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 완성된 유럽 세계
드러나지 않은 제국
빈 체제 하에서 유럽의 낡은 중심인 오스트리아가 무너지는 동안, 프랑스와 독일이 시민혁명의 혼돈을 겪고 있는 동안, 러시아와 미국이 명암을 달리하면서도 각기 세계열강의 대열에 끼려 애쓸 무렵, 유달리 잠잠한 나라가 하나 있었다. 바로 영국이었다. 17세기에 일찌감치 시민혁명의 홍역을 치른 영국은 18세기에 여러 차례 벌어진 프랑스와의 맞대결에서 승리한 뒤 가장 먼저 산업혁명의 불꽃을 피워 올리고, 19세기부터는 복잡한 대륙의 정세와 어느 정도 거리를 둔 채 고독한 질주를 계속하고 있었다【만약 섬이라는 조건이 아니었다면 17세기 영국의 시민혁명이 성공할 수 있었을까, 18세기 초 막강한 프랑스를 물리칠 수 있었을까, 에스파냐에 뒤이어 전 세계에 식민지들을 거느릴 수 있었을까? 영국은 대륙의 끝자락에 붙은 상당한 크기의 섬이라는 지리적 조건의 덕을 톡톡히 보았다. 그런 점에서 영국과 유사한 것은 동양의 일본이다. 일본 역시 대륙에 가까우면서도 큰 섬이라는 지리적으로 유리한 조건이 있었기에, 고대국가의 성립기인 7~9세기에 중국 당의 선진 문물을 취사선택할 수 있었고, 13세기 세계 제국 몽골의 침략을 막아냈으며, 16세기에는 중국에 도전장을 던졌고, 이후 에도 시대를 맞아 번영기를 구가했으며, 나아가 19세기에는 동양 최초이자 유일한 제국주의 열강으로 발돋움했다(물론 그 때문에 주변 나라들은 고통을 겪었지만)】. 비록 미국의 독립을 허용했지만 그것은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영국에 큰 타격을 입히지는 않았다.
사실 미국을 잃은 것은 차라리 영국의 세계 진출을 위해서는 잘된 일인지도 모른다. 신대륙을 포기할 수밖에 없게 되자 영국은 이후 동양으로 발길을 돌려 인도 식민지를 확고히 다지고 중국에까지 경제적 침략의 손길을 뻗치게 되었기 때문이다. 중국과의 무역에서 처음에 심각한 역조에 시달리던 영국은 아편이라는 ‘신상품’을 개발하면서 중국 시장을 장악한 다음 청 정부의 반발을 역이용해 군사적으로도 중국을 제압하게 된다. 이것이 1840년의 아편전쟁이다. 본격적인 제국주의 시대는 아직 30년을 더 기다려야 하지만, 이미 동양에서는 ‘서세동점(西勢東漸)’이라고 부르는 서구 열강의 제국주의적 침략이 전개되고 있었다.
물론 영국에도 국내 문제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다만 대륙에서만큼 격렬하게 표출되지 않았고, 또 대륙에서 상대적으로 고립되어 있는 만큼 다른 나라에서 영향을 받는 것도, 영향을 주는 것도 적었을 뿐이다. 문제가 있으면 대립이 생기고, 대립이 생기면 분쟁이 벌어진다. 나폴레옹 전쟁이 끝나면서부터 영국에도 정치 세력들 간의 대립과 마찰이 생겨났다. 그러나 영국에서의 대립은 대륙에 비해 훨씬 온건하고 자연스러웠다. 물론 그 이유는 17세기에 맞아둔 ‘예방주사’의 덕분이었다. 시민혁명을 겪고 입헌군주제와 의회주의가 확립되어 있었던 영국은 대륙에서처럼 왕과 의회가 사사건건 충돌하는 사태를 겪을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대륙에서는 의회의 소집이 여전히 가장 큰 쟁점이었지만, 영국에서의 정치적 대립은 오히려 의회를 무대로 이루어졌다. 대립의 양측은 젠트리라고 불리는 지주 계급과 산업혁명으로 힘을 얻은 부르주아지였다. 양측의 1차전은 선거법을 두고 벌어졌다.
▲ 서세동점의 시대 1842년 영국 전함 콘월리스 선상에서 난징 조약이 체결되는 장면이다. 이 조약은 동아시아 최초의 불평등조약으로서 장차 서양의 제국주의 열강이 동양을 어떻게 다룰지를 보여주는 실레이자 전범이 된다. 홍콩이 영국에 할양된 것도 이 조약에서 결정된 내용인데, 그게 150년이나 지나 1997년 7월 1일에야 중국에 반환될 줄은 당시 영국도 중국도 몰랐을 것이다.
