경쟁을 통한 질서 재편의 종결판이 된다.
1장 각개약진의 시대
밖으로 나갈 수밖에 없는 이유
17세기 초 30년 전쟁 이래 나폴레옹 전쟁에 이르기까지 200년에 걸친 전란의 시대는 유럽인들에게 큰 고통을 안겨주었지만, 동시에 오늘날의 유럽 세계를 탄생시키는 과정이기도 했다. 진통 없이 새 생명을 얻을 수 없듯이, 유럽이 중세의 오랜 틀을 깨고 진정한 ‘르네상스’를 이루기 위해서는 그만큼의 희생이 필요했다. 어느 나라, 어느 민족의 역사에도 고통과 고난이 없지는 않았지만, 그 시기 유럽의 진통은 유례없이 길고 고통스러웠다.
어쨌든 유럽인들은 고통의 대가를 얻었다. 이 근대 이후 유럽 세계를 휩쓴 전란의 시발점은 16세기 초 종교개혁으로 잡을 수도 있고, 17세기 초 30년 전쟁으로 잡을 수도 있다(후자의 입장을 택할 경우, 16세기의 전란은 종교전쟁이 되고 17세기부터 영토 전쟁으로 분류된다). 이 전란의 최종 마무리는 19세기 초의 나폴레옹 전쟁이 아니라 20세기 중반의 제2차 세계대전이다. 하지만 이 350년 혹은 450년에 달하는 전란기는 나폴레옹 전쟁을 전후로 성격이 달라지기 때문에 19세기 초를 반환점으로 볼 수 있다. 오랜 힘겨루기 끝에 유럽 각국은 일국적으로는 국민국가를 이루었고, 국제적으로는 나름대로 서열을 지었으며, 서로 싸워봤자 득이 될 게 전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안에서의 다툼이 일단락되었으니 다음 행보가 바깥을 향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18세기까지도 유럽 세계의 대외 진출은 꾸준히 지속되었지만 19세기부터는 전보다 규모도 커지고 참가국의 수도 늘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큰 차이는 이때부터 대외 진출이 제국주의적 침략의 양상을 띠게 되었다는 점이다.
유럽이 밖으로 나가게 된 데는 정치적 요인만 작용한 게 아니었다. 통합적이던 유럽 세계의 정치가 각국별로 분해되면서 자본주의라는 새로운 경제체제가 싹텄음은 앞에서 본 바 있다. 전란의 시대 동안 국민국가들이 형성되는 것과 동시에 각국에는 국민경제가 발달했다. 유럽은 이제 정치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각국 별로 분권화된 것이다. 유럽 각국은 각자 자국의 경제력을 키우기 위해 현실의 전쟁에 못지않은 경제 전쟁에 돌입했으며, 앞다퉈 자본주의를 도입하고 육성하기 시작했다. 그 성과가 산업혁명이다.
산업혁명의 불씨가 처음 피어난 곳은 영국이다. 1688년 명예혁명으로 정치권력이 왕에게서 의회로 옮겨온 것은 곧 신흥 부르주아지가 권력을 장악했다는 것을 뜻했다. 사실 18세기에 영국이 유럽의 패권을 놓고 프랑스와 겨룬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그런 정치적 변화의 덕분이었다. 법적·정치적 자유와 권력을 얻은 데다 국제적으로도 패권을 장악한 영국 부르주아지는 본격적으로 자본주의적 경제 발전을 주도하기 시작했다.
자본주의는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이윤의 극대화를 모토로 내걸고 효율성만을 극단적으로 추구하는 제도다. 이 효율성은 두 가지로 나뉜다. 첫째, 생산기술의 발전이다. 이와 관련해 당시 영국에서는 숱한 발명이 이루어졌는데, 여기서는 방적기 하나만 예로 들어보자. 1764년 하그리브스는 제니 방적기를 발명했고, 5년 뒤 아크라이트는 그것을 개선해 수력방적기를 개발했으며, 다시 10년 뒤 크롬프턴은 그것을 뮬 방적기로 개량했고, 1769년 카트라이트가 역직기를 발명했다. 불과 20년 만에 면화에서 실을 뽑아 옷감을 만드는 공정이 비약적으로 발전했고, 생산력은 열 배 이상으로 증대했다. 더구나 그 원료인 면화는 18세기 초부터 영국의 동인도회사가 인도에서 들여오기 시작한 것이었으니, 생산기술의 변화 속도가 얼마나 빨랐는지 실감할 수 있다.
둘째, 생산 제도의 측면이다. 자본주의 이전까지 상품이란 주로 소비와 사용을 목적으로 했고, 상품의 생산도 소비에 종속되어 있었다. 쉽게 말해 누가 의자를 필요로 하면 목수는 그것을 만들어 파는 식이었다. 그러나 자본주의가 발달하면서 생산의 개념은 처음부터 판매를 겨냥한 생산으로 바뀌었다. 목수는 이제 누가 주문하지 않아도 의자를 미리 만들어 시장에 내놓는다【이 점은 예술품에도 적용된다. 앞에서 본 것처럼(61~62쪽 참조), 르네상스 시대에 이탈리아 화가와 조각가, 건축가 들은 교회나 귀족의 주문을 받아 작품을 제작했다. 그러나 자본주의적 생산의 개념이 예술에도 도입되면서 예술가들은 미리 작품을 제작한 다음 시장에 내놓게 되었다(그 덕분에 예술가들은 전보다 더 ‘내적인 동기’에서 작품 활동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물론 ‘팔리는 작가’에 한하지만). 이 새로운 방식은 19세기에 화랑과 화상이라는 자본주의적 미술 시장을 낳았고, 이후에는 거꾸로 시장이 예술가들을 지배하는 현상을 유발했다】. 결국에는 누군가 그 의자를 구매해서 소비(사용)하겠지만, 소비를 위한 생산과 시장을 위한 생산은 근본적으로 다르다. 무엇보다 시장에 상품을 내놓으려면 대량생산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 대량생산의 필요성이 분업이라는 획기적인 생산방식을 낳았고, 자본주의적 기업이라는 획기적인 생산 단위를 만들어냈다.
생산기술의 발전은 대다수 사람들에게 이익을 주지만 생산 제도의 변화는 그렇지 않다. 효율성이라는 지고의 목표 아래 모든 노동력이 편제되면 자본과 상품의 소유주, 즉 자본가는 대만족이지만 노동력의 소유자, 즉 노동자는 불만이다. 노동자는 자신이 직접 노동력을 투입해 상품을 생산하면서도 자기 노동력의 산물을 소유하지는 못한다. 생산은 사회적이고 집단적으로 이루어지는 데 반해, 생산물의 소유는 사적이고 개인적이다. 이러한 사회적 생산과 사적 소유의 모순은 자본주의의 초창기부터 문제로 떠올랐다. 19세기에 사회주의 이념이 발생하는 것은 바로 여기에 뿌리를 두고 있다.
▲ 세대교체 빛이 있으면 그늘도 있게 마련이다. 공장을 이용한 대량생산 방식은 모두에게 이익을 가져다줄 것 같았지만 그 때문에 전통적인 집 안 수공업은 사양화될 수밖에 없었다. 그림은 산업혁명의 여파로 가동이 중지된 집 안 수공업장이다. 전통적인 방식으로도 질 좋은 물건을 만들 수는 있겠지만 자본주의의 큰 특징은 바로 질이 아니라 양이 지배하는 시대라는 점이다.
그러나 산업혁명으로 자본주의가 한창이던 19세기 초 영국에 더 시급하고 중요한 문제는 따로 있었다. 그것은 바로 시장의 문제였다. 생산은 비약적으로 성장하는데 시장은 한계가 있다. 영국의 자본가들은 대량생산된 상품을 구매해줄 소비 인구가 필요했다. 생산력이 비약적으로 발전한 만큼 국내의 인구만으로는 구매를 전부 충당할 수 없었고, 유럽 각국은 저마다 보호관세와 무역 장벽을 높이 세워 영국의 경제 침략에 대항하고 있었다.
해외 식민지의 새로운 ‘용도’가 발견된 것은 그때였다. 그전까지 식민지는 주로 물품의 수입처라는 의미가 강했다. 예를 들어 영국은 인도 식민지를 향료와 차 같은 소비품과 면화를 비롯한 공업 원료를 공급하는 용도로 이용했다. 그러나 시장에 눈뜨고 보니 인도라는 식민지가 전혀 다르게 보였다. 차와 향료, 면화를 생산하는 인도 농민들에게 영국의 공업 상품을 판매하면 어떨까? 나아가 인도만이 아니라 모든 해외 식민지를 시장으로 이용한다면 어떨까?
산업혁명이 자본주의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진짜 혁명적인 것은 산업혁명보다도 그런 발상의 전환이었다. 이제 해외 식민지는 원료 공급지만이 아니라 해외시장으로도 이용할 수 있다. 나아가 식민지 개척은 국내의 정치적·경제적 모순을 완화하고 해소하는 통로도 될 수 있다. 이런 영국의 발상은 금세 다른 나라들로 확산되었다.
새로운 진출의 이유와 방식이 생겨났다. 마침 오랜 전란기가 끝났으니 유럽 각국은 바깥으로의 진출이 더욱더 절실했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유럽 내에 새로운 전후 질서를 수립해야 했다. 전란의 시대가 길었던 만큼 그 마무리도 쉽지 않아 이 기간은 예상외로 19세기 중반까지 끌게 된다.
