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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서양사, 2부 뿌리① - 3장 전란의 시대, 공멸을 가져온 전쟁 본문

역사&절기/세계사

서양사, 2부 뿌리① - 3장 전란의 시대, 공멸을 가져온 전쟁

건방진방랑자 2022. 1. 2. 1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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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멸을 가져온 전쟁

 

 

아테네는 오히려 전쟁을 바라고 있었다. 육군이 강한 스파르타니까 힘은 제법 쓰겠지만 전쟁은 물리력만으로 되지 않는 법, 결국에는 아테네의 풍부한 재력과 병력이 말을 할 터이다. 더구나 스파르타가 자랑하는 완력은 육군에만 해당할 뿐 해군력에서는 아테네와 비교도 되지 않는다.

 

그러나 스파르타에 운이 따른 걸까? 개전하고 얼마가 지난 기원전 430년 여름에 페스트가 아테네를 급습했다. 아테네의 위대한 지도자 페리클레스마저 페스트에 걸려 사망하고 말았다. 속전속결로 전쟁을 끝내려던 아테네로서는 치명타였다. 두 나라의 전력은 이 사건으로 대뜸 엇비슷해졌다. 그 덕분에 이후 전쟁은 지지부진한 지구전으로 10년을 끌었다. 선수들이 지치면 휴식을 취하고 나서 다시 붙을 수밖에 없다. 기원전 421년 양측은 일단 휴전하기로 합의하는데, 중재자가 니키아스였으므로 이것을 니키아스의 평화라고 부른다.

 

휴전이 만들어준 타임아웃 시간은 양측 모두에게 중요했다. 양측은 처음에 전쟁의 상처를 치유하는 데 힘썼다. 그러나 전쟁의 불씨가 제거되지 않은 이상 주전론이 득세하는 것은 필연이었다. 잠깐 동안의 휴전을 먼저 깬 것은 스파르타였다. 스파르타는 만티네아에서 대규모 지상전을 펼쳐 승리를 거두었다. 개전 후 처음으로 벌어진 전투다운 전투에서 보기 좋게 패배하자 아테네에는 호전적인 분위기가 넘쳤다. 그동안 스파르타에 질질 끌려다닌 이유는 전력상의 잠재적 우위를 현실화하지 못했기 때문이고, 그 책임은 바로 군 지휘관의 탓이었다. 이런 판단에서 아테네는 간단한 해법을 찾아냈다. 뛰어난 선수들을 거느리고도 경기에서 이기지 못했다면 감독을 바꾸면 된다. 아테네는 페리클레스의 친척인 30대의 젊은 알키비아데스(Alkibiades, 기원전 450년경~기원전 404)를 새 감독으로 임명했다.

 

과연 새 감독은 전쟁에 의욕을 보였다. 그가 들고 나온 작전은 우회 전략이었다. 정면 승부 대신 스파르타의 보급 기지인 이탈리아와 시칠리아를 먼저 손에 넣기로 한 것이다. 그러나 진정한 적은 언제나 내부에 있다. 신임 감독은 문제가 있는 인물로 내부의 신임(信任)을 얻지 못하고 있었다. 알키비아데스가 원정에 나선 틈을 타서 그의 정적들은 과거의 행위를 들추면서 그를 비난하고 나섰다.

 

구석에 몰린 알키비아데스로서는 전쟁에서 승리한다 해도 명예롭게 귀국하기는 글렀다고 여겼다. 그런 심정이 엉뚱한 짓으로 표출되었다. 조국을 배신하고 스파르타로 가서 자신이 세운 원정 계획을 낱낱이 일러바친 것이다. 그런 사실까지 모르고 있던 아테네는 다시 니키아스를 새 감독으로 임명했다. 하지만 주전론자가 세운 작전을 주화론자가 수행하기는 어렵다. 알키비아데스의 첩보로 기민한 대응에 나선 스파르타는 시라쿠사 항구에서 아테네 함대를 격파하고 군대를 학살했다.