산업혁명이 진행되면서 영국 사회는 단기간에 큰 변화를 겪었다. 1780년에 약 1300만 명이던 인구는 50년 뒤인 1831년에는 2400만 명으로 거의 두 배가 되었으며, 특히 도시화가 진척되면서 도시 인구가 눈에 띄게 증가했다. 그러나 의회 선거법은 이러한 변화를 전혀 수용하지 않고 있었는데, 여기서 터무니없는 문제가 생겨났다. 예를 들어 유권자가 349명인 버킹엄 선거구나 4772명인 리즈 선거구나 선출하는 의원의 수는 서로 같았는가 하면, 심지어 산업화에 따른 인구 이동으로 유권자가 격감해 거의 선거구의 구실도 못하는 지역(이것을 부패선거 구라고 불렀다)에서도 버젓이 대표를 선출했다. 당연히 선거법은 일찍부터 개정 대상이었지만 휘그당과 토리당 간의 당리당략 때문에 질질 끌어오던 터였다. 휘그당은 부르주아지를 지지 기반으로 한 반면, 토리당은 지주들을 기반으로 삼고 있었던 것이다. 어느 측이 현상 유지를 꾀했는 지는 자명하다.
하지만 1832년 토리당도 더 이상 선거법 개정에 반대만 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 개정 결과 50개가 넘는 부패선거구는 신흥 공업도시로 옮겨졌고, 유권자 자격(재산 소유)을 완화해 유권자 수가 크게 늘어났다. 이것을 계기로 양당은 아예 자신의 색깔을 당명에 명확히 드러내기로 마음먹었다. 부르주아지의 휘그당은 자유당이 되었고, 지주의 토리당은 보수당이 되었다.
1차전을 승리한 자유주의 세력은 10여 년 뒤에 벌어진 2차전에서도 전통의 지주 세력을 밀어붙였다. 이번의 쟁점은 곡물법이었다. 곡물법의 역사는 무려 12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데, 기본 골격은 외국으로부터의 곡물 수입을 제한하는 것으로 지주들의 이익을 보호하려는 데 목적이 있었다【곡물법도 역시 영국이 대륙에서 지리적으로 분리된 섬이기에 가능한 법이었다. 대륙의 국가라면 아무리 보호관세를 엄격히 적용한다 해도 민간의 유통을 근원적으로 막을 수는 없다. 그러나 영국처럼 섬이라면, 물자를 유통하는 데 선박을 이용할 수밖에 없으므로, 국가가 마음만 먹는다면 수출입의 통제를 얼마든지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수백 년간 곡물법은 영국의 경제를 대륙으로부터 보호하는 데 크게 기여했지만, 이제는 사정이 달라졌다. 영국의 경제가 대륙의 경제를 능가하는 수준에 올랐기 때문이다.
곡물법은 영국 내의 곡가를 항상 높은 수준으로 유지했다. 이것은 지주에게 큰 이득이었지만 산업 부르주아지에게는 이중적으로 불리한 요소였다. 곡가가 높으면 노동자의 임금을 낮출 수 없으므로 그 자체로 이윤이 적어질 뿐 아니라 임금 부담으로 공업 제품의 가격이 상승하므로 국내 판매와 수출에서 타격을 입게 되기 때문이다. 더구나 산업혁명 기간에 영국은 곡물 수출국에서 곡물 수입국으로 바뀐 탓에 기존의 곡물법을 계속 유지하다가는 국내 산업이 몽땅 거덜이 날 판이었다.
지주들의 이익은 단기적이고, 부르주아지의 이익은 장기적이었다. 그러므로 계급의 이해관계는 달라도 영국이라는 나라 자체가 취할 노선은 분명했다. 결국 1846년 곡물법이 폐지되면서 부르주아지는 2차전도 승리로 장식했다【곡물법을 두고 당시 영국의 경제학자들 간에는 논쟁이 치열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리카도(David Ricardo, 1772~1823)와 맬서스(Thomas Malthus, 1766~1834)의 논쟁이다. 리카도는 산업 부르주아지의 입장에서 곡물법에 반대했고, 맬서스는 지주의 입장에서 곡물법을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논쟁을 통해 두 사람은 초기 경제학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는데, 흥미로운 것은 그들을 각각 계승한 경제학이 오늘날까지도 경제학의 두 가지 큰 흐름을 형성하고 있다는 점이다. 리카도의 이론은 마르크스로 이어지면서 오늘날의 정치경제학적 전통을 낳았고, 맬서스의 이론은 한동안 잠자고 있다가 케인스(John Maynard Keynes, 1883~1946)가 부활시키면서 오늘날의 주류 경제학을 낳았다】. 유혈 충돌이 아니라 선거에서 연거푸 이긴 것이므로 영국은 대륙에서처럼 피를 흘리지 않고 자유주의의 기치를 드높이 올릴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아직 영국의 문제는 한 가지가 더 남아 있었다. 영국의 계급은 지주와 부르주아지의 둘만 있지 않았다. 산업혁명이 키워 낸 계급은 부르주아지만이 아니었다. 이미 영국은 완전한 자본주의 체제에 돌입했으므로 자본계급의 성장에 따라 노동계급도 성장했던 것이다. 대륙에서도 자유주의의 문제 이외에 사회주의가 새로운 문제로 대두되었듯이, 지주와 부르주아지의 대립을 비교적 쉽게 해결한 영국에서는 새로이 노동계급의 문제가 떠올랐다.