▲ 산업화와 그 그늘 하그리브스의 제니 방적기(아래쪽)는 방적 기술을 획기적으로 발달시켜 영국의 산업혁명을 선도했다. 그러나 급속한 산업혁명은 화려한 산업화의 빛만큼 깊고 어두운 그늘을 만들었다. 런던에 산업 노동자들이 거주하는 대규모 빈민촌(위쪽)이 생겨난 것이다. 앞서의 인클로저 운동에서와 같이 역사에서 진보란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하는 대목이다.
200년 만의 외교
나폴레옹 전쟁을 끝낸 1814년 9월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에서는 새로운 국제 질서를 모색하기 위한 회의가 열렸다. 실로 오랜만의 외교 테이블이었다. 1648년의 베스트팔렌 조약 이래로 이렇게 대규모의 국제회의는 처음이었으니까. 그때와 마찬가지로 큰 전쟁이 끝났으니 당연히 논공행상(論功行賞)이 있어야 했다. 전후 질서와 논공행상, 그것이 빈 회의의 주된 목적이었다.
그러나 19세기 초 유럽의 상황은 베스트팔렌 조약이 체결되었던 17세기 중반과 크게 달라져 있었다. 영토 국가의 초창기였던 170년 전에는 일찍 영토의 중요성을 깨우친 나라들이 패전국들의 영토를 적당히 나누어 먹는 식으로 쉽게 합의를 볼 수 있었으나, 이제는 영토 문제라면 유럽의 어느 나라나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드는 판이었으므로 논공행상이 결코 쉽지 않았다.
빈 회의에는 유럽의 거의 모든 나라 대표가 모였지만 실제로는 오스트리아, 프로이센, 영국, 러시아의 네 나라가 주도하는 분위기였다. 특히 의장을 맡은 사람은 오스트리아의 재상 메테르니히(Metternich, 1773~1859)였는데, 당대 유럽에서 가장 보수적인 나라의 수도에서 회의가 열리고 그 나라 대표가 의장을 맡았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이 회의의 기본 성격을 드러내고 있었다. 즉 회의는 처음부터 프랑스 혁명 이전의 질서로 돌아가자는 보수적 성격을 띠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과거로 돌아가자는 것도 말이 쉽지 실제로는 어려운 문제였다. 난관에 부딪힐 때마다 메테르니히는 연회와 무도회를 열고 막후 협상을 통해 타개하려 했지만(이 때문에 “회의는 춤춘다.”라는 비난도 들어야 했다), 회의는 계속 공전하면서 좀처럼 결론을 내지 못했다. 여기에 나폴레옹이 엘바 섬에서 탈출해 잠시 돌아오는 사건까지 겹쳐 회의는 예상보다 훨씬 늦어진 1815년 6월에야 어렵사리 합의를 이룰 수 있었다.
기본적인 합의 내용은 프랑스를 통제하고 강대국들 간에 힘의 균형을 이루어 어느 한 나라가 패권을 차지하도록 놔두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프랑스, 프로이센, 오스트리아의 틈바구니에 있는 스위스는 아예 영세중립국으로 만들었고, 나폴레옹이 오스트리아에서 빼앗은 북이탈리아와 벨기에는 각각 오스트리아와 네덜란드에 돌려주었다. 이로써 북이탈리아는 다시 예전과 같은 외국 지배의 상태로 되돌아갔고, 16세기 이래 공화국이던 네덜란드는 살림을 늘려 네덜란드 왕국으로 바뀌었다. 또 나폴레옹에게 결정적인 패배를 안긴 러시아는 그 대가로 폴란드를 얻었으나 패권주의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방침에 따라 일단 폴란드 왕국을 별도로 세우고 러시아의 관할에 맡겼다(그러나 폴란드의 왕위를 러시아 황제가 겸했으므로 폴란드는 아직 독립한 게 아니었다).
▲ 춤추는 회의 메테르니히가 주도한 빈 회의는 그야말로 알맹이가 ‘빈 회의’였다. 그림에서처럼 회의는 사교장을 방불케 할 만큼 파티와 무도회가 이어지는 흥청망청한 분위기였다. 회의에 참석한 유럽의 군주와 재상 들은 서로 친목을 다지면서 ‘좋았던 옛날’로 되돌아가고자 했다.
가장 크게 변화한 것은 독일이다. 아무리 회의의 모토가 ‘좋았던 옛날로 돌아가자’는 것이라 해도 나폴레옹이 문을 닫은 신성 로마 제국까지 부활시킬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어차피 독일 지역에는 북부에 프로이센, 남부에 오스트리아라는 중심이 있으므로, 회의에서는 이 두 나라를 축으로 많은 소국가를 어느 정도 교통정리하기로 했다. 마침 18세기까지 독일 지역에 300여 개나 난립한 영방국가들은 나폴레옹 전쟁 기간에 서로 이합집산을 이룬 결과 10분의 1로 줄어들어 있어 통합도 어렵지 않았다. 그래서 회의는 35개 영방국가와 4개 자유시를 승인하고 그들과 오스트리아, 프로이센을 한데 묶어 새로 독일연방‘을 구성하도록 했다. 비록 느슨한 연방체이긴 하지만 이제 비로소 ‘독일’ 이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을 만한 단일한 정치적 관계가 형성된 것이다【승전국의 하나였던 프로이센은 프랑스와 다투던 라인 강 유역의 중부와 작센을 얻어 가장 남는 장사를 했다. 비록 전통에서 밀려 오스트리아에 독일연방의 맹주 자리를 내주기는 했으나 이후 프로이센을 중심으로 독일이 뭉치게 될 조짐은 이 무렵부터 가시화되기 시작한다. 만약 빈 회의를 주도한 오스트리아가 이탈리아에 신경을 끊고 그 대신 신성 로마 제국과 합스부르크의 전통적인 영향력 하에 있었던 남독일에 더 욕심을 부렸다면, 오늘날 독일보다 오스트리아가 더 강대국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또 한 가지 회의의 성과물은 4국동맹이다. 회의를 주도한 오스트리아, 영국, 러시아, 프로이센은 서로 속셈이 다르고 경쟁관계에 있었지만, 적어도 다시는 프랑스 같은 특출한 강대국이 등장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데 의견이 일치했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들끼리 향후 유럽의 국제 질서를 주도하기로 합의하고 4국동맹을 맺었다(이렇게 단독의 패권을 부정하는 대신 복수의 리더십을 인정하는 것은 유럽 세계의 역사적 전통이다). 이 동맹은 나폴레옹이 완전히 실각한 뒤 프랑스까지 끌어들여 5국동맹으로 확대되었으며, 빈 회의 이후 해마다 정기적인 모임을 가졌다. 비록 동맹은 다섯 나라 간의 입장과 이해관계가 달라 강력한 결집체를 이루지도 못하고 큰 효과를 거두기도 못했지만, 강대국들이 국제 관계를 주도하는 유럽식 외교의 전범이 되었다【어떤 의미에서 이것은 각국 내부에서는 사라진 중세적 신분제가 국제 관계로 확장된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실제로 러시아는 4국동맹에 앞서 봉건 영주식의 서열화로 국제적 안정을 취하자는 신성동맹을 주장했다. 억지춘향 격이기는 하지만 여기에 유럽의 군주들이 참여한 것을 보면 아직도 중세적 전통이 근절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겉으로는 민주적인 듯해도 실상은 강대국들이 장악하고 있는 오늘날의 국제 연합이나, 강대국들의 모임임을 공식적으로 표방하고 있는 G-X(G-7, G-20) 같은 오늘날의 국제기구들 역시 멀리 보면 중세적 신분제의 연장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빈 회의가 낳은 빈 체제는 처음부터 치명적인 약점을 안고 있었다. 프랑스 혁명 이전으로 돌아가려면 최소한 혁명 이전의 상태에 모두가 만족해야 하고, 혁명 이후의 변화가 무시할 수 있을 만큼 적어야 한다. 하지만 일부 지배층을 제외하면 각국의 국민 대다수가 역사의 시계추를 되돌리는 데 반대했다. 또한 프랑스 혁명에서 나폴레옹 전쟁까지의 기간은 겨우 20여 년이었지만 그사이의 변화는 어느 시기보다도 컸다.
특히 국가의 주권이 왕의 것이 아니라 국민의 것이라는 자유주의 사상은 이미 입헌군주제와 공화제의 경험을 가지고 있는 영국과 프랑스에서 지배적 이념으로 자리 잡았으므로 빈 체제의 복고주의는 리더 격인 나라들에서조차 일관되게 통용되지 않았다. 따라서 5국동맹 내에서도 영국·프랑스의 서유럽과 오스트리아·프로이센·러시아의 동유럽은 견해 차이가 심했다. 특히 새로이 연방으로 묶인 독일 지역에서는 자유주의 시민 세력이 성장하면서 보수적인 지배층과 갈등을 빚는 사태가 잇달았다.
전후의 리더로 떠오른 영국은 독일 지역이야 어차피 관할권이 아니니까 메테르니히의 주도 아래 독일 자유주의 운동이 가혹하게 진압되는 과정을 지켜보기만 했다. 그러나 메테르니히가 옛 가톨릭권이자 보수의 한 축을 이룬 에스파냐와 포르투갈, 나폴리의 자유주의 운동까지 진압하려 들자 영국은 내정간섭이라면서 반대의 뜻을 나타냈다. 소극적 반대인 탓에 그 지역에서도 메테르니히의 무력 진압이 성공했지만, 뒤이어 라틴아메리카에서 독립의 물결이 일자 영국의 태도는 적극적으로 바뀌었다.
