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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실에 찾아온 유학자들, 맹자 - 맹자, 후세에 영광을 얻다 본문

고전/대학&학기&중용

강의실에 찾아온 유학자들, 맹자 - 맹자, 후세에 영광을 얻다

건방진방랑자 2022. 3. 5. 1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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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자, 후세에 영광을 얻다

 

 

유학 사상에서 맹자가 중요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그가 최초로 유학 사상을 철학적인 체계로 무장시켰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그는 최초의 유학 사상 이론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가 만든 체계는 성선설(性善說)이라는 잘 알려진 주장으로 요약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도덕적으로 선한 본성을 가지고 태어났다는 뜻이지요. 만약 그의 주장이 옳다면, 성인이 되려는 사람들은 모두 이 선한 본성을 확충하여 현실화시켜야 할 것입니다. 바로 여기서 유학의 역사를 가로지르는 수양론적 전통이 확립됩니다. 사실 맹자 이전에 공자는 인간의 본성에 대해 언급하기를 극도로 자제했습니다. 논어』 「공야장편을 보면, 제자 자공이 다음과 같이 말했던 적이 있습니다.

 

 

예의제도에 관한 선생님의 문장은 들을 수 있었으나, 선생님께서 본성과 천도에 대해 말씀하시는 것을 들을 수가 없었다. 논어』 「공야장

子貢曰: “夫子之文章, 可得而聞也; 夫子之言性與天道, 不可得而聞也.”

자공왈: “부자지문장, 가득이문야; 부자지언성여천도, 불가득이문야.”

 

 

자공의 말을 살펴보면, 공자는 형이상학적 논증보다는 인자(仁者)로서의 실천적 삶을 지향했던 사상가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맹자는 공자와는 달리 인간의 본성을 이론적으로 체계화하는 것에 몰두했지요.

 

공자와 맹자의 차이가 분명하게 드러나는 또 다른 지점은 예()라는 개념과 관련된 부분입니다. 공자는 예를 주례라는 주나라의 객관적인 정치 질서로부터 사유했습니다. 공자는 예를 어떤 사회이든 그 사회가 안정되려면 반드시 실천해야 할 외적인 규범으로 간주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맹자는 예라는 것이 외재화된 규범이라기보다 사양지심과 같은 내재화된 인간의 선천적 마음이라고 이해했습니다. 맹자는 예를 인간의 내면으로 완전히 환원시킨 것이지요. 또한 맹자의 경우, 측은지심(惻隱之心)에 비해 예가 실현된 사양지심은 그 중요성과 위상이 떨어지는 마음입니다. 비록 두 가지 모두 우리의 본성으로부터 비롯되었다 할지라도 말입니다. 이것은 맹자가 예보다는 인이라는 개념을 중시했다는 점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맹자가 추구한 이상적인 정치를 인정(仁政)이라고 불렀던 것도 그가 인을 가장 중시했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유학자 순자가 맹자를 비판하게 된 것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순자는 유학자들의 스승, 즉 공자의 사상에서 예가 차지하는 위상을 다시 복원시키려고 했던 인물입니다. 맹자의 논리에 따르면, 우리는 인자가 되기 위해서 객관적인 사회적 규범을 굳이 따를 이유가 없게 됩니다. 자기 내면의 본성만 생각할 줄 알아도 대인 또는 군자가 될 수 있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순자는 바로 이점을 문제 삼습니다. 그는 공자의 유학 사상이 극기복례(克己復禮)’라는 생각으로 응축될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게다가 예를 회복해야만 한다는 생각, 다시 말해 예를 실천해야만 한다는 생각은 우리의 본성이 선하지 않다는 관점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만약 본성에 의해 저절로 선해질 수 있다면, 객관적 규범으로서 예를 따로 학습할 이유가 전혀 없을 테니까요. 순자의 성악설(性惡說)이 출현했던 것도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맹자와 순자 중 과연 누가 승리하게 될까요? 누가 공자의 수제자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결과적으로 본다면 그들이 살았던 전국시대에는 순자가 승리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순자의 유학 사상이 당시의 주류 유학으로 공인되었기 때문이지요. 뿐만 아니라 진나라의 주류 사상인 법가 사상도 순자의 제자들에 의해 체계화되었습니다. 그러나 한나라가 출현한 이후에는 상황이 역전됩니다. 순자는 이단이고, 오히려 맹자야말로 정통이라는 인식이 퍼져나가게 되었으니까요. 진나라를 무너뜨린 한나라 지식인과 관료들은 진나라의 이념인 법가 사상이 순자에게서 기원했다고 보고 그를 비판했기 때문입니다. 이때부터 맹자는 공자와 함께 공맹으로 불리면서 진정한 유학자로 존중받기 시작합니다. 순자가 인정받지 못한 이유에는 외적인 강제력과 교육을 지나치게 강조했던 탓도 있습니다. 외적인 강제력에 대한 인정은 결국 지식인들의 자율성을 훼손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지요. 자율적인 자기 수양으로 성인이 될 수 있다는 맹자의 생각이, 자신들의 자율성을 추구하던 한나라 당시 지방 호족들과 지식인들의 구미에 맞아 다시 세상에서 빛을 보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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