노동자들은 이미 1832년 선거법 개정부터 불만이었다. 유권자의 자격이 확대되어도 재산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전혀 선거권이 주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무산자야말로 노동자의 다른 이름이 아니던가? 그래서 노동자들은 독자적으로 정치적 권리를 쟁취하기 위해 1839년 무려 128만 명의 서명으로 의회에 보통선거권을 구하는 국민청원을 보냈다. 당시 그들이 제출한 청원 문서는 헌장(People‘s Charter)이었으므로 여기서 차티스트 운동이라는 이 나왔다(charter의 라틴어는 카르타 carta인데, 13세기의 마그나카르타영어로 Great Charter가 된다).
그러나 그 시도는 보기 좋게 실패했다. 정작으로 부르주아지의 힘을 늘려준 것은 노동자들인데, 막상 권력을 얻은 부르주아지는 더 이상 참정권을 확대하는 것에 반대하고 나섰으니 노동자들로서는 기가 찰 노릇이었다. 3년 뒤인 1842년에는 서명 인원을 거의 세 배로 늘려 다시 국민청원을 했으나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희한한 것은 그래도 노동자들은 혁명적으로 나아가지 않고 의회 청원에만 의지했다는 점이다. 1848년 500만 명이 넘는 서명을 얻어 다시 국민청원에 나섰다가 실패한 이후 차티스트 운동은 점차 약화되었다. 대륙과 달리 사태가 이 정도로 무마되는 것은 지극히 ‘영국적인’ 특징이다. 그만큼 당시 영국에 제도로서의 민주주의가 확고히 안착했다는 증거다.
지주와 부르주아지의 대결에서도 그랬듯이, 부르주아지와 노동자의 대결에서도 역시 대립과 충돌보다는 타협과 합의가 앞섰다【17세기 명예혁명 이후 영국인들은 마치 피를 보지 않기로 합의한 듯하다. 그래서 흔히 영국 근대사를 타협과 합의의 정치로 부른다. 하지만 그것은 영국인들이 원래 평화로운 민족이기 때문은 아니다. 가장 큰 요인은 일찌감치 의회민주주의가 자리를 잡았다는 데 있다. 가장 급진적이어야 할 노동자들의 움직임이 의회 청원의 정도로 표출되었다는 것 자체가 이미 그동안 쌓인 의회민주주의의 두께를 보여주는 사실이다. 그러나 차티스트 운동이 실패한 데는 당시 영국의 자본주의가 절정에 달해 있었다는 점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실제로 19세기 초반 자본주의의 큰 그늘을 이루었던 영국 노동자들의 열악한 노동조건과 생활은 중반부터 크게 개선되기 시작했다. 신자유주의의 용어로 말하면 낙수효과(trickle down effect)에 해당하는데, 물론 선진 자본주의였기에 가능한 현상이다】. 차티스트 운동은 비록 실패했지만 그 이념은 단계적으로 꾸준히 ‘제도권’ 내에 수용되었다. 이후 선거권은 점차 확대되어 19세기 말에는 마침내 노동자들의 선거권이 보장되었고, 20세기 벽두인 1906년에는 자유당의 간판을 내리고 부르주아지와 노동계급을 함께 대변할 것을 표방하는 노동당이 성립했다. 그와 더불어 영국에서는 의회와 내각이 앞장서서 자유주의 개혁을 실시하는, 대륙에서는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과정이 전개되었다.
차티스트 운동을 끝으로 국내 문제를 일단락지은 뒤부터 영국은 본격적인 세계 진출의 길로 나서게 된다. 그전까지도 영국의 자본주의는 먹이를 쫓는 하이에나처럼 시장을 찾아 끊임없이 돌아다니고 있었으나, 이제부터는 제국주의라는 새로운 옷으로 갈아입고 전 세계를 대상으로 식민지 개척에 나선 것이다. 이 무렵의 왕이 빅토리아 여왕(Victoria, 1819~1901, 재위 1837~1901)이었기에 이 시기를 흔히 빅토리아 시대라고 부르지만, 왕이 아니라 의회와 내각이 그 시기를 이끌었으므로 그냥 상징적인 이름이라 해야 할 것이다(물론 ‘승리’라는 뜻의 여왕 이름이 영국의 성공을 상징하는 의미는 있겠다).