미국의 독립을 가까이에서 목격한 라틴아메리카의 민중들은 식민지 미국이 ‘세계 최강의 본국’과 싸워 승리한 데서 큰 자극을 받았다. 게다가 프랑스 혁명의 이념은 유럽의 대서양 상선들을 타고 멀리 이곳까지 전해졌다. 유럽에서는 자유주의로 불리는 이념이지만 아직 국가조차 성립되지 않은 라틴아메리카에서는 자유주의가 곧장 독립과 건국의 이념으로 이어졌다. 사실 영국은 이미 국력으로는 세계 최강이면서도 유럽 대륙에 관한 한 맹주 격인 오스트리아에 양보하고 있었을 뿐이다. 하지만 신대륙에 관한 문제에서는 더 이상 양보할 필요도 없고 그럴 입장도 아니었다.
이렇게 해서 미국의 독립을 막기 위해 싸웠던 영국이 라틴아메리카의 독립을 적극 지원하는 묘한 사태가 발생했다. 이미 라틴아메리카의 ‘본국’인 에스파냐는 오래전에 종이호랑이로 전락했고, 메테르니히가 라틴아메리카에까지 무력간섭에 나서기에는 힘이 부쳤다. 게다가 신대륙의 맹주로 등장한 미국은 1823년 먼로 선언으로 신대륙과 유럽 간에 분명한 선을 그음으로써 라틴아메리카의 독립을 간접 지원했다(먼로 대통령은 유럽 열강이 아메리카에 개입하려는 것을 미국에 대한 적대 행위로 간주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그 덕분에 아르헨티나 (1816)를 필두로 칠레(1818), 콜롬비아(1819), 멕시코(1820), 브라질(1820), 페루(1821), 볼리비아(1825) 등 라틴아메리카의 주요 국가들이 이 무렵에 생겨났다【계속해서 1830년에는 콜롬비아에서 베네수엘라와 에콰도르가 분립되었고, 1838년에는 과테말라에서 코스타리카까지 이르는 중앙아메리카 국가들이 멕시코에서 독립했다. 오늘날 중남미 국가들은 거의 대부분 19세기 초반 20년 동안에 우후죽순처럼 생겨난 나라들이다. 이렇게 신생국이 대거 독립한 시대는 20세기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나 다시 보게 된다】.
사실 독립의 물결은 떨리 가야만 볼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비록 신생국은 아니지만 동유럽의 발칸 반도에서도 오랜 식민지 시대를 청산하려는 움직임이 거세게 일었다. 15세기 이후 동유럽의 주인 노릇을 한 오스만튀르크는 나폴레옹 전쟁에서 대프랑스 동맹에도 참여했지만, 서유럽 국가들은 이제 늙고 병든 튀르크를 더 이상 두려워하지도 않았고, 따라서 새삼 이교도 국가와 행동을 같이할 이유도 없었다. 그런 상황이었으니, 300년 가까이 튀르크의 지|배를 받아온 그리스에서 독립운동이 일어나자 서유럽 국가들이 어디를 지원할 것인지는 처음부터 명백했다. 흥미로운 것은 메테르니히의 태도다. 이제까지 유럽의 국제 문제에 사사건건 개입해 온 그가 그리스에 관해서는 간섭하지 않겠다는 자세를 취한 것이다. 자유주의를 극도로 혐오한 그는 심지어 이교도가 점령하고 있는 유럽의 일부가 유럽 문명권으로 되돌아오려는 것까지도 환영하지 않았다.
하지만 유럽의 자유주의자들은 정반대였다. 그도 그럴 것이 그들의 이념적 뿌리는, 가까이는 르네상스이고 멀리는 그리스의 고전 문명이 아니던가? 특히 당시 유럽을 휩쓸던 낭만주의 계열의 지식인들은 일제히 그리스의 독립을 지원하고 나섰고, 심지어 개인적으로 그리스 독립운동에 참여하기도 했다. 영국의 시인 셸리(Percy Shelly, 1792~1822)가 “우리는 모두 그리스인”이라고 외친 것이라든가, 그의 친구이자 시인인 바이런(George Byron, 1788~1824)이 다리 장애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로 달려간 것은 오로지 그리스가 유럽 문명의 뿌리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물론 실제로 그리스의 독립에 도움이 된 것은 그들이 아니었다. 동방정교의 적통이자 ‘제3의 로마’로 자처하던 러시아는 이교도를 물리치기 위해 새로운 십자군 전쟁을 부르짖었고, 종교로 포장한 러시아의 태도 이면에서 지중해 진출의 의도를 읽은 영국과 프랑스는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튀르크에 대한 합동 공격에 나섰다. 결국 1829년 오스만 제국은 그리스의 독립을 승인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 19세기 내내 제국은 발칸에 대한 영향력을 점차 잃으면서 약소국으로 전락하게 된다.
▲ 우리는 모두 그리스인 낭만주의 시대를 맞아 그리스의 독립전쟁에는 유럽의 낭만주의 지식인들이 큰 관심을 보였다. 그림은 프랑스의 화가 들라크루아가 그린 <키오스 섬의 학살>이다. 키오스는 에게 해의 섬으로 그리스 시인 호메로스의 출생지이기도 하다. 이곳이 이교도 투르크의 지배하에 있다는 게 유럽인들에게는 무척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을 것이다.
다시 온 혁명의 시대
라틴아메리카와 그리스의 독립은 빈 체제에 큰 타격을 주었지만 아직은 변방의 사건들이었으므로 빈 체제를 끝장내지는 못했다. 그러나 변방의 바람은 곧이어 중심에도 밀어닥쳤다. 그 무대는 또다시 프랑스다.
나폴레옹이 몰락한 뒤 프랑스에는 부르봉 왕조가 복귀했다. 처형된 루이 16세의 동생으로 왕위에 오른 루이 18세(1755~1824, 재위 1814~1824)는 새로 헌법을 제정해 프랑스의 주권은 국왕에게 있음을 천명했다. 그러나 혁명은 무너졌어도 혁명이 이룬 변화는 망각되지 않았다. 새 헌법은 개인의 권리와 평등권, 재산권 등 혁명의 이념을 반영하지 않을 수 없었고, 무엇보다 의회를 구성하지 않을 수 없었다. 루이 자신은 개인적으로 현명한 왕이었고 정치적으로 중립을 취하려 했으나, 혁명의 시기에 가진 것을 몽땅 잃은 기억이 있는 귀족들은 더욱 보수적으로 돌아 ‘국왕보다 더 심한 왕당파’가 되어 있었다(실패한 혁명은 반동화를 부르는 법이다). 그래도 루이의 치세에는 그런대로 안정으로 향하는 듯하던 정세가 결정적으로 방향을 튼 것은 그의 동생으로 왕당파의 우두머리인 샤를 10세(1757~1836, 재위 1824~1830)가 즉위하면서부터였다.
즉위 초기에 신문의 검열제를 폐지하는 등 잠시 자유주의 정책을 취한 샤를은 얼마 안 가 본색을 드러내고 반동 노선으로 선회했다. 1827년 의회 선거에서 자유주의 세력이 승리한 것은 그에게 시대와 대세의 감각을 일깨워주기는커녕 오히려 앙시앵 레짐의 좋았던 옛날을 회고하게 만들었다. 시대착오적인 환상에서 헤어나지 못한 그는 1830년 5월 의회를 해산했는데, 이것이 커다란 실수였다. 7월의 새 의회 선거에서 자유주의자들은 더 세력이 커져 의회의 과반수를 차지하게 된 것이다. 선거를 치를수록 자유주의 세력은 확대되기만 했다. 그런 추세를 읽지 못한 샤를은 칙령을 내려 또 의회를 해산하고 출판물 검열제를 재도입하는 한편 의회 선거를 다시 치르겠다고 선언했다. 이것은 타오르는 불길에 기름을 끼얹은 마지막 실수였다. 7월 칙령은 자유주의 세력의 ‘총동원령’ 이나 다름없었다. 자유주의 언론인과 지식인, 학생, 소시민 들은 국왕의 비상계엄령에 맞서 7월 27일 일제히 봉기했다.
▲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프랑스 7월 혁명을 묘사한 들라크루아의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 1830년 7월 28일>이다. 시민들의 봉기를 자유의 여신이 이끌고 있다. 앞서 그리스 독립전쟁에서는 서양의 자민족 중심주의를 드러내 보였던 그가 프랑스의 시민혁명에 대해서는 대단히 진보적인 관점을 보이는 게 흥미롭다.
제2의 프랑스 혁명일까? 그러나 그건 아니다. 우선 샤를의 ‘새로운 구체제’는 불과 사흘을 버티지 못했다. 7월 30일 자유주의 정치인들은 부르봉 왕조의 문을 닫았다【프랑스에서 사라진 부르봉 왕조는 이후 에스파냐에만 남게 되었다. 에스파냐의 부르봉 왕조는 약간의 우여곡절은 있었으나 대체로 1931년 프랑코의 공화정 독재가 성립할 때까지 존속했고, 1975년 공화정이 폐지되고 입헌군주제로 바뀌면서 다시 에스파냐 왕실이 되어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공교롭게도 중세 이후 유럽 최대의 왕실이었던 합스부르크와 부르봉은 각각 오스트리아와 프랑스에서 일어나 성장했다가 결국은 에스파냐로 와서 몰락하는 같은 길을 걸었다】. 결과도 프랑스 혁명과는 거리가 있었다. 정권을 타도한 세력은 하층 부르주아지가 주장하는 공화정 대신 자유주의 왕족이었던 루이 필리프(Louis Philippe, 1773~1850, 재위 1830~1848)를 내세워 왕정을 계속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루이 필리프는 ‘시민왕’을 자처할 정도로 자유주의 이념을 신봉하고 있었으나, 대부르주아지의 지원을 받은 탓에 그들의 입김을 떨쳐버릴 수 없었고, 또 그렇게 하려 하지도 않았다. 따라서 새로 들어선 왕정 체제는 온건한 자유주의와 급진적인 공화주의의 이념을 적절히 반영한 어정쩡한 상태였다. 그런 점에서 7월 혁명은 프랑스 혁명과 근본적으로 달랐으나 한 가지 닮은 점은 있었다. 프랑스 내에서보다 바깥에 더 큰 영향을 준 혁명이라는 점이다.
