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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사, 3부 뿌리② - 1장 로마가 있기까지, 평민들의 총파업 본문

역사&절기/세계사

서양사, 3부 뿌리② - 1장 로마가 있기까지, 평민들의 총파업

건방진방랑자 2022. 1. 2. 1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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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민들의 총파업

 

 

로마 초기 공화정은 귀족들이 주도한 과두정의 성격을 띠고 있다는 점에서 처음부터 그리스와 비슷한 문제를 안고 있었다. 솔론의 개혁도 귀족들이 모든 것을 독차지한 폐단에서 생겨났듯이, 로마에서도 귀족들이 토지와 각종 특권을 차지하고 평민들은 철저히 소외된 게 문제였다(로마의 또 다른 신분으로는 노예가 있었는데, 이들은 거의 전쟁 포로들이었다).

 

귀족들은 원로원원로원은 라틴어로 세나투스(senatus), 영어로는 senate라고 쓰는데, 양원제를 취하고 있는 현대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상원이라는 뜻으로 쓰인다. 나중에 보겠지만 서구 근대에 양원제가 성립한 것은 시민계급이 성장해 신분제가 약화되면서 의회가 둘로 나뉘어 귀족들이 상원을 구성하고 시민 대표들이 하원을 구성한 데 기인한다(432~433쪽 참조). 로마 원로원 역시 귀족들의 기구였으므로 그 말을 그대로 상원의 뜻으로 쓴 것이다. 우리말로 번역하면 느낌이 달라지지만, 원로원과 상원이 원래 같은 용어라는 점에 유념할 필요가 있다을 구성해 과두정을 공식화했고, 귀족들 중에서 다수의 정무관(magistratus, 원로원에서 실무를 담당하는 운영위원)과 두 명의 집정관(consul, 행정 총책임자로서 정무관 중에서 뽑는다)을 임명해 정치를 맡겼다. 왕정을 지극히 혐오하던 귀족들이었으므로 정무관과 집정관은 철저히 임기제로 운영해 독재를 막았다. 국가 비상사태에는 집정관이

일시적으로 독재관(dictator)이 되어 전권을 장악했지만 그 기간도 6개월을 넘지 못하도록 했다. 민회가 있었지만 민회를 소집하는 권한은 집정관에게 있었으므로 평민들의 정치적 발언로는 거의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더구나 귀족들에 비해 로마의 평민들은 성격이 단일하지 않은 게 문제였다. 평민들 중 일부는 귀족들과 피호 관계(clientela)를 맺고 있었다. 그들은 귀족을 보호자로 삼고 신의와 의무에 바탕을 둔 도덕적 관계를 맺고 있었으므로 일반 평민과는 달리 귀족의 편에 속할 수밖에 없었다(이런 전통이 후일 중세 시대에 영주-기사의 계약 관계로 발전하게 된다). 그들을 제외한 평민다운 평민은 도시 장인, 자유로운 농민, 부유한 상인, 가난한 이주민 등이었는데, 이들 역시 이해관계가 각기 달라 행동을 통일하기가 쉽지 않았다. 오늘날로 말하면, 자본가에 비해 노동자의 행동 통일이 더 어려운 것과 비슷하다.

 

그러나 외부의 압력이 강해질수록 내부의 통일은 더 쉬워지는 법이다. 사실 기원전 5세기 초 로마의 상황은 솔론의 개혁이 실시된 80여 년 전의 아테네보다는 드라콘의 법전이 생겨날 무렵인 200여 년 전 아테네와 비슷했다. 평민들에게 가장 큰 고통을 준 것은 정치적 발언권에 앞서 법 체계였기 때문이다. 명문화된 법전이 없었으므로 모든 법은 관습법이었고, 그러므로 귀족들이 알아서 처리하는 식이었다.

 

 

하지만 로마의 평민들은 법전을 만들라는 요구 정도에 만족하지 않았다. 기원전 494년 그들은 아무도 생각하지 못한, 역사상 전무후무한 저항운동을 구사한다. 바로 철수. 로마의 평민들은 서로 손을 맞잡고 로마 시를 빠져나가는, 문자 그대로의 철수를 단행했다. 철수라면 파업에 비해 뭔가 소극적인 저항 같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철수는 지금으로 말하면 시민 총파업에 해당한다. 오늘날에도 기술자, 농민, 상인 등이 전부 파업에 동참하면 나라 전체가 즉각 마비될 것이다. 따라서 철수는 가장 적극적인 투쟁 방식이었다. 더구나 로마 시를 나온 평민들은 성스러운 언덕에 모여 있었으므로 정부가 함부로 군대를 동원해서 해산할 수도 없었다. 하기야, 억지로 진압하려 해도 안 되었을 것이다. 병사도 대부분이 평민이었으니까.

 

투쟁의 대가는 아주 컸다. 평민들은 철수를 통해 자신들의 정치조직인 평민회와 평민의 대변인인 호민관(tribunus)이라는 관직을 얻어냈다. 특히 호민관의 권력은 막강했다. 호민관은 평민들의 강력한 지원을 받으며 행정·사법·군사 모든 분야에서 커다란 영향력과 발언권을 누렸다. 로마 최초의 성문법인 12표법은 바로 그들의 활약으로 이루어졌다. 그리스에서는 드라콘이라는 귀족이 법전을 만들어 베푸는 식이었으나 로마에서는 평민들이 투쟁한 결과로 법전을 얻어낸 것이다.

 

드라콘의 법전이 아테네의 아고라에 공시되었듯이, 기원전 451년에 12표법은 청동판으로 만들어져서 로마 광장에 공시되었다. 그 힘은 드라콘의 법전보다 더욱 강했다. 당시 로마의 청소년들은 12표법의 조항들을 외우고 다녔고, 일부 조항들은 이후 비잔티움 시대까지도 적용되었다(로마의 철학자 키케로는 12표법의 조항을 노래로 만들어 불렀다고 한다). 법전의 내용은 정확히 전해지지 않으나 소송, 가족, 상거래 등 당시 생활상의 필요와 관련된 사항들로 이루어졌을 것으로 추측된다. 내용보다 중요한 것은 이렇게 성문법전이 마련됨으로써 귀족들의 주먹구구식 법 적용이 사라졌다는 점이다.

 

이런 진보의 속도가 지속되었더라면 로마의 공화정은 얼마 안 가 근대적인 공화정과 비슷해졌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평민들이 주도하는 거센 신분 투쟁의 고삐가 늦추어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 닥쳐왔다. 그것은 바로 로마 전체의 존폐와 관련된 중대한 위협, 로마인들로서는 최초로 겪는 대규모의 외침(外侵)이었다. 위기를 맞은 로마에 다행스런 점은 신분 투쟁의 결과로 군대의 개혁이 일어난 것이었다. 로마의 평민들은 그리스로부터 중장보병 밀집대형 전술을 도입하고 상비군적 성격을 가지는 시민군을 구성했다. 갓 태어나 이제 막 골격을 갖추기 시작한 로마를 위기에 빠뜨린 외부의 적은 누구였을까?

 

 

인용

목차

한국사 / 동양사

늑대가 우는 언덕에서

로마를 빛내준 조연들

평민들의 총파업

고난 끝의 통일

귀족정+민주정+왕정 로마 공화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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