▲ 혁명을 겪은 나라 차티스트 노동자들이 런던 케닝턴 광장에 모여 있는 모습이다. 대륙은 피부르는 혁명의 물결에 휩싸여 있었으나, 영국은 200년 전에 시민혁명의 예방주사를 맞아놓은 분에 노동자들의 행동마저 그리 급진적으로 표출되지 않았다. 영국의 근대사를 타협과 합의의 사라고 부르는 이유를 말해준다.
대륙의 서열 짓기
대내 안정과 대외 팽창이 순조롭게 연결된 영국과 달리 대륙에서는 여전히 진통이 계속되었다. 독일과 프랑스는 똑같이 1848년의 혁명을 겪었다. 두 나라는 혁명이 실패했으나 그로 인해 지배층이 자유주의 개혁의 숙제를 떠안게 된 것도 똑같았다. 그러나 그 뒤의 사정은 서로 판이하게 달라진다. 그 이후 100년 동안, 나아가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독일과 프랑스의 특성은 바로 그 무렵에 뚜렷이 나타난다. 단적으로 말해 두 나라의 차이는 자유주의 세력의 차이에서 비롯되었다.
원래부터 힘이 약한 독일의 자유주의 세력은 혁명이 실패하자 곧바로 몰락했고, 자유주의 개혁의 총대는 자연스럽게 프로이센 정부가 매게 되었다.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는 프랑크푸르트 국민의회가 바치는 제관을 거절했지만, 두 가지 조건 중 하나만 충족되었어도 덥석 받지 않았을까 싶다. 즉 거기서 자유주의라는 포장지만 떼어내거나 프랑크푸르트 의회가 아닌 독일 전체의 의회(물론 그런 것은 존재하지 않았지만)가 제안하는 제위라면 그로서도 거부할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의회 자체가 자유주의의 산물이므로 앞의 조건은 어쩔 수 없다 해도 뒤의 조건은 가능하다. 독일을 한 국가로 통일하면 되니까. 그러나 오스트리아의 간섭으로 그는 결국 독일의 통일을 보지 못하고 죽었다.
그의 동생으로 프로이센 왕위에 오른 빌헬름 1세(Wilhelim Ⅰ, 1797~1888, 재위 1861~1888)는 처음부터 형의 숙원인 통일을 이루기 위해 힘을 집중했다. 군인 기질이 농후한 그는 무력을 근간으로 통일을 이루려 했다. 자연히 군사력 증강이 최우선 과제로 대두되었고, 그에 따른 경비가 많이 필요했다. 그러나 3월 혁명으로 탄생한 프로이센 의회는 여전히 왕권을 견제하려 했다. 게다가 1850년대의 경제 활황으로 자유주의 세력의 입김은 더욱 커지고 있었다. 의회의 반대에 맞닥뜨린 빌헬름은 교묘한 해결책을 고안했다. 왕의 독재는 피한다. 그 대신 왕과 뜻을 같이하는 내각을 구성한다. 이게 그의 방책이었다. 그런 의도에서 1862년에 총리로 임명된 비스마르크(Bismarck, 1815~1898)는 빌헬름보다 한술 더 뜨는 보수적이고 호전적인 인물이었다. 오죽하면 별명이 철혈 재상이었을까?
19세기 유럽의 민족주의는 당시로서는 진보적인 이념이었으며, 주로 자유주의 정치가들이 그 이념을 받아들였다. 그런 점에서 비스마르크는 좀 묘하다. 보수주의를 정치적 신조로 가지고 있으면서도 현실 정치에서는 민족주의를 추종했기 때문이다. 그는 젊은 시걸 러시아와 프랑스의 대사를 지내면서 유럽 각국의 민족주의적 분위기를 접한 뒤 프로이센을 중심으로 하는 독일의 통일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점을 실감하고 있었다.