혁명의 덕을 본 것은 오히려 이웃의 벨기에였다. 오스트리아의 영토였다가 빈 회의에서 강제로 네덜란드 영토가 된 벨기에는 종교도 가톨릭이고 언어도 프랑스어로 네덜란드와 다를뿐더러 네덜란드 왕인 빌렘 1세의 차별 정책에 불만을 품고 있던 참이었다. 프랑스 7월 혁명의 영향으로 벨기에인들은 브뤼셀에서 봉기를 일으켜 네덜란드를 타도하고 독립을 쟁취했다【그러나 벨기에만 성공했을 뿐 7월 혁명의 영향으로 이탈리아, 독일, 폴란드에서 일어난 혁명은 모두 실패했다. 자국의 자유주의 세력이 크게 성장하지 못했던 탓이다. 그 점에서는 벨기에도 마찬가지였지만 벨기에는 영국과 프랑스로부터 지원을 받았다. 특히 영국은 이 무렵부터 유럽만이 아니라 세계 각지의 ‘운명을 결정하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벨기에에 혁명을 ‘수출’했으면서도 막상 프랑스는 혁명의 성과를 맛보지 못했다. 특히 혁명을 지지한 프랑스의 기층 민중은 피 흘린 대가를 아무 데서도 얻지 못했다. 그들로서는 힘이 부족한 탓이라고 여길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것은 곧 그들이 힘을 갖추게 되면 또 다른 혁명도 가능하다는 뜻이다. 그 힘은 정치적 힘을 뜻하는 게 아니다. 정치적 힘이라면 이미 프랑스 혁명에서 공화제를 이루어낸 것으로 입증되었으니까. 이제 필요한 것은 경제적 힘이다.
그 힘은 2월 혁명 이후부터 급속도로 증대하기 시작했다. 영국에서 일어난 산업혁명의 바람이 바다를 건너 유럽 대륙으로 불어온 것이다. 전통적인 농업국이었던 프랑스의 산업 구조는 빠르게 변했다. 1836년에는 프랑스에도 철도가 생겼고, 파리의 인구는 어느새 100만 명 이상으로 늘었다. 공업화와 도시화가 급격히 진전되면서 자본주의의 생래적인 사회문제도 금세 널리 퍼졌다. 같은 과정을 수십 년 전에 겪은 영국은 오래전에 사실상 공화제나 다를 바 없는 입헌군주제를 취했으므로 문제가 정치적으로 터져 나오는 것을 억제할 수 있었으나, 아직 공화제의 옷으로 갈아입지 못한 프랑스에서는 사회문제가 즉각 정치 문제로 변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1846~1847년에는 대규모의 흉작과 기근까지 겹쳤다. 공업국으로 발돋움하는 중이었지만 아직도 프랑스는 농업국이었으므로 농민의 궁핍화는 곧장 구매력 감소로 이어졌고, 이로 인한 공업의 위축은 곧바로 노동자의 실업으로 이어졌다. 1848년 2월 22일, 파리의 노동자들은 ‘불법 집회’를 열었다. 상황은 18년 전보다 더욱 혁명적이었고, 혁명 자체의 규모도 7월 혁명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그 불법 집회가 2월 혁명으로 확대되는 데는 며칠이면 충분했다. 이틀 뒤인 2월 24일 노동자들은 파리시청을 점거했고, 곧이어 베르사유 궁전으로 향했다. 스무 살 때인 55년 전 국왕 루이 16세가 처형되는 것을 목격한 바 있는 필리프 당시 그의 아버지도 단두대에 올랐다는 재빨리 를 손자에게 물려주고 영국으로 도망쳤다.
그러나 그의 권력을 승계한 것은 그의 손자가 아니라 임시였다. 새로 구성된 임시정부는 곧바로 의회를 새로 구성했다. 에도 의회야 여러 차례 있었지만 이번 의회는 아주 특별했다. 랑스 사상 처음으로, 유럽 사상 처음으로, 아니 세계 역사상 처음으로 모든 성인 남자가 투표에 참여하는 의회 선거가 실시된 것이다【그전까지 프랑스의 의회 선거에서는 정한 재산을 소유해야만 유권자의 자격이 주어졌다(루이 필리프 시대에는 200프랑의 세금을 내야만 가능했다). 프랑스 혁명기에 로베스피에르의 자코뱅은 처음으로 보통선거 제도를 입안한 적이 있었으나 사정상 실시가 보류된 바 있었으므로 보통선거는 이것이 사상 초유의 일이었다. 그러나 여기서도 여성은 제외되었다. 여성의 참정권은 세계 최초인 뉴질랜드(1893)를 제외하면 대부분 20세기에 인정되었다. 20세기 초반 스칸디나비아 나라들에 이어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서유럽에 여성 참정권이 인정되었고, 프랑스의 경우에는 1944년에야 여성이 남성과 똑같은 참정권을 가지게 되었다】. 그 덕분에 25만 명이던 유권자 수는 순식간에 900만 명으로 늘어났다.
그러나 4월에 실시된 의회 선거에서는 여전히 자유주의 세력이 압승을 거두었고, 파리의 노동자들은 18년 전 7월 혁명의 전례가 있는지라 또다시 지긋지긋한 왕정이 복귀하지 않을까 우려했다. 그래서 노동자들은 5월에 의회를 기습하고, 6월에는 대규모 봉기를 일으켰다(당시 노동자들은 놀랍게도 ‘폴란드 해방’을 구호로 내걸었는데, 구호에 불과하기는 했지만 마르크스 이전에 이미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의 움직임이 있었음을 말해준다). 이 봉기는 진압되었지만 이제 자유주의 의회는 노동자들의 우려를 확실히 불식시켜야 할 의무를 느꼈다. 그해 11월 공화정 헌법이 새로 제정되었고, 프랑스는 50년 만에 다시 공화국으로 되돌아왔다.
프랑스 혁명기의 공화정은 난생처음 접하는 탓에 최고 지도자를 선거로 뽑을 겨를이 없었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새 헌법에 따라 사상 처음으로 대통령 선거가 치러졌다. 그런데 그 결과는 놀라웠다. 나폴레옹의 조카인 루이 나폴레옹(Louis Napolicon, 1808~1873)이 압도적인 표차로 당선된 것이다. 비록 왕당파의 강력한 지원을 등에 업었다고는 하지만, 프랑스 국민들(물론성인 남성들)의 ‘나폴레옹 향수’는 대단했다.
하지만 마음속에만 남겼어야 할 항수를 투표로 실현시킨 대가는 참혹했다. 20대 젊은 시절부터 큰아버지를 모방해 위대한 프랑스 제국을 추구한 루이 나폴레옹은 1851년에 헌법상 임기 4년에 단임으로 되어 있어 집권 연장이 불가능해지자 쿠데타를 일으켜 의회를 해산해버렸다. 그는 자신의 행위를 국민투표에 부쳤고, 프랑스 국민들은 다시 그에게 몰표를 주었다. 더 이상 거리낄 게 없어진 그는 이듬해 나폴레옹 3세(1808~1873, 재위 1852~1870)로서 프랑스의 황제가 되었다.
두 나폴레옹의 행보가 어쩌면 그리도 똑같을까? 혁명으로 기존 정권이 붕괴한다. 그 틈을 타서 인기를 바탕으로 집권한다. 그 권력을 이용해 종신 집권자가 된다. 같은 이름의 큰아버지와 조카는 50년 간격으로 또다시 프랑스를 과거로 퇴행시키고 자신은 제위에 올랐다. 혁명으로 시작했다가 온전한 공화제를 이루는 데 실패하고 제국으로 타락해버린 프랑스 혁명의 완벽한 축소판이다. 그렇다면 결과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 혁명의 시대 18년 전의 7월 혁명이 실패로 돌아가자 1848년의 2월 혁명은 더욱 급진적인 형태로 전개되었다. 그사이 프랑스의 산업 노동자층은 한결 두터워졌고, 사회구조의 변화를 정치적으로 수용하라는 요구는 더욱 거세졌다. 그림은 광장에서 군대와 민중이 충돌하는 장면이다. 이 혁명으로 프랑스 민중은 공화정을 이루었으나 나폴레옹의 환상은 지우지 못했다.
공산주의 이념의 탄생
1789년의 프랑스 혁명이 그랬듯이, 또 1830년의 7월 혁명이 그랬듯이, 1848년 2월 혁명도 프랑스보다는 인접한 이웃들에 큰 영향을 주었다. 이번에 혁명이 수출된 곳은 독일이다.
