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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실에 찾아온 유학자들, 왕수인 - 구체적인 어떤 것을 향해가는 마음 본문

고전/대학&학기&중용

강의실에 찾아온 유학자들, 왕수인 - 구체적인 어떤 것을 향해가는 마음

건방진방랑자 2022. 3. 7. 1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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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체적인 어떤 것을 향해가는 마음

 

 

왕수인의 주장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마음과 무관한 사물은 없다는 독특한 생각이지요. 이것은 마음이 가지 않으면 사물도 존재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이다라는 뜻으로 번역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산길을 걸을 때 우리의 마음이 크게 열려 있지 않은 경우, 다시 말해 어떤 일을 염려해서 그 일에 온통 마음이 가 있는 경우를 생각해보세요. 산길에서 수없이 아름다운 것들을 만나도 보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반면 산길에서 만나는 이름 모를 꽃과 새들에게 마음이 간다면 우리의 마음은 세상을 품을 정도로 넓게 확장될 것입니다.

 

결국 마음이 가야만 외부 사물도 존재감을 가질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왕수인의 근본적인 통찰이었지요. 그렇다면 사물의 이()는 어떻게 될까요? 주희는 외부 사물의 이를 탐구하라고 가르쳤습니다. 바로 격물치지(格物致知)’ 공부이지요. 주희를 존경했던 왕수인이 젊었을 때 대나무의 이치를 찾으려고 몰두했던 공부 방법이었습니다. 외부 사물을 마음이 그것으로 향해야만 존재하는 것이라 하면, 당연히 사물의 이도 마음이 가지 않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왕수인이 척박했던 용장에서 깨달은 것이 바로 이것이었지요. 마침내 그는 주희의 문제점을 극복하게 되었다고 생각했습니다. 새로운 통찰을 얻고 나자 왕수인은 주희의 격물치지 공부를 비판하려고 합니다. 주희의 격물치지는 왕수인의 관점과는 달리, 마음 바깥에 마음과 무관한 사물이 있다는 일상적인 이해를 대변한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이제 그의 이야기를 살펴보기로 하지요.

 

 

주자가 말한 격물이라는 것은 사물에 나아가 그 이()를 연구하는 데 있다. 사물에 나아가 이를 연구한다는 것은 각각의 개별적 사물에서 이른바 정해진 이를 구하는 것이다. 이것은 내 마음을 사용하여 각각의 개별적인 사물 가운데서 이를 구하는 것이니, 마음과 이치를 둘로 나눈 것이다.

朱子所謂格物云者 在卽物而窮其理也 卽物窮理 是就事事物物上求其所謂定理者也 是以吾心而求理於事事物物十中 忻心與理爲二矣

주자소위격물운자 재즉물이궁기리야 즉물궁리 시취사사물물상구기소위정리자야 시이오심이구리어사사물물십중 흔심여리위이의

 

무릇 각각의 개별적 사물에서 이를 구하는 것은 부모에게서 효의 이를 구한다는 말과 같다. 부모에게서 효의 이를 구한다면 효의 이는 과연 내 마음에 있는가, 아니면 부모의 몸에 있는가? 가령 부모의 몸에 있다면 부모가 돌아가신 뒤 내 마음에는 곧 어떤 효의 이도 없게 되는가? 어린아이가 우물에 빠지는 것을 보면 반드시 측은하게 여기는 이가 생긴다. 이 측은하게 여기는 이는 과연 어린아이의 몸에 있는가, 아니면 내 마음의 양지(良知)에 있는가? 전습록135

夫求理於事事物物者 如求孝之理於其親之謂也 求孝之理於其親 則孝之理其果在於吾之心邪 抑果在於親之身邪 假而果在於親之身 則親沒之後 吾心遂無孝之理歟 見孺子之入井 必有惻隱之理 是惻隱之理果在於孺子之身歟 抑在於吾心之良知歟 其或不可以從之於井歟 其或可以手而援之歟 是皆所謂理也 是果在於孺子之身歟 抑果出於吾心之良知歟

부구리어사사물물자 여구효지리어기친지위야 구효지리어기친 즉효지리기과재어오지심야 억과재어친지신야 가이과재어친지신 즉친몰지후 오심수무효지리여 견유자지입정 필유측은지리 시축은지리과재어유자지신여 억재어오심지량지여 기혹불가이종지어정여 기혹가이수이원지여 시개소위리야 시과재어유자지신여 억과출어오심지량지여

 

 

왕수인은 주희의 격물 공부의 큰 문제점은 바로 마음[]과 이[]를 둘로 나누었다는 데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에 따르면 주희의 격물 공부는 다음과 같은 구조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마음을 가진 나는 여기에 존재하고, 이를 가진 사물은 저기에 존재합니다. 나는 나의 마음을 가지고 저기에 있는 사물을 연구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사물이 가진 이를 내 마음을 이용하여 인식하게 되는 것이지요. 이에 왕수인은 과연 사물이 우리의 마음과 무관한지, 나아가 사물이 가지고 있다는 이가 우리의 마음과 무관한 것인지 되묻고 있습니다.

 

그는 효()라는 이를 생각해보자고 제안합니다. 주희의 격물 공부의 관점을 따른다면, 효의 이는 부모에게 있기 때문에, 우리는 부모를 탐구함으로써 효의 이를 알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물론 주희가 왕수인의 생각처럼 그렇게 주장했는지는 또 다른 문제입니다. 사실 주희 역시 사물들의 이치란 곧 내 마음의 본성과 같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왕수인은 주희가 자기 마음 자체를 공부하기보다 외재적인 사물의 이치에 많은 관심을 둔 점을 못마땅하게 생각했습니다. 바로 이런 점 때문에 그는 주희가 마음과 이치를 둘로 나누어버렸다고 혹평했던 것이지요. 아무튼 이어지는 글에서 왕수인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두 가지 가능성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라고 말합니다. 효라는 이()는 과연 부모에게 있습니까, 아니면 내 마음에 있습니까? 그의 주장에 따르면, 효라는 이()는 내 마음에 있습니다. 여기에서 내 마음이라는 표현에 주의해야 합니다. 앞에서 강조했던 것처럼 그것은 이미 구체적인 어떤 것으로 향해 있는 마음이니까요. 물론 이 경우는 부모님에게로 향해 있는 마음일 것입니다.

 

자신의 논지를 강화하기 위해서 왕수인은 맹자에 등장하는 측은지심(惻隱之心)의 사례를 다시 끌어옵니다. 어린아이가 우물에 빠질 때 우리에게는 측은지심이라는 동정심이 일어나게 되지요. 여기서 또 다시 왕수인은 우리에게 하나를 선택하라고 제안합니다. 측은지심이라는 이()는 우물에 빠지는 아이에게 있습니까. 아니면 내 마음에 있습니까? 이 경우에도 측은지심이라는 이는 내 마음에 있겠지요.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우리의 마음이 우물에 빠지는 아이에게로 향했기 때문에 측은지심이 일어날 수 있었다는 점이지요. 만약 다른 것에 마음이 팔렸다면, 우리의 마음은 아이가 우물에 빠지는 사태로 다가갈 수 없었을 테니까요. 마치 우리의 마음이 부모님에게로 가 있을 때에만 효를 행하는 마음이 출현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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