보수주의와 민족주의가 결합하면 배타적 호전적 민족주의가 된다【근대국가를 먼저 이룬 게 영국과 프랑스인 만큼 이런 민족주의를 뜻하는 말은 영어와 프랑스어에 모두 있는데, 둘 다 19세기에 생겼다. “We don‘t want to fight but by Jingo if we do(우리는 싸우고 싶지 않지만 싸워야 한다면 결단코 싸우겠다)!”는 말에서 영어의 징고이즘(jingoism)이 나왔고, 나폴레옹을 신처럼 숭배한 프랑스 병사 쇼뱅의 이름에서 프랑스어의 쇼비니즘(chauvinism)이 나왔다. 둘 다 호전적 민족주의를 가리키는 용어다. 애국심은 좋은 것이고 민족주의는 나쁜 것이지만 실은 한 끗 차이다. 그래서 현대 독일의 어느 정치인은 양자를 이렇게 구분했다. “애국심은 자기 나라를 사랑하는 것이고, 민족주의는 남의 나라를 경멸하는 것이다.”】. 유럽의 정치적 후진국 독일을 가장 빨리 발전시키는 길은 군사 대국으로 성장하는 길이라고 믿은 비스마르크의 이념이 바로 그것이었다(물론 그렇지 않았다면 빌헬름이 그를 등용하지도 않았겠지만). 총리가 되어 전권을 장악한 그의 앞에는 안팎의 장애물이 있었다. 독일이 유럽 열강과 어깨를 나란히 하려면 우선 통일을 이루어야 한다. 그런데 독일의 통일을 저해하는 세력은 바로 프랑스와 오스트리아다(바깥의 장애물), 이들을 물리치려면 강력한 군대가 필요하다. 그런데 군대 증강을 반대하는 세력은 바로 프로이센의 의회다(안의 장애물). 이런 형세 판단에서 그는 행동 지침을 만든다.
우선 안의 장애물, 이건 일단 무시한다. 프로이센의 자유주의자들은 급진적인 언행을 일삼으면서도 혁명으로 나아가지는 않으리라는 게 비스마르크의 판단이었고, 그것은 옳았다. 그래서 그는 의회의 반대를 무릅쓰고 군제 개혁을 강행했다. 우선 병사들을 장기 복무시키고 직업군인의 비율을 늘렸다. 그리고 장비를 대폭 강화하고 군사훈련을 철저히 하는 한편 병영 생활을 통해 엄격한 기강과 복종의 정신을 함양했다(이후에 유행하는 ‘독일 병정’이라는 말은 바로 여기서 나왔다). 이런 과정을 통해 100년 전 프리드리히 2세 시절 강력한 군대의 전통을 가지고 있었던 프로이센군의 위용이 금세 되살아났다.
군사력에 어느 정도 자신감이 생기자 비스마르크는 프랑스에 비해 상대적으로 약한 오스트리아를 먼저 공략하기로 했다. 그런데 그 방법이 좀 묘했다. 1864년 프로이센은 덴마크가 홀슈타인(독일 북부, 덴마크 접경지대에 있던 지역의 옛 명칭)을 제멋대로 합병하자 오스트리아와 동맹을 맺고 덴마크를 제압했다. 오스트리아는 아직 자신이 프로이센의 진정한 과녁인 줄을 모르고 있었다.
그런 다음 비스마르크는 러시아와 프랑스, 이탈리아로부터 차례로 중립을 약속받은 뒤 1866년 오스트리아를 공격해 사도바에서 대승을 거두었다. 외교와 전쟁의 절묘한 조합이었다. 이로써 오스트리아는 프로이센 중심의 독일 통일에 대해 아무런 발언권도 행사하지 못하게 되었다.
▲ 19세기의 독일 병정 덴마크를 공격하는 프로이센군의 모습이다. 100년 전 프리드리히 대왕이 갈고 닦은 프로이센군은 비스마르크 시대의 2차 연마를 통해 유럽 최고의 육군으로 자라났다. 시민혁명의 부재와 강력한 군대라는 부조화는 20세기까지도 독일을 덩치만 크고 인지는 덜 발달한 청소년처럼 불균형한 국가로 만들었다.
그러고 나서야 비스마르크는 4년간 무시해온 의회에 출두해 추후 승인을 요구했다. 자유주의자들은 뭐라 말하고 싶었지만 눈앞의 성과에 할 말이 없었다(비스마르크가 의회와 정면 대결을 벌인 ‘철혈정책’이라고 하는데, 철혈재상이라는 별명은 여기서 나왔다). 센에서는 이제 의회만이 아니라 전 국민이 비스마르크를 지지게 되었다. 이로써 안의 장애물은 완벽하게 제거되었다. 남은 은 바깥의 대적, 프랑스다.
한편 프랑스의 상황은 프로이센과 정반대였다. 프로이센와 달리 혁명적인 프랑스의 자유주의자들은 막강한 정치적 힘과시했다. 루이 나폴레옹이 황제 나폴레옹 3세가 되면서 는 제정으로 바뀌었으나 자유주의자들의 입김이 워낙 강해 는 거의 입헌군주나 다름없는 처지였다. 프로이센의 진출을 한 나폴레옹 3세는 프로이센처럼 군제 개혁을 하려 했으나 의 반대에 부딪혀 진전을 보지 못했다(바로 이 점이 독일과 프랑스차이다). 프랑스의 군대는 돈으로 징용을 면제받는 제도가 있을 도였으니, 의무 장기병제를 도입한 프로이센과는 비교도 되지 았다. 더구나 군대는 안정과 번영을 바라는 프랑스 부르주아지게서 공공연한 멸시까지 당하는 판이었다.