빈 체제가 들어선 이래 오스트리아가 힘에도 부치는 유럽 세계의 조정자 노릇을 하고 있는 동안, 프로이센은 착실히 영토와 세력을 확장해 남독일까지 아우르면서 명실상부한 독일의 중심이 되어가고 있었다【남독일은 원래 신성 로마 제국의 제후국이었으므로 전통적으로 프로이센보다는 오스트리아에 더 가까웠다. 흥미로운 것은 오스트리아가 독일 지역보다 중부 유럽의 헝가리와 보헤미아에 더 애착을 보였다는 점이다. 당시 유럽 세계의 변화를 조금이라도 읽는다면 주된 ‘투자 지역’은 그쪽이 아니라 북쪽의 독일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었을 텐데, 오스트리아는 왜 그랬을까? 그 이유는 종교적인 데 있었을 것이다. 신교로 개종한 북독일에 가까운 지역보다는 가톨릭으로 남아 있는 보헤미아와 헝가리가 오스트리아로서는 더 중요한 지역이었을 것이다. 낡은 종교 문제를 여전히 외교의 초점으로 삼은 데서 오스트리아가 왜 보수의 총 본산이었는지 알 수 있다. 결국 오스트리아는 인종과 언어가 다른 헝가리와 보헤미아를 계속 끌어안는 바람에 19세기 내내 다민족 국가의 질곡에서 헤어나지 못하게 된다】. 프로이센은 빈 회의가 가져다준 느슨한 정치적 연계를 진일보시키는 작업의 일환으로 1834년에 관세동맹을 체결했는데, 여기에 오스트리아가 배제된 것은 이미 독일의 주인이 바뀌었음을 말해준다. 그러나 이 무렵부터 독일연방에는 프랑스와 똑같은 변화가 닥치고 있었다. 바로 산업혁명의 물결이었다. 프랑스에서도 마찬가지였듯이, 독일의 부르주아지 역시 경제적 힘은 쥐고 있으면서도 그에 맞는 정치적 새 옷(공화제)은 입지 못하고 있었다.
프랑스에서 2월 혁명이 발발한 지 한 달도 지나지 않은 3월 초, 독일연방의 두 중심인 빈과 베를린에서도 봉기가 터졌다. 빈의 자유주의 지식인과 학생, 소시민, 노동자들은 정부를 상대로 의회 소집을 요구했고, 군대가 진압에 나서자 3월 13일부터 무장투쟁으로 맞섰다. 파리에서와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며칠을 가지 못하고 오스트리아 정부는 민중의 힘 앞에 굴복했다. 황제 페르디난트는 빈 체제의 산파이자 보수의 상징인 메테르니히를 해임하고 헌법의 제정을 약속했다. 빈의 소식은 민중 집회가 며칠째 열리고 있던 베를린으로 금세 전해지면서 프로이센의 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Friedrich Wilhelm IV, 1795~1861, 재위 1840~1861)의 저항 의지를 꺾어놓았다. 결국 그도 헌법 제정과 의회 소집을 약속하는 것으로 사태를 진정시켜야 했다.
사태의 진행은 비슷했어도 독일의 경우는 프랑스와 크게 다른 점이 있었다. 우선 독일의 부르주아지와 자유주의 세력은 프랑스에 비해 힘이 약하고 경험도 부족했다. 게다가 독일은 프랑스처럼 강력한 중앙집권력을 갖춘 단일한 국가가 아니라 아직까지 느슨한 연방 체제에 머물러 있었다. 이 두 가지 약점 때문에 3월 혁명은 프랑스의 2월 혁명에 뒤지지 않는 규모였음에도 불구하고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하고 말았다. 우선 경험 부족의 독일 자유주의 세력은 혁명이 성공했다고 섣불리 판단했다. 또 연방 체제였기 때문에 그들은 독일의 통일을 목표로 할 수밖에 없었다. 일단 그들의 목표는 달성되었다. 프리드리히는 프로이센이 독일의 통일에 앞장서겠다고 다짐했고, 5월에는 각 연방 대표가 프랑크푸르트에 모여 독일 역사상 첫 의회인 국민의회를 구성했다. 그러나 혁명의 일차적 성공 뒤에는 반혁명이 온다는 역사적 경험을 독일의 자유주의자들은 모르고 있었다.
▲ 부유한 국가와 가난한 국민 산업혁명 초기에는 영국이라는 국가만 부유해졌을 뿐 영국의 국민들은 심한 빈곤에 시달렸다. 『자본론』에는 여섯 살짜리 아이가 하루 16시간이나 노동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그림은 굶주린 아이들이 돼지 여물통을 뒤지는 장면이다.
6월에 파리에서 일어난 봉기가 패배한 것은 독일 영방군주들에게 한숨 돌릴 여유를 주었다. 그다음 10월에 오스트리아에서 2차 봉기가 실패로 돌아간 것은 반혁명 세력에게 이제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을 불어넣었다. 프랑크푸르트 국민의회는 일정대로 이듬해 3월에 통일헌법을 마련하고 프로이센 국왕 프리드리히를 황제로 격상시켰으나, 사태를 파악한 프리드리히는 영악하게도 의회를 인정할 수 없으니 제위도 받을 수 없다고 거절했다(그는 로마 교황도 아니고 오스트리아 황제도 아닌 ‘일개 의회’ 따위가 황제를 임명하는 자격을 가질 수는 없다고 여겼을지도 모른다. 그 제관을 받는다면 의회에 굴복하는 게 되니까). 이것을 신호탄으로 영방군주들은 혁명 시기에 자유주의 세력에게 내주었던 양보를 일제히 철회했다. 마침내 12월 국민의회가 해산됨으로써 독일 사상 첫 시민혁명은 무산되고 말았다【나중에 보겠지만 19세기 후반부터 독일과 이탈리아는 시민혁명의 단계를 거치지 못했다는 점 때문에 유럽의 국제 질서를 뒤흔드는 ‘시비꾼’ 역할을 하게 된다(20세기 들어 두 나라에 파시즘이 들어서는 것 역시 시민혁명의 부재와 무관하지 않다). 하지만 실상 유럽에서도 시민혁명을 제대로 겪은 나라는 영국과 프랑스뿐이다. 그런데도 독일과 이탈리아의 시민혁명만이 유독 문제시되는 이유는 두 나라가 가진 힘 때문이다. 예를 들어 에스파냐나 네덜란드, 스칸디나비아 나라들에 시민혁명이 없었다는 것과 독일과 이탈리아가 그랬다는 것은 다른 문제니까】.
그러나 독일의 3월 혁명은 전혀 예상치 못한, 그리고 장차 중요성을 더해갈 한 가지 성과를 낳았다. 혁명적 분위기가 무르익고 있던 1848년 2월, 파리에서는 40쪽도 안 되는 조그만 책자 한 권이 출간되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Friedrich Engels, 1820~1895)라는 두 독일 청년이 함께 작성한 『공산당 선언(Manifest der Kommunistischen Partei)』이라는 책자였다. 바로 전해에 결성된 공산주의자 동맹이라는 정치조직의 강령이었는데, 아직 사람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조직이었으므로 당시에는 큰 주목을 받지 못했다. 이 책자의 첫머리에 등장하는 유명한 문구, 즉 “유럽에는 하나의 유령이 떠돌고 있다, 공산주의라는 유령이.”라는 부분은 바로 1848년의 혁명을 뜻한다.
1843년 프로이센 정부의 출판 검열을 피해 파리로 온 마르크스는 당시 파리에 망명 중인 혁명적 지식인들과 교류하면서(당시 파리는 전 유럽의 정치적 망명자들이 모여드는 곳이었다) 평생의 동료가 될 엥겔스를 만났다. 그러나 두 사람은 그 시대 지식인들의 화두인 자유주의 시민혁명과는 다른 혁명의 필요성을 절감한다. 그것은 바로 노동계급이 주도하는 사회주의혁명이다. 두 사람은 산업혁명으로 노동자들이 수에서나 힘에서나 사회와 역사를 이끌어가는 동력임이 명백해진 상황에서 혁명을 주도하는 것도 당연히 노동자들이어야 한다고 믿었다.
독일에서 3월 혁명이 일어나자 마르크스는 독일이야말로 역사상 최초의 사회주의혁명이 일어날 최적의 무대라고 여기고 독일로 돌아가 <신라인 신문>을 발간했다. 그러나 사회주의혁명은커녕 자유주의 시민혁명조차 실패로 돌아가자 그는 다시 파리로 망명했고, 여기서도 프로이센 정부의 집요한 공작으로 추방되자 엥겔스가 있는 런던으로 간 뒤 다시는 조국 땅을 밟지 못했다. 런던에서 그는 최초의 사회주의 정치조직인 국제노동자협회(제1인터내셔널)를 창립하고 시민혁명의 단계를 뛰어넘는 사회주의·공산주의 혁명의 이론과 노선을 확립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그의 더 큰 업적은 『자본론(Das Kapital)』이다. 1867년에 1권이 간행되고 그의 사후에 엥겔스가 그의 노트를 정리해 2권과 3권이 간행되었는데, 이 책은 자본주의가 발생하고 발달한 현장인 영국에서 자본주의 체제의 운동 법칙을 탁월하게 분석함으로써 오늘날까지 자본주의에 관한 가장 권위 있는 이론서로 남아 있다.
그러나 마르크스 자신은 몰랐지만, 그는 학문적 성과 이외에도 장차 20세기 세계 역사에서 가장 큰 사건으로 자라나게 될 씨앗을 뿌려놓았다. 그가 살아 있던 시절에 이미 그의 사상과 이론을 추종하는 혁명 세력은 스스로를 마르크스주의자라고 불렀는데(마르크스는 그것을 환영하지 않았다), 그들 중 러시아의 마르크스주의자들은 20세기 벽두에 최초의 사회주의 공화국을 수립하게 된다.