 

 

몰락을 부른 내전 페르시아라는 대적을 물리친 안도감이었을까, 아니면 그 후유증이었을까?? 그리스 세계의 평화와 번영은 한 세기를 가지 못하고 이번에는 아테네와 스파르타가 반도의 패권을 놓고 겨루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승자와 패자의 공멸이었다. 이후 유럽 문명의 중심은 이탈리아로 서진한다.

 

 

굳게 믿은 함대마저 패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아테네는 초상집 분위기가 되었다. 그러나 정작으로 큰 문제는 뒤부터였다. 해군에서 자신감을 얻은 스파르타는 반격에 나섰다. 그것도 아테네의 우회 전략을 그대로 써먹는 방법으로.

 

스파르타는 이참에 아테네의 목줄을 죄기로 했다. 에게 해를 장악해 아테네의 보급로와 무역로를 차단하는 것이다. 다만 이를 위해서는 해군이 필요한데, 스파르타와 그 동맹 폴리스들은 전통적으로 해군이 약했다. 없으면 빌린다. 그리스에서는 아테네의 해군력이 가장 강하니까 빌릴 데가 없다. 그렇다면 바깥이다. 승리에 눈이 어두운 스파르타는 수십 년 전에 그리스 전체를 정복하러 왔던 페르시아에서 해군력을 지원받기로 한다.

 

페르시아는 그리스에 패한 이후 그리스 본토는 포기하더라도 이오니아만큼은 다시 지배하고 싶었다. 해군이 필요한 스파르타, 이오니아가 필요한 페르시아, 양측의 조건은 딱 맞아떨어졌다. 스파르타는 페르시아에 이오니아의 식민시들을 넘겨주는 조건으로 아테네의 보급로인 흑해 방면을 차단해달라고 부탁했다. 기원전 405년 아테네가 자랑하던 해군이 헬레스폰토스에서 대패하면서 30년에 걸친 펠로폰네소스 전쟁은 스파르타의 최종 승리로 끝났다.

 

사실 펠로폰네소스 전쟁 기간은 아테네 해군의 절정기였다. 하지만 해군력으로 승리한 페르시아 전쟁 이후 아테네는 지나치게 해군력에만 의존한 나머지 육군에 대해서는 소홀했다. 특히 페리클레스는 해군 전략에만 전념했다. 불균형한 전력은 약한 전력보다 위험한 법이다. 주 무기인 해군력이 무너지자 아테네는 견딜 수 없었다.

 

한편 외세까지 끌어들여 얻은 스파르타의 승리는 상처뿐인 영광이었다. 스파르타는 제국으로 발돋움하려는 아테네의 의지를 꺾고 펠로폰네소스 반도를 넘어 그리스 전체의 맹주 자리에 올랐으나, 그것은 껍데기일 뿐 아테네가 채웠던 알맹이를 채울 수 없었다. 스파르타는 아테네의 해외 재산을 모두 몰수하고 함대를 12척으로 제한했으며, 아테네를 스파르타의 동맹시로 만들었다(페르시아 전쟁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한 것을 감안해 독립만은 허용했지만 사실상 스파르타의 속국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그리스 전체로 볼 때 그것은 자승자박이었다. 아테네라는 권위의 중심이 사라진 다음에는 폴리스 체제의 모순이 더욱 노골화되기 시작했다. 그런 점에서 펠로폰네소스 전쟁은 그리스 전체의 공멸을 가져온 전쟁이었다.

 

 

죽어가는 병사 전쟁에서 부상한 병사의 모습이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일어나기 전인 기원전 460년경의 작품이지만 전쟁의 참상은 언제 어디서나 마찬가지다. 전형적인 중장보병의 차림인데, 창을 놓치고 방패만 손에 쥔 채 기어가는 모습이 안타깝다.

 

 

인용

목차

한국사 / 동양사

최초로 맞붙은 동양서과 서양

최종 목표는 아테네

마라톤의 결전

최후의 승부

유럽 문명을 구한 아테네와 스파르타

전후의 새 질서

분쟁의 싹

공멸을 가져온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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