전쟁의 꼬투리는 외부에서 발생했다. 1870년 에스파냐혁명으로 공석이 된 왕위에 프로이센 왕가인 호엔촐레른 가문왕자를 앉히려 했다. 안 그래도 프로이센을 경계하고 있던 나폴옹 3세가 강력히 반대했는데(18세기 초 에스파냐 왕위 계승과는 대의 상황이다), 사건은 여기서 꼬여버렸다. 기회를 잡았다고 비스마르크는 엠스 온천장에서 휴양 중이던 프로이센 황제프랑스 대사가 결례를 했다고 대대적인 선전을 했고, 자존심이 뜩 상한 프로이센 국민은 프랑스에 대한 노골적인 적개심을 냈다. 화가 난 나폴레옹 3세는 앞뒤를 재지 못하고 1870년 7월 먼저 선전포고를 했다. 이리하여 역사에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이라고 알려진 전쟁이 시작되었다(보통 전쟁의 명칭은 먼저 공격한 측을 앞에 붙이므로 프랑스가 앞에 있지만 실은 프로이센이 도발한 전쟁이다).
프랑스로서는 의회가 지지하지 않는 전쟁을 황제가 독단으로 결정한 셈이 되었고, 프로이센으로서는 ‘군관민 일체’가 전쟁을 바라고 있는 가운데 먼저 선전포고를 당했다는 명분까지 얻었다. 승부는 여기서 이미 결정되어 있었고, 비스마르크는 승리를 확신하고 있었다. 선전포고를 했다는 게 무색하게도 개전 직후부터 프랑스는 연패를 거듭했다. 오히려 프랑스군은 프랑스 영내에 있는 메스에서 프로이센군에 포위되었다. 이를 구하러 나폴레옹 3세가 직접 군대를 이끌고 달려갔으나 구하기는커녕 스당에서 적군의 포로가 되어 항복하고 말았는데, 선전포고를 한 지 두 달도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다.
▲ 항복하는 황제 프로이센의 빌헬름 1세(왼쪽)에게 항복하는 나폴레옹 3세(오른쪽)의 모습이다. 그림에서는 제법 여유가 있어 보이지만, 나폴레옹은 먼저 선전포고까지 하고서도 적에게 포로로 잡히는 굴욕을 당해야 했다(당시 빌헬름은 일흔셋, 나폴레옹은 예순둘의 노인이었다). 이후 그는 프랑스가 프로이센에 패전한 뒤 영국으로 망명해 재기를 노렸으나 끝내 꿈을 이루지 못하고 망명지에서 죽었다.
황제가 항복했다는 비보가 파리에 전해지자 프랑스 측은 그제야 비로소 전쟁 준비를 시작했다. 프랑스 의회는 서둘러 제정의 종식을 선언했고, 새로 구성된 임시정부는 역사상 세 번째 공화정을 선포했다. 그러나 이미 전황은 기울어졌고, 프랑스로서는 공격전이 아니라 ‘항전’을 벌이는 처지였다. 이미 프랑스군의 주력을 격파한 프로이센군은 거침없이 전진했다. 10월까지 메스와 스트라스부르 등 프랑스 동부 지역 요새는 전부 프로이센에 함락되었고, 곧이어 수도 파리도 포위되었다.
조국이 위기에 처했다는 구호가 다시 등장한 것은 바로 이때였다. 프랑스 혁명기 외국의 간섭을 막아낸 프랑스 국민들은 임시정부가 프로이센과 굴욕적인 강화를 맺는 방향으로 노선을 바꾸자 거세게 반발했다. 특히 프로이센군에 포위된 파리의 시민들은 임시정부를 부정하고 자체 정부를 구성하기로 했다. 그 결과로 유명한 파리 코뮌(Paris Commune)이 성립되었다.
그러나 프랑스는 정부와 의회, 국민의 움직임 모두가 프로이센보다 한 박자씩 늦었다. 정부는 미리 군대를 증강하지 못했고, 의회는 개전 후까지도 전쟁을 반대했으며, 국민들은 뒤늦게 애국심을 발휘했다. 임시정부마저도 적으로 내몬 상황에서 (임시정부는 베르사유 궁전으로 가서 새로 베르사유 정부를 구성했다) 파리 시민들은 1871년 3월 28일 파리 코뮌을 이루고 2개월간 버텼지만 결국 베르사유의 정부군에 의해 무참히 진압되고 말았다【비록 존속 기간은 짧았으나 파리 코뮌은 역사상 처음으로 노동자를 비롯한 소시민층이 자체 정부를 구성한 의의를 지닌다. 엄중한 상황에서도 코뮌 정부는 노동자의 권익을 보호하고 빈곤 시민들의 생활 향상을 위한 각종 개혁 조치를 쏟아냈다. 마르크스가 파리 코뮌을 이상적인 사회주의 공화국으로 규정한 이래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코뮌의 역사적 경험을 20세기 러시아 혁명에 선행하는 최초의 프롤레타리아 독재로 높이 평가했다. 그러나 역사적 의의와 달리 파리 코뮌은 참담하게 진압되었다. 5월 21일 베르사유 정부군은 파리 진입을 감행해 5월 28일까지 코뮌 치하의 파리 시민 약 3만 명을 학살했다. 이것을 ‘피의 일주일’이라고 부른다】.