▲ 혁명의 단계 2월 혁명이 발발하기 직전 파리에서는 엥겔스(왼쪽)와 마르크스(오른쪽)가 『공산당 선언』이라는 책자를 발표했다. “유럽에는 하나의 유령이 떠돌고 있다, 공산주의라는 유령이.”라는 말로 시작하는 『공산당 선언』은 당시 유럽 세계를 휩쓴 혁명적 분위기를 반영한다. 그러나 그들의 판단과는 달리 아직 유럽의 혁명은 사회주의·공산주의를 지향하지 않았고, 자유주의와 공화정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
변방의 성장: 러시아
러시아 지식인들이 새로운 이념인 사회주의 사상을 특히 환영한 데는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다. 유럽 각국이 활발하게 국민국가 체제를 완성해가던 19세기 초반에도 러시아는 여전히 유럽의 후진국을 면치 못했다. 무엇보다 제국이라는 낡은 체제【나폴레옹의 프랑스 제국이 무너진 뒤 유럽 세계에서 제국은 오스만과 러시아 둘뿐이었는데, 공교롭게도 둘 다 후진국이었다. 이제 제국은 시대착오적이고 낡은 체제임이 명백해졌다. 이 점은 제국 체제가 수천 년간 존속해온 동양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중국의 청 제국은 18세기 말부터 급격히 쇠퇴하기 시작했고, 급기야 19세기 초반부터는 서양 세력의 본격적인 침탈을 받게 되었다】에다 여전히 중세적 신분제가 존속하고 있었다(농노제가 그 대표적인 예다), 워낙 덩치가 큰 덕분에 나폴레옹의 공격을 막아냈고 빈 체제에서도 주도적인 역할을 할 수 있었지만, 종교에서도 이질적이고 정치체제도 낯선 러시아를 동류로 여기는 서유럽 국가는 오스트리아를 제외하면 거의 없었다.
그러나 유럽을 뒤흔든 자유주의의 물결은 러시아에도 흘러들었다. 사실 자유주의 세력의 무장봉기라면 프랑스보다 러시아가 먼저다. 1825년 12월 차르 알렉산드르 1세가 죽은 뒤 정치적 혼란을 틈타 귀족 출신의 청년 장교들과 그들이 지휘하는 사병 3000명이 반란을 일으켰던 것이다. 이들을 데카브리스트(Dekabrist, ‘데카브리’는 12월을 가리키는 러시아어다)라고 불렀는데, 이들은 농노제를 폐지하고 입헌군주제를 도입하는 것은 물론 황족과 지주들을 대우하는 문제까지도 논의할 만큼 러시아의 근대화를 위한 포괄적인 개혁안을 내놓았으나, 형보다 훨씬 반동적인 알렉산드르의 동생 니콜라이 1세(Nikolai I, 1796~1855, 재위 1825~1855)에 의해 가혹하게 진압되었다.
러시아 역사상 차리즘에 최초로 반기를 든 사건인 만큼 데카브리스트 반란은 러시아 지식인(인텔리겐치아)들에게 한 가지 커다란 고민거리를 안겼다. 러시아에서 자유주의 개혁, 즉 시민혁명이 가능한가? 러시아에는 서유럽에서 볼 수 없는 혹독한 전제 체제가 있는 반면 서유럽에서 볼 수 있는 시민 세력이 없다. 그렇다면 러시아의 혁명은 서유럽과 다를 수밖에 없고 또 달라야 하지 않을까? 러시아에서는 뭔가 새로운 혁명이 필요하다. 그 답은 바로 사회주의혁명이다. 서유럽 국가에서 자유주의 혁명이 성공하면 반드시 사회주의적 요구가 튀어나온다. 어차피 러시아에는 자유주의 혁명을 주도할 세력이 없다면 그냥 중간 단계를 생략하고 곧 바로 최종 목표인 사회주의혁명으로 가도 되지 않을까?
▲ 반역의 러시아 자유주의 장교들이 일으킨 데카브리스트 반란은 수백 년간 지속된 차리즘에 대한 최초의 도전이었다. 데카브리스트들은 치밀한 계획을 바탕으로 거사했으나 봉기는 실패였다. 이 사건을 계기로 러시아의 인텔리겐치아는 시민혁명의 단계를 뛰어넘는 더욱 근본적인 혁명을 준비하기 시작한다.
그런데 데카브리스트 반란으로 각성한 것은 지식인들만이 아니었다. 문제는 똑같았어도 차르 정부의 답안은 인텔리겐치아와 정반대였다. 니콜라이는 자유주의마저도 용납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차르 정부의 탄압이 강화되자 자유주의와 관련된 모든 사상과 활동이 불법화되었고(물론 사회주의는 말할 것도 없다) 인텔리겐치아들은 지하로 숨을 수밖에 없었다. 지하의 비밀 조직을 색출하고 처형하는 일은 차르의 수족인 비밀경찰이 맡았다. 16세기 후반 이반 4세가 발동을 건 러시아 차리즘은 니콜라이의 대에 이르러 최고조에 달했다.
물론 니콜라이도 러시아가 후진국이라는 것은 잘 알고 있었다. 다만 그 원인을 러시아 내부의 탓으로 돌리는 데는 찬성할 수 없었을 뿐이다(그렇다면 차르 체제 자체가 문제될 테니까). 그래서 그는 문제의 해결책을 대외 팽창에서 찾았다. 1853년 그가 오스만 제국에 선전포고를 한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전쟁의 빌미는 프랑스의 나폴레옹 3세가 제공했다. 1852년 그는 튀르크에 압력을 가해 성지 예루살렘의 관리를 동방정교가 아닌 가톨릭 사제에게 맡기도록 했다. 15세기 이반 3세 이래로 동방정교의 수장을 자처해온 러시아 차르로서는 참을 수 없는 일이었다. 더욱이 그게 프랑스의 농간이었으니 니콜라이로서는 더더욱 두고 볼 수 없었다. 일단 오스만 측에 철회를 요구했다가 보기 좋게 거절당하고 체면 구긴 뒤 니콜라이는 전쟁으로 문제를 매듭짓기로 했다. 종교 문제 이외에 러시아의 흑해 진출이 걸려 있었고, 또 전쟁의 무대가 흑해의 크림 반도였으므로, 이 전쟁을 크림 전쟁이라고 부른다【18세기 초 북방전쟁에서 승리한 이래 러시아는 발트 해를 장악하고 있었는데 왜 흑해로 또 진출하려 했을까? 발트 해의 패자가 되었어도 러시아의 부동항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히려 러시아에 대한 서유럽 국가들의 경계심은 더욱 고조되었다. 지도를 보아도 확연히 드러나지만 러시아가 발트 해에 부동항을 얻는다 해도 어차피 영국이 버티고 있는 북해를 통과하지 않으면 세계로 진출할 수 없었다. 결국 러시아에 발트 해는 반쪽짜리 부동항이었던 셈이다】.
니콜라이는 사실 튀르크쯤은 쉽게 제압할 수 있으리라 믿었다. 그러나 그가 미처 생각지 못한, 혹은 간과한 문제가 하나 있었다. 바로 영국이었다. 프랑스야 전쟁의 빌미를 제공한 만큼 어떤 식으로든 전쟁에 개입하겠지만 영국은 프랑스와 적대 관계에 있는 만큼 상관하지 않으리라. 이게 니콜라이의 판단이었으나 그의 기대 섞인 예상과 달리 두 나라는 즉각 참전했고, 더욱이 언제 적대적이었냐는 듯이 서로 손을 잡고 러시아에 맞섰다.
이리하여 30년 전 그리스 독립을 위해 싸운 세 나라가 이제는 편을 갈라 튀르크의 영토에서 서로 싸우게 되었다(튀르크는 전장만 제공했을 뿐 전쟁의 뒷전으로 밀려났다). 어차피 붙은 전쟁이니, 니콜라이는 30년 전에 미처 뜻을 펴지 못한 흑해 진출을 이루겠다는 각오였고, 영국과 프랑스는 수백 년간 유럽인들의 눈엣가시로 남아 있는 튀르크를 응징하는 한편 러시아의 남진을 가로막는다는 의도로 전쟁에 임했다.
나폴레옹 전쟁 이래 처음으로 유럽 국가들끼리 맞붙은 크림 전쟁은 어떤 의미에서 수십 년 동안 각개약진을 통해 쌓은 유럽 열강의 힘을 점검하는 기회이기도 했다. 그러나 군사적으로 볼 때 크림 전쟁은 최악의 전쟁이었다. 영국과 프랑스 동맹군은 선박으로 병사들을 직접 흑해의 세바스토폴 항구에 상륙시키려 했지만 수심이 너무 얕은 쪽으로 접근하는 바람에 처음부터 작전의 차질을 빚었다. 러시아나 동맹군 측이나 제대로 된 전략을 구사하지 못했고, 보급망도 극도로 엉성했다. 이런 상황에서 3년이나 지속된 전쟁은 엄청난 인명 피해를 가져왔다【크림 전쟁은 군사적으로 최악의 전쟁이나 다른 한편으로 ‘천사의 전쟁’이라 할 수도 있다. 나이팅게일이 간호사로 활동했기 때문이다. 크림 전쟁에서는 전투로 죽은 병사보다 질병으로 죽은 병사가 더 많았다. 나이팅게일은 38명의 간호사들을 이끌고 전장으로 달려가 헌신적인 간호 활동을 펼쳤는데, 그녀의 영향은 이후 군대 의료단의 혁신과 더불어 간호학의 체계적인 발달로 이어졌다. 아울러 전 세계 어린이 위인전에 빠지지 않는 한 인물로 자리 잡은 것도 크림 전쟁의 성과(?)랄까? 또한 스위스의 앙리 뒤낭도 전쟁의 참상과 나이팅게일의 활동에 깊은 인상을 받고 이후 국제적십자사를 창설하게 되었다. 크림 전쟁이 중요한 이유는 러시아의 남하가 저지되었다는 것보다 오히려 그런 요소들인지도 모른다】.
▲ 작가의 스케치 러시아 작가 푸슈킨이 데카브리스트의 봉기를 일으켰다가 처형된 청년 장교들을 그린 그림이다. 당시 스물여섯 살의 푸슈킨은 정치시를 쓴 죄로 정부의 탄압을 받아 유배 생활을 하던 중이었다. 그는 일찍부터 문학적 재질을 보였으나 유배 생활 중에 러시아 역사를 공부해 재질과 의식을 겸비한 작가로 성장했다.
후진적 체제에서 벗어나지 못한 러시아가 서유럽의 두 강국을 상대하기란 애초에 불가능했다. 최악의 전쟁에서 패배한 러시아는 더욱 최악의 상태에 빠졌다. 1856년 파리조약으로 러시아는 흑해의 중립을 약속하고 더 이상 남하를 기도할 수 없게 되었다. 내부 모순이 산적해 있는 러시아로서는 대외 진출을 통해 그 모순을 밖으로 분출하지 못하면 안에서 곪아터지는 길밖에 없었다.
전쟁 직후 죽은 니콜라이(패전에 좌절해 자살했다는 설도 있다)에 이어 차르가 된 알렉산드르 2세(Aleksandr II, 1818~1881, 재위 1855~1881)는 아버지에 비해 훨씬 ‘계몽된 군주’였다. 최소한 그는 내부의 문제를 바깥으로 옮기려 한 니콜라이의 정책을 계승하지는 않았다. 1861년 그는 오랜 숙제인 농노제를 폐지하고, 근대식 의회인 젬스트보(zemstvo를 설립하고, 행정·사법·군사 제도에 관해 대대적인 개혁에 나섰다.
그러나 이제 자유주의적 수술로는 중병을 앓고 있는 러시아를 되살릴 수 없다고 판단한 러시아의 인텔리겐치아들은 차르가 주도하는 개혁을 전혀 믿지 않았다. 러시아에 필요한 것은 개혁이 아니라 혁명인데, 차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양보는 개혁이었다. 차르 체제가 전복되지 않는다면 모든 노력이 소용없다고 판단한 인텔리겐치아들은 1881년 마침내 알렉산드르를 암살하는 데 성공했다. 이 때문에 러시아에는 다시금 강도 높은 차리즘이 들어섰으나 이제 그 차리즘이 종말을 고할 시기는 멀지 않았다.
▲ 현대전의 시작 전쟁사적으로 볼 때 크림 전쟁은 최초의 현대전으로 불린다. 사진은 대포와 박격포가 동원된 세바스토폴 전투다. 무기가 발달함으로써 바야흐로 국제 전쟁은 대규모 살육전의 양상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따라서 이 전쟁에서 나이팅게일이 전선의 천사로 활약한 것도 우연이 아니다. 그러나 전쟁이 빚은 참극의 절정은 다음 세기에서야 모습을 드러낸다.
변방의 성장: 미국
러시아의 알렉산드르가 농노 해방령을 내린 1861년에 멀리 대서양 서쪽에서도 노예해방 문제가 첨예한 정치적 문제로 제기되었다. 노예해방을 내세우는 북부 출신의 링컨(Abraham Lincoln, 1809~1865)이 미국의 대통령으로 선출된 것이다.
18세기 후반 영국의 지배에서 독립한 뒤 미국의 역사는 마치 유럽의 근대사를 압축해놓은 것 같은 진행을 보인다. 독립을 이룬 미국은 이제 유럽 각국과 동등한 선상에서 근대국가로 출발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런 점에서, 미국의 독립전쟁은 유럽 각국이 근대국가로 전환하는 계기를 제공한 종교전쟁과 같은 역사적 위상을 가진다. 하지만 유럽에서 종교전쟁은 각개약진을 위한 출발점을 제공했을 뿐이고 본격적인 국민국가를 수립하기 위해서는 나폴레옹 전쟁이 필요했듯이, 미국도 근대적인 국민국가로 발돋움하기 위해서는 또 한 차례 진통이 필요했다. 그것이 바로 남북전쟁(Civil War)이다. 미국은 독립전쟁과 남북전쟁을 통해 불과 한 세기 만에 유럽 각국이 거친 역사 과정을 따라잡고, 어느 유럽 국가에도 못지않은 제국주의 열강의 하나로 우뚝 서게 된다.
영국의 굴레에서 벗어난 뒤 미국의 앞길은 탄탄대로였다. 유럽 대륙보다 훨씬 넓은 땅(독립 당시의 13개 주만 해도 서유럽과 맞먹는 면적이다)에다 국경을 맞대고 있는 나라도 없어 모든 게 마음대로였다. 북아메리카 원주민의 소부족 문화로는 유럽인들의 조직적인 공략을 당해낼 수 없었으므로 서쪽은 그야말로 무주공산이나 다름없었다.
19세기 초반부터 미국은 적극적으로 영토 확장에 나섰다. 다만 그 방법은 비열한 데가 있었다. 유럽 강대국이 소유한 땅은 매입하고, 신생국 멕시코나 원주민들의 땅은 강탈하는 것이었으니까. 이를테면 루이지애나, 플로리다, 알래스카는 각각 프랑스, 에스파냐, 러시아에서 사들였고【특히 알래스카를 매입한 것은 큰 논란을 불렀다. 1867년 미국의 국무장관 슈어드는 720만 달러의 헐값에 러시아로부터 알래스카를 매입했는데, 당시에는 쓸모없는 땅이라고 여겼고 심지어 미국 언론은 알래스카 매입을 ‘슈어드의 바보짓(Seward‘s folly)’이라고 부르며 비난했다(훗날 그 용어는 관용구가 되었다). 그러나 불과 20년 뒤 알래스카에서 금이 발견되었고, 나중에는 석유와 천연가스, 각종 광물 자원도 발견되었다. 지금은 오히려 알래스카를 팔아넘긴 게 ‘러시아의 바보짓’이라고 알려져 있다】, 텍사스, 캘리포니아 등 서부의 주들은 멕시코, 북아메리카 원주민들과 전쟁을 벌여 빼앗았다.
문제는 새로 얻은 땅에 어떻게 사람들을 이주시킬 것이냐인데, 이것도 유리한 조건이 형성되면서 자연스럽게 해결되었다. 미국이 독립하면서 유럽 각국에서의 이민자가 크게 늘어난 것이다. 새로 이주한 사람들은 기존의 토지 소유주와 경쟁하지 않기 위해 ‘말뚝만 박으면 내 땅’인 서부로 떠났다. 독립한 지 70년 만에 미국의 인구는 여덟 배로 늘어 3000만 명을 넘어섰다. 또 19세기 초반 캘리포니아에서 대규모 금광들이 잇달아 발견된 것도 서부 개척을 부추겼다. 1849년에 금광을 찾아 서부로 몰려든 ‘포티나이너스 10ers’ 덕분에 드디어 19세기 중반 미국의 서부 경계선은 태평양에 이르게 되었다.
▲ 49ers 서부에는 노다지가 있다! 미국 정부에서는 그렇잖아도 서부 개척을 장려해야 할 판인데, 굳이 애쓸 필요가 없었다. 그림은 샌프란시스코의 개천가에서 사금을 줍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다. 이들은 20세기 중반에 인기를 끈 미국 서부영화의 등장인물이 되었고, 오늘날에는 샌프란시스코 프로 축구팀의 이름(포티나이너스)이 되었다.
때마침 유럽에서 불어닥친 산업혁명의 영향으로 미국은 영토만이 아니라 공업도 크게 발달했다. 미국의 철도와 운하, 각종 공업은 단기간에 크게 성장했다. 막상 산업혁명의 주역인 영국은 혜택과 더불어 노동조건의 악화라는 심각한 부작용을 겪었으나 미국에서는 거의 그 혜택만 누렸다. 후발 주자의 이득이었을까? 그러나 그것만은 아니다. 풍부한 노동력이 없으면 산업혁명은 성공할 수 없다. 북부의 산업 노동력은 유럽 이주민들이 충당했지만, 남부의 넓은 평야를 경작하려면 막대한 노동력이 필요했다. 이 노동 수요를 충당해준 것은 바로 아프리카에서 잡아온 흑인 노예였다. 이들은 남부의 대농장에서 식량 생산과 면화 재배에 투입되었는데, 이것은 직간접적으로 북부의 공업 발달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흑인 노예들을 제외한다면 당시 모든 게 풍요로운 미국에서 불만을 품은 사람은 극소수였으리라. 그러나 북부와 남부의 협력 관계는 오래가지 못했다. 양측의 사회체제는 갈수록 차이가 심해졌다. 북부는 서유럽식 자본주의를 취했고, 남부는 아래쪽의 라틴아메리카처럼 노예제를 바탕으로 한 대농장 중심 체제였다【이런 차이는 오늘날 미국의 주 이름에도 흔적을 남겼다. 네바다·콜로라도·뉴멕시코·플로리다 등 남부의 주들은 라틴 계통의 이름이고, 펜실베이니아·뉴욕·버지니아 등 북부의 주들은 영어권 이름이다. 참고로, 그 밖의 주 이름들은 북아메리카 원주민어에서 나온 것들이 많다(오리건 다코타·와이오밍·미네소타·미시간 등)】.