전쟁의 승리로 프로이센은 프랑스로부터 50억 프랑의 막대한 배상금을 받았고 알자스-로렌 지방을 얻었다. 그러나 그보다 더 큰 수확은 마침내 독일의 통일을 이루었다는 사실이다. 프로이센의 실력을 목격한 독일 내의 영방국가들은 제 발로 프로이센이 영도하는 독일제국에 합류했다. 프로이센은 발전적으로 해체되었고, 프로이센 왕 빌헬름 1세는 총리 하나 잘 둔 덕분에 1871년 독일제국의 초대 황제로 등극할 수 있었다. 그것도 적지의 한복판인 베르사유 궁전에서.
▲ 제국의 탄생 독일이라는 이름은 무척 익숙하지만 땅 이름이 아니라 나라 이름이 된 것은 1871년의 일이다. 지도는 신생 제국 독일의 영토인데, 프로이센이 중심이었던 탓에 남독일까지 아우르지 못한 것을 보여준다.
통일에 몸 바친 두 사람
프랑스 - 프로이센 전쟁으로 독일이 통일을 이루면서 대륙 중심부의 국제 질서는 다시금 안정을 찾았다. 프랑스는 패전의 충격으로, 또 독일은 ‘신생국’에 따르게 마련인 혼란으로 내부가 불안정했지만, 적어도 전쟁으로 비화할 만한 국제적 분쟁거리는 사라졌다. 이제 교통정리가 필요한 곳은 르네상스 이후 내내 몰락의 길을 걸으면서 서유럽의 중심에서 변방으로 전락한 이탈리아다.
빈 회의의 결과로 오스트리아의 지배가 복귀하면서 이탈리아는 예전처럼 다시 오스트리아의 세력권인 북이탈리아와 시칠리아 왕국이 들어서 있는 남이탈리아로 나뉘었다(중부에는 여전히 교황령이 있었으나 교황의 권력과 더불어 추락해 약간의 영토만 남아 있을 뿐 현실적인 영향력은 없는 상태였다). 그러나 전통적으로 외국의 지배를 받은 데다 자치도시로 분립된 북이탈리아나 에스파냐 왕실의 간섭을 받았던 시칠리아나 이탈리아의 주인이 되기에는 힘이 부쳤다. 이런 상황에서 새로운 구심점으로 떠오른 것은 지중해의 섬 사르데냐였다.
프랑스와 독일을 휩쓴 1848년 혁명의 소용돌이가 채 가시지 않은 1849년에 사르데냐의 왕위에 오른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Vittorio Emanuele II, 1820~1878, 재위 1843~1861)는 사르데냐가 이탈리아 통일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의 첫 번째 치적은 성직자의 특권을 제한하는 법적 조치였는데, 여기서 보듯이 그는 처음부터 자유주의 개혁의 기치를 높이 들고 이탈리아 자유주의자들의 구심점을 표방하고 나섰다. 당연히 오스트리아의 비위를 거스를 수밖에 없었으나, 다행히도 오스트리아는 3월 혁명의 수습에 여념이 없는 상황이었다. 사르데냐로서는 힘을 배양할 절호의 기회였다.
에마누엘레의 두 번째 치적은 카보우르(Camilo Benso Cavour, 1810~1861)를 총리로 기용한 것이다. 귀족 출신의 자유주의자에다 외국에 체재한 경험이 많고 군대와 언론인 경력까지 골고루 갖춘 카보우르는 약소국의 처지에서 통일의 중심으로 발돋움하려는 사르데냐에는 절실하게 필요한 인물이었다. 그는 무엇보다 우선 사르데냐의 국력을 키우는 게 급선무라고 보고, 농업과 공업을 진흥시키는 한편 자유 무역 체제를 정착시키고 군대를 육성했다.
군대의 쓰임새는 곧 생겨났다. 때마침 크림 전쟁이 터진 것이다. 사르데냐의 국력으로는 크림 전쟁에 참전하는 게 무리였으나, 사르데냐를 유럽의 국제사회에 널리 알리는 게 중요하다고 판단한 카보우르는 의회의 반대를 무릅쓰고 군대를 흑해로 파견했다. 그 덕분에 그는 승전국 자격으로 파리 강화회의에 참석해 이탈리아의 상황을 국제적으로 홍보할 기회를 얻었다.