북부와 남부의 차이가 심화되면서 양측은 사사건건 대립했다. 새로 개척된 서부의 땅을 놓고도 북부는 조그만 구획으로 나누어 이주민들에게 분배하는 정책을 취했는데, 이것은 남부 대농장 소유주의 반발을 샀다. 새로 생긴 서부의 주마다 두 명의 상원의원이 배정되었으므로 남부는 정치적으로 계속 밀리게 되었기 때문이다. 관세 문제에서도 양측의 이해관계가 대립했다. 북부는 국내 공업의 보호를 위해 관세를 높이려 했으나 남부는 면화를 유럽으로 수출하기 위해 낮은 관세를 주장했다.
두 나라로 갈라선다면 모를까, 더 이상 한 나라로 아우르기가 어려워졌다. 적어도 남부는 드러내놓고 말은 못해도 차라리 갈라서기를 원했다. 미국이 생겨난 이후 최대의 위기, 그러나 남부에 비해 인구도 두 배인 데다(더욱이 남부 인구의 3분의 1 이상은 노예였다) 철도, 광산은 물론 산업체의 90퍼센트를 소유하고 있는 북부는 남부의 분립을 용납하려 하지 않았다. 여기에 나폴레옹 전쟁 이후 유럽에서 성장한 인도주의라는 외피가 씌워지면서 북부는 남부에 노예제를 폐지하라고 요구하고 나섰다.
그러나 400만 명의 노예를 거느린 남부에서는 노예가 없으면 당장 모든 게 마비될 형편이었다. 그런대로 북부의 요구를 버텨내던 남부에 드디어 더 이상 견딜 수 없는 상황이 닥쳤다. 노예제에 반대하는 공화당의 링컨이 대통령에 당선된 것이다. 이제 북부의 요구는 인도주의처럼 비공식적인 게 아니라 정식 국가 정책으로 구현될 것이다.
사실 링컨은 노예 문제를 과격하게 해결하려는 입장이 아니었고, 다만 장기적으로 노예제는 폐지되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정도의 온건파였다. 그에게는 노예제보다 연방제가 깨지는 것, 즉 미국이 둘로 갈라서는 게 더 큰 걱정거리였다. 그럴 만큼 남부의 반발은 거셌다. 과연 링컨의 바람과는 반대로 일찍부터 분립을 준비하고 있던 남부는 즉각 홀로서기에 나섰다. 1862년 남부의 7개 주는 연방을 탈퇴해 독자적으로 아메리카 연방을 구성했고, 헌법도 별도로 제정했으며, 대통령으로 제퍼슨 데이비스를 선출했다【미국의 헌법은 독립 당시 제정된 것이 현재까지도 유지되고 있다(공화국 앞에 번호를 매겨 구분하는 프랑스나 한국과 달리 미국은 여전히 제1공화국인 셈이다). 시대에 따라 변화된 사항은 ‘수정헌법’이라는 명칭으로 추가된다. 그래서 독립 당시 정해진 주(州)의 탈퇴권이 지금도 유효하다. 예를 들어 텍사스 주가 연방에서 탈퇴해 독립하려면 연방정부의 동의나 허가를 구하지 않고 주민 투표로도 합법적으로 가능하다. 다만 주들은 그 권리를 행사하지 않을 따름이다. 남북전쟁 무렵 남부는 바로 헌법에 보장된 탈퇴권을 행사하려 한 것이었으므로 북부가 법적으로 그것을 막을 도리는 없었다. 그렇게 보면 전쟁은 남부가 시작했어도 북부가 연방을 깨지 않기 위해 도발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만약 전쟁에서 남부가 승리했더라면 연방이 분해되고 미국이 여러 나라로 분립했을지도 모른다. 그랬다면 세계사 전체로 볼 때 훗날 더 좋은 결과를 낳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 노예무역 노예를 거꾸로 매달고 값을 흥정하는 모습이다. 수세기 동안 서유럽 국가들이 아프리카에서 신대륙으로 수송한 노예의 수는 최대 4000만 명에 달했다. 신대륙에 도착한 노예들은 병에 걸리거나 기후와 환경에 적응하지 못해 무려 3분의 1이 사망했다. 품목으로 보나 과정으로 보나 노예무역은 가장 참혹한 무역이었다.
이제 미국은 두 개의 국호·헌법·대통령이 존재하는 두 개의 나라로 나뉘었다. 이 상태가 오래 지속되었더라면 실제로 그렇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구석에 몰렸다고 생각한 남부가 먼저 도발했다. 1861년 남군이 섬터에 주둔하던 북군의 요새를 공격함으로써 남북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양측의 전력으로 보면 이 전쟁의 승부는 보나 마나 뻔했다. 모든 면에서 압도적인 우위에 있는 북부는 남부의 도발을 오히려 환영했다. 그러나 뚜껑을 열어보니 전황은 예상외로 만만치 않았다. 미리 전쟁을 준비해 온 남부는 리(Robert Lee)를 총사령관으로 삼아 조직적인 작전을 전개했다. 반면 북부는 애초부터 남부를 얕잡아본 데다 수시로 총사령관이 바뀌는 등 지리멸렬했다. 처음에 단기전으로 끝낼 생각이었던 북부는 그제야 전쟁이 장기화되리라는 판단을 내렸다.
2년 가까이 균형을 이루던 형세가 변화하기 시작한 것은 1863년이었다. 그해 1월 링컨은 일방적으로 노예해방을 선언했다. 그렇다고 남부의 노예들이 즉각 환영의 봉기라도 일으키지는 않았으나 그것은 상징적인 조치에 불과한 게 아니었다. 그동안 미국의 내전을 가만히 지켜보던 유럽의 여론이 전쟁의 ‘선악’을 판단하고 방향을 잡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로써 남부가 내심으로 바라던 영국의 개입은 불가능해졌다.
또한 이 무렵부터 북부는 자신의 장점을 충분히 깨닫게 되었다. 그것은 바로 해군력이었다. 북부는 모든 전력에서 앞서 있었으나 그중에서도 해군은 절대적 우위였다. 남부에는 해군이라 할 만한 것이 아예 없었기 때문이다. 북부의 함선들이 남부의 해안을 완전히 봉쇄함에 따라 남부는 면화 수출로가 막혀버렸다. 더욱이 남부의 수도인 리치먼드가 해안에서 수십 킬로미터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으므로, 제해권을 빼앗긴 것은 전략적으로도 남부에 치명적이었다.
걸핏하면 여론에 밀려 갈아치우던 북군 총사령관도 붙박이가 생겨났다. 북부의 그랜트(Ulysses Grant)는 1863년 7월 게티즈버그 전투에서 승리를 거둠으로써 북부의 승리를 사실상 결정지었다. 남부는 2년 가까이 더 버티다가 1865년에 마침내 항복했다.
링컨은 전쟁이 끝난 직후 암살당하지 않았더라면 오늘날 그렇게 위대한 대통령으로 남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실상 노예해방에 그다지 투철한 신념을 지닌 인물이 아닐뿐더러 정치적 리더십도 그리 강력하지 못했다. 설령 그가 살아남아 계속 집권했다 해도, 그가 이야기한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에서 흑인과 여성은 그 ‘국민’에 포함되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해방된 흑인과 여성이 선거권과 시민권을 가지려면 상당한 기간이 더 필요했다(한 가지 재미있는 것은 이때부터 남부는 미국 민주당의 아성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오늘날 공화당에 비해 인종 문제에서 다소 진보적인 입장을 취하는 민주당은 원래 노예제의 남부를 기반으로 출범했다).
전쟁이 가져온 상처는 컸으나, 이주와 독립 당시부터 모두가 고향을 떠나온 똑같은 처지에서 모든 문제를 민주적으로 해결해온 ‘미국인’들의 전통은 충분히 그 상처를 치유할 수 있었다. 국민국가의 성립을 위해 불가피한 진통이었다는 점에서 본다면 사실 미국의 남북전쟁은 유럽을 얼룩지게 만든 나폴레옹 전쟁에 비해 ‘성공적인 전쟁’이었다. 이렇게 해서 최종적인 진통을 겪은 뒤 미국은 이후 최단기간에 유럽 열강에 못지않은 강대국의 반열에 오른다. 이제 세계 최강의 자리에 오르는 것은 시간문제다【남북전쟁 이후 유럽에서는 안정과 번영을 구가하는 미국으로 가는 이민자가 급증했다. 전쟁 전인 1845년 아일랜드의 감자 기근으로 아일랜드계가 대거 미국으로 이주한 데 이어, 전후에는 유럽 각지에서 독일계, 이탈리아계, 폴란드계, 유대계 등 수많은 유럽인이 청운의 꿈을 안고 미국으로 이주했다. 이들이 미국의 번영에 기여한 덕분에 훗날 미국은 ‘기회의 땅(land of opportunity)’, ‘인종의 도가니(melting pot)’ 같은 별명을 얻었다】.
▲ 순수한 내전 미국의 남북전쟁은 미국이 유럽과 같은 근대적 국민국가를 이루기 위해 반드시 겪어야 할 홍역이나 다름없었다. 유럽에서였다면 당연히 여러 나라가 개입되는 국제전이 되었겠지만, 당시 유럽 세계는 대서양 건너편의 사건까지 개입할 만한 여력이 없었다. 그 덕분에 남북전쟁은 순수한 내전으로 전개되었으며, 영어로도 그냥 Civil War(내전)라고 불린다. 그림은 북군과 남군 15만 명이 교전을 벌여 2만 8000명의 사상자를 낸 최대의 격전 게티즈버그 전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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