▲ 이탈리아 최초의 국왕 에마누엘레는 카보우르와 가리발디라는 두 건국 영웅 덕분에 로마 시대 이후 이탈리아 역사상 최초의 국왕이 되는 영예를 누렸다. 게르만 계통의 다른 민족들이 로마의 유산을 물려받아 각기 나라를 세운 것에 비하면 1000년이나 늦은 시점이다.
그러나 카보우르의 모든 작업은 터를 닦기 위한 것일 뿐이었다. 무엇을 위한 터일까? 물론 이탈리아의 통일이다. 카보우르의 정책은 이탈리아 자유주의 세력의 지지를 얻었고, 군대 육성은 장차 통일 전쟁을 위해 반드시 필요했으며, 그림 전쟁에 참전한 것은 오스트리아에 반대하는 프랑스를 우방으로 삼는 성과를 올렸다. 이것을 밑천으로 카보우르는 1859년에 나폴레옹 3세와 밀약을 맺고 오스트리아를 상대로 통일 전쟁을 시작했다. 프랑스군의 지원으로 사르데나군은 마침내 오스트리아를 물리치고 롬바르디아를 획득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나친 복은 화를 부르는 법, 사르데냐의 세력이 커지는 것에 경계심을 품은 나폴레옹 3세는 사르데냐를 배신하고 오스트리아와 단독 휴전을 맺었다.
다 된 밥에 프랑스가 재를 뿌린 탓에 카보우르는 일단 총리직을 사임했다. 그러나 사태의 해결책은 그가 뿌려놓은 씨앗에서 자라났다. 나폴레옹의 배신은 오히려 이탈리아 자유주의 세력을 총궐기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던 것이다. 카보우르는 재빨리 다시 내각을 구성하고, 니스와 사부아를 프랑스에 내주는 조건으로 중부 이탈리아까지 획득했다(오늘날 이탈리아와 프랑스의 경계선이 결정된 것은 바로 이 순간이다).
이제 남은 부분은 남부의 시칠리아 왕국으로서, 원래 이 지역은 워낙 오래전부터 이탈리아와 분리된 역사를 가진 탓에 사르데냐가 영향력을 행사하기는 어려운 곳이었다(로마 시대 이후로 남이탈리아와 시칠리아는 중·북부 이탈리아와 별개의 역사를 꾸려왔다. (1권 420쪽의 주 참조). 그러나 시대는 인물을 낳는다. 여기서 또 한 명의 영웅 가리발디(Giuseppe Garbalit, 1807~1882)가 등장한다. 젊은 시절 | 1830년의 해방 전쟁에도 참전한 바 있는 그는 1000명의 의용군으로 편성된 붉은 셔츠단(Camicie rosse)을 이끌고 시칠리아와 나폴리를 점령해 사르데냐의 에마누엘레 왕에게 바쳤다. 가리발디는 원래 공화주의자였으나 이탈리아 통일이라는 대의를 위해 개인적 신념을 버렸던 것이다(이미 유럽은 민족주의가 그 어느 것보다 우선시되는 상황이었다)【원래 가리발디는 사르데냐가 주도하는 통일 운동에 반대했고, 외세에 의존하려 한 카보우르의 정책에도 반대했다. 그래서 그는 나폴리를 정복한 다음 로마까지 점령해 제헌의회를 소집하고자 했다. 그러나 이를 알아차린 카보우르는 재빨리 사르데냐군을 남하시켜 가리발디군을 막았다(그는 가리발디가 로마를 침공할 경우 프랑스가 거세게 반발하리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자칫하면 통일도 이루기 전에 내전이 일어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가리발디는 자신의 뜻을 꺾고 카보우르와 통합했다】.
카보우르와 가리발디의 문무에 걸친 완벽한 합작으로 마침내 1861년 이탈리아 왕국이 세워졌고, 에마누엘레는 초대 왕위에 올랐다. 로마가 멸망한 이후부터 근대 초기에 이르기까지 유럽 문명의 중심지였던 이탈리아에 비로소 처음으로 나라다운 나라가 세워진 것이다. 이렇게 어렵사리 그려진 용의 그림에 눈을 찍어준 것은 프랑스였다. 가톨릭의 심장인 로마만큼은 어떻게든 사수하려던 프랑스가 1870년 프로이센과의 전쟁에서 패배하고 철수함으로써 이탈리아 왕국은 피렌체에 있던 수도를 로마로 옮길 수 있게 된 것이다. 이것으로 이탈리아는 로마 제국 이후 1500년 만에 다시 반도 전체를 통일했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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